반디앤루니스, 서울극장, 행화탕, 2G 서비스··· 올해 사라져간 것들이다. 우린 그렇게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
서울로 상경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아현동 낡은 주택의 옥탑방이었다. 옥탑방은 미로 같은 골목길이 이어진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해 있었다. 옥탑 마당에 서면 전깃줄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현동의 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날들을 떠올리며 뜨거워지곤 했다. 드넓은 서울 땅에서 내게 허락된 건 몇 평 남짓이 전부였지만, 그곳이 좋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네 정서가 좋았다. 동전이 없으면 쓰라고 커피 자판기 옆에 저금통을 놓아뒀던 슈퍼 아저씨, 나무 아래 평상에서 화투를 날리며 “고!”를 외치시던 어르신들, “쓰레기 버리면 급살을 맞는다”라고 쓰인 경고문들조차 익살스러워서 좋았다.
평화롭던 골목에 뒤숭숭한 기운이 서린 건 아현동이 뉴타운 사업지로 지정되면서다. 집을 걸고 벌여야 하는 팽팽한 머니게임으로 이웃 간 등을 돌리는 모습이 종종 목격됐다. 어떤 마음들은 몸보다 빠르게 마을을 떠났다. 쓸 만한 물건들이 쉽게 버려졌고, 돌보지 않아 헐어가는 집들이 늘었고, 그렇게 골목은 조금씩 삭막해졌다. 시한부 판정이 골목을 병들게 한 것일까. 병들어가는 마음이 골목을 시한부로 만든 것일까, 그 해답을 풀지 못한 채 나는 정든 아현동을 떠났다. 몇 년 후 TV에선 “개발 호재가 쏟아지는 핫플레이스”로 이곳이 소개되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주택들이 있던 자리엔 1군 건설사들이 지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희미해지는 아현동에 대한 나의 기억을 꾸준히 이어주던 게 ‘행화탕’이다. 1958년 태어난 행화탕은 아현동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대중 목욕탕이었다. 2000년대 들어 찜질방에 밀리더니, 일대가 재개발되기 시작하면서 2008년 폐업했다. 아현동의 많은 것이 그랬듯 행화탕도 방치됐다. 행화탕에 숨결이 다시 돈 건 2016년 기획그룹 축제행성이 이곳을 임대해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미면서다. ‘예술로 목욕합니다!’라는 슬로건이 절묘했다. 몸의 때를 미는 목욕탕은 그렇게 정신의 때를 벗겨내는 공간으로 사랑받았다. 그런 행화탕이 지난 5월, 장례식을 치르며 잠들었다. “5월 24일까지 퇴거하라”는 공문이 날아 온 후였다. 장례식엔 1천여 명의 조문객이 찾았다. 덕분에 행화탕의 마지막은 조금 덜 외로웠을까. 이미 많이 개발됐고, 지금도 개발 중이며, 앞으로도 쭉 개발될 아현동에서 내가 아는 풍경은 언제고 완전히 자취를 감출 것이다. 나는 내 20대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조금 많이 서글펐다.
행화탕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16일, 반디앤루니스를 운영하는 서울문고가 도산했다. 1988년 삼성동 무역센터에 대형 매장을 선보인 지 33년 만이다. 신세계 강남점을 찾았다가 영업 종료 공고문을 발견한 나는 굳게 닫힌 서점 문 앞에서 잠시 벙쪘다. 교보·영풍 문고에 이어 오프라인 서점 3위 규모를 자랑하는 서점이? 날벼락 같은 심정의 나와 달리 출판 업계에선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도서 판매가 온라인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사세가 축소됐고, 코로나19로 이중고에 시달렸다는 게 일각의 평이다. 온라인 매출 증가로 오프라인 손실을 방어한 교보문고와 달리, 소비 패턴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배경에 유통 구조 변화가 있다.
클릭만 하면 종이책을 집 앞까지 가져다주는 세상이 도래하면서 오프라인 서점은 존재를 위협받았다. 이동 과정에서 종이가 썩는 것도 아닌데, 배송은 또 어찌나 총알인지. e-Book의 등장은 그런 배송 시간조차 지워냈다. 온라인 서비스를 갖추지 못한 서점들이 휘청이는 건 당연한 수순일까. 마침 은평구 주민들과 25년을 함께한 불광문고도 9월 5일 문을 닫았다. 취향을 내세운 독립 책방들이 이 와중에 분투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장밋빛 미래를 장담할 입장은 못 된다. 월세는 가파르게 오르고, 책만 팔아서는 운영이 어렵다. 그렇게 지난 5월, 한남동 스틸북스와 아크앤북 을지로점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서점이라는 공간을 생각해본다. 붕 뜬 약속 시간 때우러 들어간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의 문장에 홀려 질렀던 책이 몇 권이었던가. 그렇게 만난 책에서 삶의 고비마다 위로받은 경험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읽고 싶은 책이 있어 서점에 들르는 날도 있었지만, 서점에 들렀다가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는 날도 많았다. “괜찮은 이성을 만나려거든 서점에 가라”는 연애 고수의 나름 신빙성 높은 조언을 실천하던 내 친구는 실제로 서점에서 만난 사람과 오랜 연애를 했고, 결혼도 했다. 예기치 못한 문장의 발견, 사람과의 만남… 온라인이 결코 제공하지 못하는 경험들이 서점에 있다. 그런 경험을 체험할 기회를 놓치게 될 다음 세대들이 불행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8월 31일엔 서울극장이 문을 닫았다. 그림 간판 보며 영화를 보러 다녔거나, 암표상으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본 이들이 대체로 서울극장의 마지막을 안타까워했다. 1979년 개관한 서울극장은 1980~1990년대 한국 영화 발전에 거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단성사·피카디리와 함께 ‘골든 트라이앵글’로 불리며 종로 시대를 이끌었다. 서울극장 매표소에 늘어선 줄은 흥행의 바로미터였다. “옛날에는 개봉 날 서울극장 앞에 모이곤 했어요. 바로 옆 2층에 있는 ‘팡세’라는 커피숍에 배우와 관계자들이 쭉 둘러 모여 매표소를 내려다보며 노심초사했죠. 관객 줄이 길면 ‘중국집 가서 탕수육 먹자!’, 썰렁하면 ‘자장면이나 먹자’ 이랬죠.” 몇 해 전 인터뷰에서 만난 봉준호 감독이 서울극장을 떠올리며 해준 말이다.
영화 기자 타이틀을 처음 달았을 때, ‘기자 시사회’는 서울극장에서 자주 열렸다. 시사회가 끝나면 선배들과 근처 노포로 이동해 술잔 부딪치는 게 당시 기자 생활의 큰 낙이었다. 서울극장은 스타들이 무대인사로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스타들을 따라 팬들도 자주 밀집했다. 그러나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가 동네마다 우후죽순 생기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영화를 보기 위해 종로까지 갈 필요가 없게 됐다. 단성사가 폐업하고, 피카디리에 CGV가 들어섰다. 서울극장만이 꿋꿋하게 버텼다. 그러나 코로나19에 올라탄 OTT 상승세 앞에서 서울극장은 결국 작별이란 이름을 꺼내 들었다.
올해는 유독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가로수길 랜드마크였던 13년 역사의 ‘커피스미스 1호점’이 7월 사라졌고,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다”던 ‘011’이 5G라는 세계를 만나 영원히 꺼져버린 데 이어, 올해 6월에는 마지막 남은 2G서비스 ‘019’도 망 철거와 함께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자주 가던 골목 풍경은 사진 속 풍경화로만 남았고, 즐겨 찾는 슈퍼는 무인 시스템으로 바뀌어 사람 대신 기계만 남았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지만, 이토록 빠르게 무언가가 부서지고 새로운 게 출몰하는 시대가 있었던가.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우린 많은 것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고, 그 속도를 따라잡기가 버거운 나는 ‘사라져간 것’들이 내 안에 남긴 흔적 앞에서 서성이는 날이 부쩍 잦아졌다. 의미심장하게도 서울극장의 마지막 상영작은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였다. 영화 마지막 장면엔, 인간처럼 대화하는 리무진들이 등장한다. 리무진들은 말한다. “우리는 곧 폐차장으로 밀려날 거야.” 사멸해가는 것들에 대한 탄식이 담긴 영화 앞에서 나는 또 서성였다.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 피처 에디터
-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