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여자가 다섯 글자를 말한다. “나 임신했어.” 웬일인지, 남자는 한 글자도 말하지 못 한다. 이제 뭐가 어떻게 되려는 걸까?
선배, 우리 용용이 리빙 화보에 언제 모델로 불러줄 거예요? 지금 한창 물올랐단 말이야.” 4년 전 결혼해 세 살배기 아들을 둔 여자 후배가 복도에서 팔장을 끼며 묻는다. “어디 사진 좀 보여줘 봐.” 휴대폰 속에서 머리를 빡빡 민 포메라니안 강아지가, 실은 남자애가 나왔다. “당장 찍자. 진짜 귀엽다. 얘가 지금 몇 살인 거니? 얘도 커서 너 속여 용돈 타다 여자친구 선물사주고 그러겠지?” “어우, 선배! 선배도 얼른 결혼해서 낳으세요.” “아빠 찾아가라고 해서 왔다며, 열 살쯤 된 애가 ‘아빠~’ 불렀으면 좋겠다.” 그녀가 팔짱을 뺀다. “선배, 나중에 정신 멀쩡할 때 화보 얘기 다시 해요.” “아들한테 자기가 어떻게 해서 생긴 건지는 알려줬니?” “선배!” 후배는 총총 엘리베이터로 사라졌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생명체라고?
“무슨 일 있어? 밥 잘 먹고 왜 그래. 어디 아프니?” 빌딩 앞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는 서른 세 살 김은 눈뜬 시체 같았다. 이래저래 안 지 7년이 넘은, 속 깊은 얘기도 털어놓는 회사 후배. “에휴…씨….” 욕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그는 억지로 웃었다. “저녁에 맥주 한잔 사주세요.” “그래라.” 누구한테 돈 떼였나?
사무실 자리로 돌아와 남은 점심시간을 틈타 애완견 동호회 분양 게시판을 뒤졌다. 친구들을 만나면 인터넷에서 모은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며 얘는 어떠니 쟤는 어떠니 묻는 중이었다. “강아지 토끼풀 뜯는 소리 하고 있네. 네 새끼를 낳아야지. 네가 지금 개 새끼나 거둘 때냐?” 저도 (노)총각인 주제에 핀잔은. 우리는 금세 동병상련의 포즈를 취했다. 친구는 영화 대사를 읊었다. “이러지 말자. 우리 인간되기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그래 괴물 안 되는 거 알겠는데, 이 강아지가 나랑 어울리냐고. 친구는 딴소릴 했다. “애부터 낳을까? 그러면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눈 딱 감고 착착착 차라리 뱃속 편하지 않을까?” 친구의 아들과 나의 강아지가 노는 장면을 상상했다.
퇴근 후 서른세 살 김을 만나 호프집에 갔다. “얼굴은 아까보다 좀 낫네. 누구한테 돈 떼였니? 나 백만원밖에 없어.” 김은 웃었다. “그게, 선배, 여자친구가 임신했대요.” 그는 휴대폰을 열고 문자 메시지를 보여줬다. 다섯 글자. ‘나 임신했어.’ 문자를 보낸 시간은 오늘 새벽 세 시. “그래. 그랬구나.” 꽉 막힌 기분이 들더니 모국어가 갑자기 스와힐리어로 바뀐 건지 말이 안 나왔다. 그는 다행히 한국말을 했다. “어떡하지. 이렇게 엮이고 싶지 않은데.” 그제야 말이 나왔다. “나쁘구나. 안 좋다. 답장했어? 통화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꺼놨더라고요. 혹시 혼자 병원 간 건 아닌지. 그럴 수 있는 애예요.” 둘은 사귄 지 1년 정도 된, 그러니까 이대로 결혼까지 갈 건지, 아니면 이쯤에서 돌아서야 할지 판단하려는 시기였다. “결혼 생각 없었어?” 말을 안 한다. “차라리 병원에 간 거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사람이 이럴 수가 있네요.” 듣자마자 이해했다. 그건 다만 솔직한 말이었다. 어쩌면 벌써 수술대에 누웠을지도 모르는 김의 여자친구와, 왁자지껄한 호프집에서 한숨을 쉬는 김은, 각각 여자와 남자인 걸까? 그럴지도. “일어나. 찾아가 만나. 이럴 일 아니야. 정신 차려. 어서.” 김은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겁나요.” 그렇겠지. 덩달아 겁이 났다. 그의 여자친구가 어떨는지 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 이렇게 남자이기도 한 걸까?
싱글가이와 임신에 대한 칼럼을 쓰기로 하고(바로 이 칼럼),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내용을 설명한 뒤 스케치를 받았다. 하필 강아지 사진을 보던 중이라서였을까? 만약 팝콘 같은 걸 먹고 있었다면 반 이상 둘러엎었을 것이다. 그 그림엔 남자의 뒤통수가 보이고 책상이 보이고 필기구가 보이고 컴퓨터가 보이고…. 상자가 보이고 상자 속 아기가 보였다. 내용에 앞서 그 자체로 섬뜩해서 곧장 수정을 요청했다. 그러면서도 그 이미지가 떠나지 않았다. 서른세 살 김이 여자로부터 문자를 받고 느꼈던 감정이 혹시 이랬을까? 어느 날 갑자기, 그러니까 마치 택배가 온 것처럼 아기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는 현실. 세상의 모든 아기가 축복 속에 천사로 태어나진 않겠지만, 하필 나를 ‘아빠’라고 부를 생명이 그런 식으로 오는 건…. 생각이 섣부르다 싶어, 너덜거리는 채 접었다.
깊은 밤, 여전히 애완견 동호회를 뒤적이다, 문득 열 살쯤 된 애가 사무실로 찾아와 ‘아빠’라고 부를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친구에게 전화했다. “너는 혹시 그럴 일 없니?” 친구는 하품하며 답했다. “야, <신기생뎐> 같은 거 좀 그만 봐. 그러다간 돌멩이도 출생의 비밀이 있겠다. 근데 너는 혹시 모르겠네. 어머님 아버님 다 점잖으신데 넌 꼭 그렇다고는….” 알겠네 친구. 부디 우리도 가을엔 결혼들 하세, 자네부터. 일단은 이렇게도 편한 결론. 이 밤은 김과 김의 여자친구에게 어떤 밤이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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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장우철
- 아트 디자이너
- 일러스트레이션/정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