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여섯 가지 시선.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공구대에서 베리타스 블록 플레인을 꺼낸다. 휠을 돌려 레버 캡을 들어낸 후 몸체에서 날을 분리한다. 조절 장치를 해체하고, 프런트 노브와 토 세팅 나사까지 푼다. 긴장이 풀린 11개의 부품이 병렬되어 누워 있다. 전체를 분해한 것은 8개월 만이다. 날끝은 눈에 띄게 무뎌져 있고, 레버 캡 아래 위치한 부분에는 옅은 멍처럼 녹 자국이 스며 있다.
흔히 동양 대패라고 불리는 목대패를 막대패로 돌리고 철로 된 서양 대패를 주력 대패로 쓰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이다. 목대패는 스스로의 생각이라도 있는 듯 예민하고 변덕스러웠다. 나는 그 근친의 느낌이 거슬렸다. 우연히 써본 서양 대패는 자의식이 적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는 도구에 불과했다. 나는 그 건조함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길이 17센티미터, 폭 45센티미터에 불과한 블록 플레인은 적절한 이질감과 유용성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손이 되었다.
녹 지우개와 록타이트의 방청 윤활제, 노턴 샤프닝 오일, 면으로 된 천을 꺼내 블록 플레인 옆에 나란히 둔다. 다시 보니 날 깊이를 조절하는 노브와 맞닿는 부분에도 작은 녹들이 보인다. 잠시 날을 연마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거뒀다. 오늘은 녹이 슬지 않을 정도의 정비만 하기로 한다.
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이 비가 가을이 사그라지게 하고 그 자리에 겨울을 불러올 것이다. 아마도 다음에 내리는 비는 독한 한기를 품고 있을 것이다. 봄에는 이유 없이 내내 앓았고, 여름에는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 때 들어온 주문들의,견적서를 내고, 여러 제안에 대한 답을 하고, 또 여러 제안서를 쓰다 보니 가을이 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송년의 연락들.
공방 사무실에 앉아 고객에게 보낼 견적서와 업체에 보낼 제안서, 그리고 두 자리 숫자로 남은 한 해의 스케줄을 정리하다 충동적으로 작업실로 들어와 대패를 꺼내게 되었다. 목수의 어지러운 마음을 가다듬는 데는 공구 정리만 한 게 없다. 여러 자루의 대패와 끌 중 무의식적으로 블록 플레인에 손이 갔다. 아마 오늘 블록 플레인의 분해와 조립, 정비가 올 한 해 공구정비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내게 공구 정비는 작업이 끝난 시점이 아니라 시작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구를 정비하는 것은 하나의 작업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녹 지우개로 녹이 슨 부분들을 문지른다. 녹이진회색 지우개와 함께 뭉쳐진다. 녹이 벗겨지며 쇠의 묵은 표면도 함께 벗겨진다. 적절한 속도로 녹을 제거한 후 헝겊에 오일을 묻혀 닦아낸다. 헝겊이 갈색으로 짙어진다. 잘라놓은 몇 장의 헝겊이 짙은 갈색에서 바랜 흰색으로 변함에 따라 도색되지 않은 부품들의 광도가 일정해진다. 오일이 배어들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공방의 큰 문을 열고 비를 바라보며 담배를 하나 문다.
가구를 만드는 목수로서의 삶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이다. 어떤 것도 끝나지 않는다. ‘날물’의 끝이 무뎌지면 갈아서 다시 기능을 시작한다. 전시가 끝나면 다음 전시를 준비한다. 한 점의 가구를 납품하면 다음 납품할 가구를 만든다. 목수로서의 삶은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직선이 아니라 순환하는 곡선이다. 끝과 끝이 만나지는 않지만 때로는 평행하고 때로는 교차하며 불규칙하게 순환한다. 순환은 삶을 긍정하게 하고 버티게 하지만, 때론 그 자체로 몹시 버겁다. 바래질 뿐 끝나지 않는 노동.
공방으로 들어와 ‘날물’부터 몸체까지 순서대로 가볍게 방청제를 뿌린다. 11개의 부품에 방청제를 다 뿌리면 다시 역순으로 깨끗이 닦아준다. 그리고 분해의 역순으로 조립을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레버 캡까지 덮으니 처음의 완전한 블록 플레인으로 돌아온다. 토 나사를 포함한 모든 조임 부품을 70퍼센트 정도의 긴장으로 조정한다. 조이는 모든 것은 시간의 장력으로 풀어지며 절로 느슨해진다. 기능의 정점으로 쓸 때까지 조금은 느슨하게 조여놓아야 오래 쓴다. 깨끗한 천을 꺼내 전체를 닦고, 다른 대패들과 함께 놓는다.
작업실을 나와 공방 사무실로 들어간다. 내년에도 나는 앓을 것이고, 전시를 열 것이며, 가구를 만들고 견적서와 제안서를 쓸 것이다. 오늘, 순환하는 한 점의 시간. 나는 노트북을 열고 아까 작성하다 멈춘 일정표와 견적서, 제안서 파일을 연다. 비 냄새에서 쇠의 비린내가 느껴진다. 라디오에서 내일 아침까지 이 비가 계속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김윤관(목수, <아무튼 서재> 저자)
마침, 시작?
대한민국에서 초중고대학을 거쳐, 가까스로 취업에 성공했던 나는 이 나라에 뿌리 깊이 퍼진 역병을 수십 년째 견디며 살고 있다. 역병의 이름은 ‘마침표는 마침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불안증이다. 이 병에 걸리면 무언가를 마쳤을 때 찾아오는 해방감을 오롯이 느끼지 못하고, 곧바로 또 뭔가를 시작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며 광광대고 불안해한다. 그리고 이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것으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누구나 살면서 수많은 마침표를 경험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캠퍼스 생활을 시작하고, 대학을 마치면 첫 출근을 시작하고, 회사의 프로젝트 하나를 마치면 또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언뜻 희망차 보이지만, 이걸 실제로 하고 있는 내 입장에선 몹시 피곤하고 지지부진한 여정이다. 보스를 깨면 더 강력한 보스가 등장하고, 그 보스를 깨면 더더욱 강력한 보스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게임 같다고나 할까.
인생 전반이 아니라 나의 하루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디테일하게 피로하다. 지난 2주동안은 경쟁 PT라는 보스 깨기에 참여했다. 어떻게든 깨보려고 몸부림치느라 회사 일 외의 개인적인 삶은 모두 지워버린 일상을 보냈는데, 일을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하나의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보다 불안감이 더 크게 찾아왔다. PT 결과가 승리라면 그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고, 패배라면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다른 프로젝트를 또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회사 일에 집중하느라 3주 가까이나 얼어붙은 인스타그램에 올릴 웹툰 그리기를 시작해야만 했다.
이 보스 깨기 게임은 나의 숨이 진짜 마침표를 찍는 날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주입받은 ‘마침 = 시작’이라는 개념은 나 같은 사람이 꾸준히 뺑이 치며 뺑뺑이 돌게 만들기 위해 사회지도층이 만들어낸 개념 아닌가, 합리적(?) 의심까지 든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우울해하고 있을 수는 없지. 나약하게 주저앉아 세상을 비난하며 자조 섞인 말로 주둥이만 터는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페이지를 빌려 30년 넘게 앓아온 이 역병에 대항할 신약을 발표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정신 승리다.(뭔가 대단한 걸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포털 사이트에 ‘마침’을 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사전적 의미에 주목해보자. “마침: 어떤 경우나 기회에 알맞게. 또는 공교롭게” 그렇다. 마침을 무언가가 끝나는 모멘텀이 아니라, 마침 무언가를 발견하는 모멘텀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이런 거다. 2주 동안 나를 바들바들 떨게 한 경쟁 PT를 패배로 마쳤다고 했을 때,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비관하지 말고 새로운 먹거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 경쟁 PT에서 떨어졌으니 ‘마침’ 경쟁사 PT를 들어갈 수 있네? 경쟁사가 빌링이 더 크니까 더 큰 수확이네? 라고. 회의 시간에 좋은 아이디어가 없었는데 ‘마침’ 후배가 좋은 아이디어를 냈네? 이런 아이디어도 낼 수 있는 게 대단해! 나도 다음엔 이런 식으로 접근해봐야지! 웹툰 소재를 두고 고민 중이었는데 수다 떨던 친구가 ‘마침’ 재미있는 이야기를 던져주네? 이걸 그려야겠다!
인생은 순간순간의 마침표를 찍는 여정이며, 동시에 마침 무언가를 발견하는 여정. 그러니 ‘마침표’가 아니라 ‘마침’표들을 거점 삼아 숨을 고르고 끝까지 달려가 보자. 이런 식으로 내가 ‘마침’을 즐겨준다면, 악랄한 마침표는 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며 광광 울어대겠지. 통쾌하다! 어쩌면 이렇게 정신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최종 보스 깨기 아닐까? 최현정(카피라이터, 웹툰 <빨강머리N> 작가)
쉼표, 마침표. 쉼표, 마침표.
한 편 글의 마지막 마침표는 글 속 문장에 수많은 쉼표와 마침표를 찍어야 비로소 찍을 수 있다. 문장 사이사이 쉼표와 마침표 없이는 글은 지어지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일이 마지막 마침표를 찍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지만, 사이사이 과정에도 쉼표와 마침표는 계속 사용된다. 건축은 계획과 허가, 시공과 입주까지 짧게는 1년에서 2~3년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개인적으로 건축은 건축주의 요구사항, 주변 환경과 건물의 조화, 법규와 계획 사이 관계, 예산의 적절성, 각 시공 과정에서 시공성의 판단 등 수많은 관계 조율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사이에 쉼표와 마침표 없이는 절대로 건축물은 완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좋은 건물이 지어지기도 어렵다. 많은 사람의 서로 다른 입장과 현실적인 문제를 조율하다 보면 가끔 건축가라는 직업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푸념이 들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관계와 열정 속에 지은 집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래. 이거지!’라는 마음에 이 일을 결국은 반복하게 된다.
지금 사무실에서 가장 길게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약 7천 평의 부지에 한 스마트 팜 회사의 사옥과 스마트 팜 온실, 커뮤니티 시설 등을 계획하는 것이다. 2019년 여름에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2년 반 만에 드디어 올해 말 준공된다. 이 프로젝트는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곳에서 근래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하우스비전>이라는 국제주택전시회가 2022년 봄 개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우스비전’은 5년에서 10년 정도 가까운 미래의 집을 건축가들과 기업들이 함께 연구하고, 그 결과를 출판과 일대일 스케일의 집을 만들어 미래의 기술이 삶과 어떻게 접목되는지 집을 통해 현실감 있게 보여줄 수 있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무인양품 아트 디렉터로 잘 알려진 디자이너 하라 켄야가 기획해 2013년과 2016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2018년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한국 하우스비전은 여러 기업이 참여하는 이전 하우스비전과는 다르게 한국의 스마트 팜 기업인 ‘만나씨이에이’가 10여 명의 건축가, 디자이너 등과 협업해 진행한다. 국내 대기업들의 관심도 대단했지만 이 회사의 비전은 좀 특별했다. 농촌에서 미래를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기업의 수익 증가가 아니라 문화를 만들고 사람들이 살고 싶은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젊은 두 대표와 수십 명의 평균 연령 30대 초반의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다. 이런 비전이 만나씨이에이가 한국 하우스비전을 개최하게 된 이유다.
이번 하우스비전의 주제는 ‘농’(農)이다. 미래의 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농촌과 농업이라니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 200년간 근대의 역사는 제조와 서비스, 금융 중심의 산업 도시의 역사다. 한국 역시 열 명 중 아홉 명이 도시에 살고 있고, 그중 약 50퍼센트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런 결과는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와 농촌의 고령화, 도시의 과밀화를 만들었고, 많은 환경 문제와 공동체 문제 등은 현대 도시가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 되었다. 요즘 시골에서 한 달 살기를 비롯해 귀농과 귀촌 등 도시 생활의 대안을 찾는 시도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번 하우스비전은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집의 본질, 모듈 건축을 통한 집의 확장성, 온실과 집, 도시와 농촌의 경계, 도시 문화의 이식, 농업의 변화에 따른 삶의 변화, 이동수단과 집과의 관계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미래의 주거에 대한 고민들을 ‘농’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풀어간다. 농촌이 나무의 뿌리라면 도시는 나무의 줄기다. 과도한 집값 상승 문제나 과밀화로 대표되는 도시 문제와 고령화, 소멸 마을 등 농촌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역설적으로 도시와 농촌의 관계 설정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연말이 되었다. ‘올해 가상화폐가 장기적으로 오를 걸 알고 있었는데 왜 구입하지 못했지’라고, 시험 때 알고 있는 것을 실수로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래서 내년에도 오를까?” 라고 하면 곧바로 망설이는 것이 인간이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조금 앞의 미래를 지금 눈앞에 제시하고 만드는 것이 ‘비전’이다. ‘비전’은 미래에 대한 현재 시점의 시각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보이는 것은 선명하고 누구나 알 수 있고 선명한 미래는 현재의 길잡이가 된다. 내년 스마트 팜 기업 ‘만나씨이에이’와 <하우스비전>이 기대되는 이유다. 김대균(건축가)
마침표 대신 말줄임표
“건강한 나날 되시기를….” 메일의 마지막에 매번 적었던 2020년과 2021년.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안부를 물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고,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번역가와 서점지기라는 두 가지 직업을 가진 나의 일상도 망중한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갔다. 한창 작업 중이던 번역서의 마감이 잠정 연기되고, 출간을 미룬 책도 한 권 두 권 늘어났다. 이렇게나마 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눌러보는 것밖에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서점 운영은 캄캄한 터널 속에 더 깊이 갇혀버렸다. 늘어나는 확진자와 길어지는 집합 금지 기간 때문에 운영 시간을 줄여야만 해서, 어려운 시기라고 일부러 찾아주는 고마운 손님들마저 돌려보내곤 했다. 또 온라인 판매와 비대면 모임이라는 낯설고 어색하기만 한 환경에도 적응해야 했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어쩌면 쉼표가 필요했던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본 시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번역가로서 또 서점 운영자로서도. 두 가지 일에 허우적대며 나를 위한 삶이 무엇인지 잊고 살았는데 다행히도 쉬어가는 동안 잠시 여유를 가지고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씩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졌다. 나에게 잘했다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가져오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직업이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깨우치자 주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뜻밖의 소중한 인연도 만나게 된 한 해였음에 감사한다. 다가오는 내일을 꿈꾸기보다 오늘의 나를 위해 충실히 보내려고 했던 2021년은 얻은 게 참 많았다. 미뤄졌던 번역서도 차례차례 출간됐고, 나의 일상을 틈틈이 적은 글이 곧 책으로 만들어진다. 서점은 오랜 단골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응원 덕분에 더욱 단단해졌다. 지극 정성 돌보던 화초들이 시들해진 것 말고는 더할 나위 없는 한 해다.
그래서일까? 해마다 한 해의 마침표를 찍는 12월이 되면 아쉬움과 설렘이 뒤섞여 묘한 감정이 드는데, 올해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오롯이 나의 삶만을 생각하는 한 거기엔 조바심도 불안함도 없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자신의 소설 제목에 물음표 대신 말줄임표를 붙여달라는 말을 남긴 유명한 일화처럼 2021년을 떠나보내며, 나는 마침표 대신 말줄임표를 남기며 짙은 여운을 삼키고 싶다. 이 여운이 가시지 않는 아쉬움인지, 다음을 기약하는 기대감인지는 나만의 비밀로 간직한 채로. 박선형(번역가, 번역가의 서재 대표)
굿바이 방송국
“말줄임표는 점이 세 개다. 디테일 신경 쓰자.” 열댓 명의 피디와 작가가 모여 편집본을 보는 시사 시간, 선배는 나지막이 후배의 자막을 지적한다. 점 하나를 덜 찍고 더 찍고를 디테일이라 부르는 곳. 방송국 놈들이 먹고사는 곳이다. 말줄임표가 점 세 개라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된 나는 그 말 한마디를 금과옥조처럼 마음에 새긴다. ‘라떼’ 얘기다.
“원샷이랑 원샷을 이어 붙이면 어떡하냐, 컷이 튀잖아.”, “요새 유튜브에서는 다 이렇게 하는데요.”
편집 지적에 후배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어휴 그놈의 유튜브 유튜브. 십몇 년간 내가 ‘방송국 놈들’로 살아오면서 배운 디테일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그곳. 그래도 여기는 방송국이다. 나도 유튜브 편집 스타일은 잘 안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룰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후배에게 묻자 의뭉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유퀴즈’도 이렇게 편집하던데요. 안 보셨어요?” 이건 예상 못 했다. 흔한 말로 ㅂㅂㅂㄱ이다. 시청률 잘 나오는 프로그램이 이미 하고 있으면 그걸로 모든 논리는 완파된다. 이 이상 우겼다간 감 없는 선배 취급받기 딱 좋다. 어쩌면 이미 후배는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후배의 당당한 맞받아침에 할 말을 잃은 나는 퇴근하고 하릴없이 유튜브를 켠다.
그곳엔 점 두 개짜리 말줄임표 자막이 넘쳐나고, ‘안’과 ‘않’의 구분이 없으며 컷이 튄다는 개념도 없다. 디테일에 목숨 건 방송국 놈에게 유튜브를 보는 건 고문과 다름없다. 손흥민이 축구공을 던져 골을 넣는 걸 보는 느낌이다. 아니 아무리 골이 중요해도 발로 차서 넣어야지 손으로 던지면 돼?
검열관이 된 기분으로 유튜브를 보기 시작한다. 맞춤법은 뭐가 틀렸고, 자막 타이밍은 왜 저렇게 못 맞추는지, 편집은 왜 저렇게 한 거고, 비지엠은 왜 저런 걸 깔았는지. 그럴 때마다 환청이 들린다.
“왜? 재밌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그렇게 보다 보니 알고리즘이라는 녀석이 내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가기 시작한다. 알고리즘이 연이어 던지는 콘텐츠들을 보면서 나는 서서히 유튜브에 중독됐다. 자연스럽게 나는 ‘방송 안 보는 방송국 놈’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유튜브에 중독된 지 2년. 나는 유튜브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하고 있었다. 말줄임표에 점이 몇 개인가 이런 얘기 말고, 이것이 진짜 재밌는지 재미없는지에 대해서. 그게 내가 방송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마음이었다. 재밌는 걸 하자. 유튜브가 그때의 내 마음을 다시 깨우쳐준 거다.
재미의 의미를 다시 찾기 시작하고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니 재미를 찾던 즐거운 표정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습관처럼 출연자들과 인사를 하고, 연출을 하고, 도시락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오늘은 무슨 실수를 했고 편집으로 어떻게 수습할지를 고민하는 방송국 직원이 바로 나였다. 그나마 시청률이라도 잘 나와주면 이 지루한 일상의 보상이 되련만 시청자들은 점점 텔레비전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고민한다. 나는 과연 방송국 놈들로 생존할 수 있을까? 지난한 고민이 끝나면 습관적으로 유튜브를 켜고 또 깔깔 웃다가 마지막에는 나도 재밌는 거 하고 싶다는 씁쓸한 동경을 품고 잠드는 일상이 반복된다.
“어제 그거 봤어?”에서 ‘그거’를 만드는 게 모든 피디의 꿈이다. 하지만 점점 ‘그거’와 프로그램은 멀어져감을 느낀다. 오히려 요즘은 ‘그거’를 ‘콘텐츠’라 부른다. 하지만 난 여전히 ‘프로그램’을 만드는, 디테일에 집착하는 방송국 놈이라는 사실에 고민이 깊어진다. 재밌는 걸 만들고 싶다. 재밌게 일하고 싶다. 그런데 그게 여기는 아닌 것 같다. 이 세 문장이 팩트라면 결론은 하나다. 방송국을 떠나야 한다. 짧은 봄이 지나가고 긴 여름이 시작될 때쯤, 나는 작은 결심을 했다.
굿바이 방송국.. 아차차, 말줄임표는 점이 세 개랬지. 떠나는 마당에도 디테일이라는 망령이 나를 괴롭힌다. 굿바이 방송국…. 점을 하나 더 찍어 문장을 완성한다. 그런데 뭔가 쓸쓸하고 미련이 있어 보이는 문장이다. 백스페이스를 두 번 눌러 점 두 개를 지운다. 굿바이 방송국. 그래, 떠날 땐 마침 표지. 미련 없이, 후련하게,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아니다, 조금 더 힘이 있으면 좋겠다. 백스페이스를 한 번 더 누르고, 이번엔 시프트와 1을 함께 누른다. 굿바이 방송국! 그래 안녕이다. 나는 재밌는 거 하러 간다! 왜? 재밌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안제민(샌드박스 네트워크 디렉터)
마침표의 마침표
2019년 11월.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곧바로 여행을 떠났다. 삶의 전반기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으로 나눈 전반과 후반이었는데, 그 기준은 다름 아닌 ‘군대’였다. 막연하게 그랬다.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어쩌면 군대를 명분으로 대담하게 하고 싶은 걸 했던 거 같다. 안돼도 군대 가면 되니까.
2019년 12월. 마지막으로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훈련소에 입소했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 부딪혔지만 결국 적응했다. 사소함의 소중함을 배우고, 애인의 목소리에서 애틋함을 배웠다. 훈련소의 늦은 저녁, 전번초 불침번의 인수인계를 받고 몇 분 후 자정을 알리는 손목시계 알람이 울렸다. 그렇게 허무하게 2020년을 맞이했다.
전면 휴가 통제. 어느 날부턴가 KF94 마스크가 보급품으로 나왔다.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계획된 훈련마저 줄줄이 취소됐다. 치료제가 없는 질병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누구 할 거 없이 마스크를 착용했고 모든 집회와 모임이 금지됐다. 공연계에서는 그해 기획한 공연이 전부 취소돼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게 된 어떤 사람의 자살 소식이 들렸다. 바깥 상황이 잘 체감되지 않던 나에게도 충분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누구도 겪어 본 적 없는 세상. 여러 나라의 대책과 백신 연구 소식이 뉴스를 도배했고, 끝끝내 다른 일을 구하게 됐다는 음악 동료들의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사색할 시간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 하면 밖에 나가서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기약 없는 세상에서는 차라리 군대에 있는 게 나았다.
2021년 5월. 아무런 배웅도 받지 못한 채 전역했다. 당연해진 풍경이었기에 대수롭지는 않았다. 전역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말도 안 되는 기쁨이 솟았다. 얼마나 고대했던 순간인가! 삶의 후반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쯤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결국 마스크를 끼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설렘 때문인지 불안함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제대하자마자 작업을 시작했다. 군대 안에서 만든 많은 노래를 어서 빨리 정리해 훨훨 날게 하고 싶은 마음과, 2년의 공백 동안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회에서 신속하게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재촉했다. 방구석에서 무작정 노래를 만들었다.
커다랗고 길다란 마침표 뒤의 시작은 신중해야 했다. 이전의 발매작에서 느낀 아쉬움, 물음표의 양쪽 끝을 잡아당겨 이번에야말로 느낌표로 바꾸고 싶었으니까. 회사에 소속되기 전과 후의 음악이 달라졌다는 주변의 냉정한 피드백을 주의 깊게 듣는다. ‘달라졌다’는 미묘한 평가의 이유를 더듬고, 그 둘을 적절히 융합시키는 게 복귀의 숙제다. 쉽고 간단한 멜로디를 음악적으로는 전혀 쉬워 보이지 않게, 그리고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하기. 그동안 실제 악기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고 싶던 욕구도 마구 푼다. 떨리는 가슴으로 마스터링을 마치며 어떤 확신에 찬 마침표를 힘주어 찍는다.
거리 두기에 마침표를 찍는 시점에 복귀 준비를 마쳤다. 이 글이 인쇄될 즈음이면 나는 이미 새로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앨범을 벌써 손에 넣었을지도. ‘코시국’을 가까이 느끼진 않았지만 긴 공백 속 다시 사람을 마주하는 반가움은 여느 아티스트들에 뒤지지 않으리라. 비록 뜨거운 함성은 들리지 않겠지만, 마스크 속 사람들의 미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더 나은 세상을 간절히 꿈꾸는 마음은 마침표 뒤로도 이어진다. 구원찬(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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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처 에디터
- 전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