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당신의 초심은 무엇인가요

2022.03.17김은희

언제고 다지는, 나의 N번째 첫 마음.

바지락, 사랑의 맛.

펜과 식칼
나는 시인이자,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노동자. 퇴근 후에는 부인과 그녀의 뱃속 아이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 그리고 제철 요리와 식사의 의미에 대한 글을 연재하는 에세이스트. 이런 여러 정체성의 소용돌이 어디쯤에 나는 있다. 가르치는 일로 월급을 받고 있지만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을 설명하진 못한다. 그렇다고 어떤 문서의 직업란에다 시인을 써본 적은 없다. 시를 써서 얻는 소득이 양자역학적으로 적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란 직업이 아니라 시를 쓰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라는, 어떤 시인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시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루에도 몇 개의 정체성과 초심을 떠다니며 부유 浮游한다. 내게 시는 고독 속에 있고, 가르침은 미지 未知 속에 있다. 그리고 요리는 사랑과 함께 있다.
나는 퇴근 후에 요리하는 일로, 출근과 퇴근 사이에 상실한 인류애를 회복한다. 요리는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것과 달리 매우 힘든 노동이지만 물, 불을 가리지 않고 지지고 볶는 시간 속에는 복잡다단했던 하루를 위로하는 정신적 회복 과정이 있다. 퇴근길에 자동차 기어를 P에서 D로 놓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Protein, Recipe, Nutrition, Dish…”라고 중얼거린다.
내가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이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입학하기로 결정이 났을 무렵, 어머니는 아들에게 서울에 올라가서도 네가 차려 먹을 요리를 가르쳐주겠노라 했고, 나는 그 제안을 넙죽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달가량을 주방에 기거하면서 스승으로부터 한식 요리에 사용되는 재료와 양념, 기본적인 조리법을 배워갔다. 집밥에 활용되는 양념은 그 재료와 배합이 대체로 비슷했고 모든 장류는 마당 장독대 안에서 숙성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은 없었다.
다만 나의 스승은 음식을 만들 때 계량 計量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나는 고3 시절에 쓰다 남은 노트의 뒷장에다 ‘요 정도’, ‘넉넉하이~’, ‘자박자박하게~’와 같은 스승의 언어를 능숙한 동시통역사처럼 ‘밥 숟가락으로 한 숟갈’, ‘엄지손톱 크기’, ‘두어 방울’ 정도로 번역하여 기록했다. 나는 주방이 좋았다. 바다의 생명이 있었고, 산과 들이 있었고, 과학 교과서에서나 보던 화학식과 ‘계문강목과속종’과 같은 생물 분류 체계도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맛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시절 스승은 내게 몇 가지 레시피를 ‘교육’한 것만이 아니라 내가 평생 구사할 언어를 사사 師事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Mother tongue이란 단어는 언어뿐 아니라 ‘맛’을 포함한 뜻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Tongue이 아닐까. 인간에게 있어 발음하는 기관과 맛을 보는 기관이 동일하다는 사실. 우리는 전 세대로부터 언어뿐만 아니라 미각도 물려받는다. Mother tongue은 주방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요리는 사랑을 완성시킨다. 사랑을 하려면, 상대방을 잘 먹여야 한다. ‘나는 너를 잘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는 인류의 오래된 방법이었으니까. 밀림에서 잡아온 아르마딜로와 긴팔원숭이를 부족의 마당에 철푸덕 내려놓던 원시시대 때부터, 그윽한 트러플 향기 사이로 와인 잔을 부딪치는 오늘날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까지.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맛있고 귀한 것을 먹이고자 온갖 노력을 다해왔다. 그 음식을 같이 나눠 먹음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사랑하는 상대와 같은 시간을 ‘산다’.
마님은 왜 돌쇠에게 쌀밥을 주었나와 같은 옛날 야사를 그저 싸구려 유머라고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어떤 음식은 우리의 사랑을 그 음식 이전의 사랑과 그 음식 이후의 사랑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요리를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누군가를 위해 재료를 고르고, 다듬고, 끓이고, 썰고, 음식을 접시에 덜어 담는 행위를 해본 적 없는 사람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담긴 사랑의 가치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니까. 마님이 돌쇠에게 쌀밥만 줬겠는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기도 줬을 테고 호박엿도 몰래 쥐여줬을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흘러간다. 나를 낳은 여자는 내게 요리를 가르쳤고, 나는 이제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낳을 인간을 위해서 요리한다. 나의 요리는 사랑과 함께 있다. 이제 이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시인이 직업이 아니라 시를 쓰는 상태이듯, 요리는 이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의무이거나 취미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시간과 상태의 다른 말이다.
특히 바지락, 섭, 대합, 굴, 새우, 멍게와 같은 패류나 갑각류를 요리할 때면 어떤 사랑을 떠올린다. 물렁한 살이 단단한 뼈를 둘러싼 우리와 달리, 그들의 몸은 단단한 껍데기가 부드러운 속살을 둘러싸고 있다. 가려진 속살에는 수수께끼가 있다. 예감이 있고 호기심이 있다. 이들의 사랑은 어쩌면 딱딱한 껍데기 속, 서로의 속살을 상상하는 일이 아닐까. 인간이 서로 가장 부드러운 살을 부비듯, 이들은 두껍고 딱딱한 껍데기를 열고 속살을 꺼내어 서로에게 닿도록 사랑했을까. 이런 상상은 곧 입을 가득 채우는 갑각류 내장의 감칠맛으로 이어진다. 나의 주방에서 상상은 맛이 되고, 맛은 다시 따뜻한 상상이 된다.
따뜻한 주방은 차가운 도시에 맞서는 인간의 불이 피어나는 곳. 횃불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가 주방의 불까지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어디서 함께 나눌 온기를 건져낼 것인가. 나는 그 주방의 불 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를 본다. 본업만큼, 아니 때로는 본업보다 더 애쓰는 취미가 있다는 것.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문장이 있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강연호) 이범근, 시인 · 시인의 식탁(@wrieating) 운영자

워크맨의 데모 테이프 곡 ‘Brand New’.

Brand New
솔, 펑크와 처음 사랑에 빠진 때는 언제였던가. 정확히는 1974년에서 1984년에 이르는 재즈 펑크 르네상스 시기의 음악들. 이 시기의 음악들에 매료된 계기는 유년기의 금제 때문이다. 마빈 게이나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를 떠올리는 대부분의 펑크 팬들과는 달리, 인생 최초의 펑크가 무엇이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아라카와 밴드 The Arakawa Band의 ‘Brand New’라고 답한다. 생소할 수도 있는 이 일본 밴드의 곡을 꼽은 이유는 나의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포장지 외에는 버리는 법이 없는 분이다. 게다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에 나올 법한 맥시멀리스트적인 인테리어 감각을 갖추셨기 때문에 ‘시크 앤 모던’을 추구하는 식구들과는 자주 마찰을 빚어왔다. 식구들은 아버지의 괴상한 취향을 서재에 봉인해두었는데, 반대로 아버지가 식구들로부터 봉인해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버지가 청년 시절에 어학 공부를 하겠노라고 거금을 들여 구입한 소니 워크맨이다.
‘Brand New’는 그 워크맨의 데모 테이프에 수록돼 있던 곡이다. 1979년 7월 1일 소니는 세계 최초로 출시한 소형 카세트테이프 레코더&플레이어 워크맨에 테스트용 카세트테이프를 함께 제공했고, 그 A면에는 ‘Brand New’ 한 곡이, B면은 녹음용으로 비워져 있었다. 서재 서랍에 은색 비닐 커버를 뒤집어쓴 워크맨과 이 데모 테이프를 아직도 간직하실 정도로 애착이 강하신 아버지는 CD 플레이어가 출현할 때까지 금지옥엽 자식 손에도 워크맨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월급 받아 처음 큰돈 들여 산 물건이라서 애착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워크맨은 그때까지 우리 집에서 말 그대로 ‘언터처블’한 존재였다. 그러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 아버지가 집을 비우는 날이면 몰래 꺼내서 음악을 들어보곤 했는데, 이 곡을 그때 처음 들었다. 1970년대 말, 일본과 구미 각국에서 유행하던 보편적인 재즈 펑크 스타일로 가사도 없고 생경한 음악이었는데 어떻게 마음에 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말 그대로 뭣도 모르고 좋아했다.
비록 어릴 적에 아버지 몰래 꺼내 듣다 녹음 버튼을 잘못 눌러 곡의 일부를 지워 먹었으나, 지금에 와서 들어봐도 단선적인 구성이 조금 아쉽기는 하나 연주의 세련미는 여전하다. 곡목이 ‘최신’임을 알리는 ‘Brand New’이고 그 외의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규 음반에 수록하기 위한 것이 아닌, 소니의 의뢰로 만든 프로젝트성 녹음 같다. 데모 테이프에 수록한 곡이 대중적인 팝이 아니고 재즈 펑크라니, 지금에 와서도 놀라운 일이다. 세계 최초로 이동식 재생기기를 발매한 소니의 기술력과 함께, 일본 대중음악의 수준이 이 정도 된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과시하기 위한, 시쳇말로 당시 ‘잘나가던’ 일본이 보여주는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카세트테이프의 시대가 가고 CD와 MP3의 시대가 오면서 이 곡을 애써 찾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새 프로그램인 <심야괴담회>를 기획하고 제작하면서,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이 곡을 가끔 인터넷에서 찾아 들었다. 유년기의 금제를 깨고 솟아오르는 브라스와 퍼커션 사운드에 온 정신을 맡겼던 기억과, 시사 교양에서는 예능 시스템이 절대 안착할 수 없다는 또 다른 금제를 지금 내 손으로 깨뜨리고 있다는 희열이 닮아 있었나 보다. 게다가 ‘정말 새로운 Brand New’ 일을 벌이고 있다는 자부심이 은연중에 이 곡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인생을 규정할 만한 취향을 만들어준 최초의 기억이, 내 이름을 건 첫 프로그램의 등장을 알리는 또 다른 진군나팔이 되어주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원환인가!
누군가 자신은 음악 듣기를 포기한 것 같다며 “어떤 대상을 꾸준히 좋아할 수 있는 능력도 엄청난 재능”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나는 아직도 음악을 들을 때면 가슴이 뛴다. 오래되고 해묵은 것과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먼지 쌓인 구석에서 새로운 것이 샘솟고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이, 잘된 솔이나 펑크 곡을 ‘Gem’이라 부르듯 수십 수백 곡의 원석을 깎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의 보석으로 귓전에 정련해서 들리는 값진 노동이, 그래서 음악 듣기를 좋아한다는 단순한 취향을 온몸에 아로새겨진 역사로 만드는 작업이 내 약동의 원천이 된다. 내게 재능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얼마 전 헬카페의 권 사장님과 음반을 나눠 들으면서 원하는 판을 구하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에 맞장구를 쳤다. 중년으로 향하는 사내가 여전히 첫사랑의 달뜬 열정을 구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음악이라는 생명수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가 요구하는 바는 많아지고, 그만큼 나는 낙엽처럼 지쳐간다. 하지만 이런 취향 안에서라면 나는 소년처럼 영원히 푸르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임채원, MBC PD · <심야괴담회> 연출

쓴다는 행위.

기꺼이 거듭되는 일
처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아홉 살 무렵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글씨를 또박또박 잘 쓴다”고 칭찬했던 것(글씨를 또박또박 쓰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대체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과 엄마가 읽다 거실 소파에 올려둔 한국 소설들이 그 시절을 기억하다 보면 튀어나오곤 하는데, 기억의 정점에는 나름 그럴듯하게 꾸민 이야기를 꾹꾹 눌러 쓴 공책을 엄마에게 내민 순간이 있다. 엄마가 글을 읽는 침묵의 시간이 내게는 마치 단어들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첫 경험이라는 게 보통 그렇듯 이야기는 엉망이었을 것이다. 그저 그런 경험을 해보았다는 것 자체가 어린 나를 글의 세계에 기꺼이 매혹되게 했다.
진로를 향한 사투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글로는 생활이 가능한 정도의 돈을 벌 수 없다는 잔인한 선입견은 문예창작학과에 가겠다던 나의 비범한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나는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며 대학에서 독일어교육과 경영학을 전공하다가 내친김에 독일로 가서 경영학과에 입학을 해버렸다. 대학에서는 틈만 나면 국문과에서 제공하는 소설론이나 시 강독, 창작론을 들으며 위안 삼았고, 독일에 가서는 ‘작가에게는 경험이 중요하다’며 주말마다 유럽 곳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노트북을 끼고 다니며 글감을 모으고 글을 썼다. 소설도 쓰고 에세이도 쓰고 책도 구성했다. 모두 쓰다 말았거나 쓰다 버려지거나 다 쓰고도 세상에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러니 돌아보면 모두 쓸모없는 짓이었다. 다만 그 쓸모없는 짓이 반복되어도 괜찮았으므로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다.
그즈음 나는 현실에 발목이 끌려 미래를 불안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불안감에 전공 공부도 소홀히 하지는 않아서 어느새 독일과 유럽의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고, 그런 것들을 할 줄 알면 돈을 주는 연구소에 취직도 했다. 그리고 내 힘으로 생활비를 벌 수 있게 되자, 이제 본격적으로 그 생각이 튀어나왔다. 글을 쓰며 살고 싶다.
오직 그 생각에 매달려 정말로 뭘 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 그럴듯한 단편 소설 하나를 완성했다. 문우들의 평가는 냉혹하기 짝이 없었고, 나는 좌절감에 원고를 쓴 종이를 북북 찢어버렸다. 시간이 갈수록 의심만 커졌다. 진짜 내가 글을 쓰는 재능이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의심, 이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야 말 거라는 의심. 그래도 칼을 뽑았는데, 한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전장에서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계속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사실 그것 말고 이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쓰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저녁에 쓰고, 휴가 내고 글을 썼다. 자투리 시간도 모아 알뜰히 활용했다. 해외 출장이 잦아지고 이동이 늘어나자 시간 개념도 없어졌다. 한국에서 밤이 유럽에서는 한낮이니까, 어디 있든 쓰는 시간은 낮이고 자는 시간은 밤이라고 생각하면서 썼다. 공항에서, 비행기 안에서, 기차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틈만 나면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회사에서 일과 사람들에 부대끼고 돌아오면 회사를 때려치우는 상상을 하면서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쓰다가 망치면 ‘글 따위 안 쓰며 살아도 된다’고 다독이며 회사에 가서 열심히 일했다. 어떤 날엔 소설을 포기하고, 어떤 날엔 일을 포기하고. 그런 날들이 한참이나 계속됐다.
글을 쓴다고 고백하면 사람들은 물었다. 블로그 같은 거 취미로 쓰는 거냐고. 그런 이야기를 듣는 날은 이상한 빛깔의 용기가 생겼다. 같이 쓰는 친구들에게 혹평을 듣고 오면 악에 받쳐 쓰고, 칭찬을 듣고 오면 칭찬받지 못한 곳을 붙잡고 시간을 보냈다. 불현듯 ‘왜 쓰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면 ‘안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쓴다’며 스스로 달랬다. 쓰는 습관이 몸에 배자 그때부터는 여기서 포기하면 진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 밀어붙이듯 썼다. 그만둘까하는 생각도 수없이 나를 스쳐 지났다.
막상 신춘문예에 응모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소설을 쓰게 되자, 겁이 났다. 낙선할까 싶어 겁이 났고, 당선되더라도 실력이 모자랄 것 같아 겁이 났다. 그래도 투고를 멈추지는 않았다. 언젠가 내게도 기회가 올 거라는 말을 믿어야 했다. 습작 원고가 서른 편 가까이 완성되고 응모 경력이 5년 정도 쌓였으며 이제 떨어지면 진짜 그만두자고 생각했을 겨울에, 당선 전화를 받았다. 사는 내내 꿈꾸고 포기하기를 거듭했던 글 쓰는 삶이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고백하건대 글 쓰며 사는 삶은 내게 아직 이상에 가깝다. 아침에 가볍게 운동을 하고, 오전에 소설을 쓰고, 오후에는 다른 글을 쓰며 생활을 영위하는 그런 삶의 형태는 아마 내 생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등단을 하던 즈음에 그랬던 것처럼,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올지 모를 그런 생활을 꿈꾼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거듭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그런 생활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는 것쯤 여러 번 해봤으니 문제없다고, 다짐을 대신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늘도 쓴다. 최유안, 소설가

첫 앨범 <WINTER ALWAYS COMES AFTER AUTUMN>.

Spring Always Comes After Winter
“안녕하세요. 뮤지션 뮤츄얼 MUTUAL입니다. 작곡과 피아노 연주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나의 N번째 자아를 소개하자면 이 문장이 명료하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네 살 때 피아노를 처음 갖게 되었는데 그때 굉장히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가볍게 취미 정도로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악보를 보는 게 따분했다. 그때부터 악보를 꼼꼼히 보지 않고 제멋대로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아마 작곡의 시작이지 않을까 한다.
멜로디가 떠오르면 가방에 늘 넣어 다니던 수첩에 메모했다. 그때의 귀여운 음표와 선율의 낙서들을 나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 초-중-고 시절에는 카세트테이프, 미니 디스크, MP3 플레이어 등에 작곡한 곡을 녹음해서 학교에 가져가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감상평을 듣는 게 즐거웠는데, 점심시간에 종종 강당의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새로 만든 곡들을 들려주면 좋아해주던 친구들이 나의 응원가였다. 이렇게 유난히 음악을 좋아하던 학생이었으나 꿈은 의외로 과학자였다. 당시에는 줄기세포를 연구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했고, 현재는 재활의학과 전문의로 대학병원에서 진료와 연구를 하고 있다.
대학 시절에도 음악은 이어졌다. 음악 동아리에서 매년 공연에 참여하고 연출을 맡기도 해서 작곡한 곡을 그때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한번은 동기가 내가 만든 노래를 불러주었다. 묘했다.
지금 생각하면 꽤 한가했던 것 같은 대학 시절에는 오히려 곡을 많이 쓰지 못했다. 그때는 의과대학 공부량을 따라가기 바빠서 스스로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막상 가장 정신없이 바쁘던 인턴-전공의 시절에 오히려 더 많은 곡을 만들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그것이 내가 음악을 창작의 영역에서 계속 품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인턴 때 일주일간 여름휴가를 받은 나는 한 달 치 월급을 몽땅 인출해 낙원상가로 갔다. 한참을 둘러보다 마음에 드는 키보드를 구입하고 적당한 앰프를 사고, 맥북을 구입해 그때부터는 디지털 음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앨범을 만들고 싶다’ 생각하게 된 것은 전공의 시절에 크리에이터 음원 사이트에 업로드한 2백여 개의 곡이 꽤 좋은 반응을 얻어서다. 전공의의 삶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고, 결국 전문의가 된 이듬해인 2014년에야 피아노 연주곡 7곡으로 구성한 앨범을 발매했다. <Winter always comes after Autumn>.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겨울은 언제나 가을 후에 오니까.
겨울을 기대하며 가을부터 시작되는 설레는 마음을 담은 첫 앨범이 계기가 되어 이후 몇 차례 작은 공연을 하기도 하고, 작은 프로젝트들에 배경음악 제작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기대보다 많은 분이 응원해주셔서 큰 격려가 되었다. 어쩌면 강당의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친구들의 소소한 웃음과 박수를 받으며 작은 연주회를 열던 나의 세상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곡은 꾸준히 하고 있다. 간혹 만든 곡들의 조각을 SNS를 통해 간단히 소개하기도 하나 아끼는 곡들은 후속 앨범을 위해 간직하고 있다. 2집 앨범 준비는 조금씩 하고 있지만, 병원에서의 업무량이 많다는 핑계로 속도를 빠르게 내지는 못하고 있다. 1집 앨범보다 좀 더 연속성 있는 스토리로, 1번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장면 장면으로 이어져서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음반을 준비 중이다. 실제로 영화음악에도 관심이 많아서 언젠가는 영화음악 작업을 해보고 싶다. 피아노 연주곡뿐 아니라 작곡 프로그램들을 이용해서 오케스트레이션 작업도 하는데, 점점 더 스트링이 주는 파워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된다면 좋은 뮤지션들과 함께 어쿠스틱 악기들로 앙상블 연주를 하고 싶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다 보니 3월이면 신입생들이 입학하고, 그에 맞춰 신입 전공의들이 입국한다. 나는 더 이상 학생도 전공의도 아니지만, 여전히 3월은 새 학기의 시작으로 마음을 다잡게 된다. 물론 의사로서의 직무에 충실하겠지만, 사실 내 입장에서는 작곡을 훨씬 더 먼저 시작했기에 어느 것을 본업, 어느 것을 취미라고 해야 할지 약간의 괴리감이 있다. 물론 월급은 병원에서 나오지만. 올해는 그동안 여러 가지 업무로 조금씩 미뤄뒀던 음악 작업에 좀 더 속도를 붙여볼까 한다. 그리하여 겨울을 뒤로하고 다시 봄을 맞는 3월에 N번째 자아로서 다시 한번 인사를 남긴다. “앞으로의 작은 걸음들을 응원해주시면 큰 격려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진영, 뮤지션 뮤츄얼 MUTUAL ·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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