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화가 자신을 달구며 묵묵히 뛰어온 길.
GQ 도쿄 올림픽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여전히 연락 많이 와요?
JH 연락과 응원 메시지가 쏟아졌다가 지금은 지인들 연락이 오는 정도예요. 근대 5종이 비인지 종목이라 속상한 부분이 많았거든요.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면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GQ 주로 어떤 말을 듣고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JH 코로나로 인해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데 저희가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었다는 말들이 크게 와 닿았어요. 근대 5종 중계가 거의 없다 보니 그런 반응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GQ 이번 올림픽은 메달 색 타령보다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분위기가 새로웠어요. 이를 크게 체감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JH 맞아요. 너무 감사해요. 이제껏 제가 쉼 없이 달려온 길을 인정받았구나, 지난 시간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어요.
GQ ‘4등’ 대신 ‘세계 4위’라는 표현도 자주 보이더군요. 세계 4위를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JH 평생 잊지 못할 등수예요. 복합적인데, 아쉬움도 있고 후련함도 있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다시 경기를 한다 해도 더 잘할 순 없을 것 같아요.
GQ 마지막 레이저런 경기에서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묵묵히 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JH 전에도 로봇처럼 뛴다는 소릴 몇 번 들었어요. 오직 뛰는 데만 집중해요. 호흡, 피치, 자세. 하지만 막판 스퍼트 때는 진짜 힘들어요. 남은 힘을 쥐어짜며 ‘차라리 날 죽여줘’라고 속으로 외쳐요.
GQ 펜싱, 수영, 승마를 치른 시점에 2위에 올랐어요.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나요?
JH 당연히 했고요. 여기까지 잘 왔으니 남은 경기 때문에 무너지면 안된다, 긴장하거나 욕심 부리지 말자고 각오를 다잡았어요.
GQ 세 번째 올림픽 출전이었으니 좀 달랐을까요?
JH 생각보다 긴장이 덜 됐어요. 한 종목씩 치를수록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앞선 올림픽 경험 때문에 여유가 더해졌나 봐요. 3년 뒤 파리 올림픽에 나선다면 경기에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다음 올림픽에 대한 기대가 커요.
GQ 출전권부터 손에 넣어야 하죠? 다시 시작이네요.
JH 네, 자신 있어요.
GQ 본인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해요?
JH 언제든 한 방을 터뜨릴 수 있다는 점요. 기회만 있으면 치고 나갈 자신이 있어요.
GQ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딴 과정도 극적이었죠.
JH 원래 부상과 컨디션 난조 때문에 출전권을 확보하지 못했어요. 코로나 여파로 올림픽이 1년 연기된 사이 재정비할 수 있었고 국제대회에서 랭킹 포인트를 쌓아 도쿄행을 확정 지었어요.
GQ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를 정말 오래 해왔어요. 의미나 감정도 남다를 것 같아요.
JH 근대 5종이 저한테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면 ‘운명’이라고 해요. 근대 5종을 한국에 알리기 위해 거대한 운명이 저를 콕 집어서 여기까지 데려오지 않았나, 그런 사명감을 늘 갖고 있어요.
GQ 한 가지 종목만 하면 지루할 수 있어 근대 5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가장 자신 있는 종목 하나를 꼽는다면요?
JH 승마 종목 점수가 꾸준하게 잘 나와요. 무작위로 말을 배정하기 때문에 변수가 가장 심한 종목인데 저는 어떤 말이든 호흡이 잘 맞는 편이에요.
GQ 어렵다고 느끼는 건 뭐예요?
JH 펜싱은 할수록 더 어려워요. 아는 게 늘어나니까 생각도 많아지고 조금 망설이게 되더라고요.
GQ 여자부에선 김세희, 김선우 선수가 각각 11위, 17위를 차지하며 남녀 모두 올림픽 역대 최고 성적을 기록했어요. 지금이 한국 근대 5종의 황금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JH 사실 한국 근대 5종 실력은 10년 전부터 알아줬어요. 단체전과 계주에선 늘 메달권이에요. 한국 선수들은 같이 뛸 때 시너지가 잘 나요. 크게 실수하는 경우가 드물고 멘털이 강하거든요. 외국 선수 중에는 간혹 다혈질인 성격이 있어요. 경기가 안 풀리면 스스로 경기를 망치기도 해요.
GQ 근대 5종 불모지였던 한국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하는 데 정진화 선수의 역할이 컸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어요. 출전하는 대회마다 메달을 따고 한국 근대 5종 사상 최고의 성적을 냈죠. 그중에서 가장 큰 경험은 언제였어요?
JH 개인전 우승을 차지한 2017년 세계선수권대회요. 그릇이 넓어졌달까, ‘근대 5종 정진화’로서 큰 사람이 됐어요. 경험, 실력, 마인드 다 넓어졌죠.
GQ 특별히 무엇이 잘됐어요?
JH 첫 종목인 펜싱부터 출발이 좋았어요. 35명과 원포인트 승부를 겨뤄 25승을 했어요. 수영도 평소보다 기록이 잘 나왔고, 승마에서 한 번 낙하했지만 사격을 한 발만 놓쳤어요. 다섯 가지 퍼즐이 딱딱 잘 맞았어요.
GQ 자신이 세운 숱한 기록들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것도 있겠죠?
JH 최초라는 타이틀요.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전, 단체전, 계주와 월드컵 파이널 1위 모두 한국 선수 최초로 이뤄냈어요. 한국 근대 5종의 시작 같은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GQ 아무렴요. 앞으로 계속 나아갈 거잖아요. 탐내는 최초의 기록 있어요?
JH 올림픽 금메달요. 올라갈 일만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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