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캔버스와 다를 바 없는 표지는 책의 얼굴이 될 자격이 있을까? 책의 표지가 광고판이 되기 전에 알고 싶은 저간의 책 표지의 사정을 북 디자이너 여섯 명에게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책 표지의 기능은 무엇인가? 책 표지와 내지디자인은 독립된 영역이라고 보나?
내가 생각하는 책 표지의 일차 기능은 책을 보호하는 것이다. 두껍고 단단한 표지가 없다면 책은 훨씬 더 빨리 손상될 것이다. 그 다음 기능은 책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다. 지은이나 제목 등등이 그런 기본 정보에 해당한다. 책의 내용 일부나 맥락을 간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제목이나 지은이 이름만으로는 전할 수 없는 정보를 전할수도 있다. 나아가 책이 품는 가치나 표방하는 태도를 은연중에 전달하는 기능도 생각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덜 중요하나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기능이 바로 잠재적 독자를 유혹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기능을 무시할수 없는 현실마저 무시해야 한다면, 디자이너로서 보람이 그만큼 적을 것이다. 책 표지와 내지를 독립적으로 디자인할 수는 없다. 최소한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가 ‘표리부동’이라는 말에서 얼마간 윤리적 문제를 느낀다면, 같은 잣대를 표지와 내지 관계에도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표지디자인 기능을 무엇보다 잠재적 독자 유혹에 둘 때, 이 원칙은 쉽사리 무너진다. 서점 매대에서 표지는 책을 광고하는 포스터 노릇을 하지만, 일단 내 손에 들어온 책은 그 자체로 책이지 그로부터 독립된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는 습관처럼 ‘사용자 중심 디자인’을 운운한다. 책 디자인으로 옮겼을 때, 그것은 책 사용자를 소비자가 아닌 독자로 상상하는 데 출발점을 둔다. 최성민(슬기와 민)
상업적인 한계를 지니는 출판 디자인의 영역에서 ‘그림’이 그 한계를 만족시키는 방편이 된다면, 그것을 따르는 게 디자이너의 생산성일까?
디자이너에게 생산적이진 않다. 출판사에 생산적일 거다. 그림이 그 책을 표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보니 표지에 그림이 많이 사용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림 역시 형식적인 디자인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좀 더 치밀하게 계획해서 책을 위해 제작한 그림이면 좀 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미지 제공업체에서 사서 쓰는 죽은 그림이다. 하지만 알고 있어도 시간과 비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요즘 디자이너는 하루 종일 앉아서 이미지만 찾는다. 어떻게 보면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찾는 사람 같단 생각이 든다. 일러스트가 많이 쓰이는 건 여성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다. 이미지로만 표현하려다 보니 과잉되고 유치한 면이 많아졌다. 출판사가 책에 대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접근한다. 유행에 맞춰 가는 측면은 이해할 수 있는데, 유행을 만족하기 위한 상업성보다 한발 더 나아간 상업성 같다. 디자이너가 뭘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든다. 디자이너가 몰가치화 되니까 책이 다 비슷비슷해진다. 오필민(오필민 디자인)
단행본 표지에 압도적으로 ‘그림’이 많은 경향, 그것이 만연한 출판 시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북 디자인이 중요시 된 지 몇 년 안 됐다. 하지만 지금 북디자인의 중요성은 마케팅 측면에서 파악되고 있다. 출판시장의 헤게모니가 편집자와 디자이너에서 마케팅으로 갔다. 마케터들은 지난 십 년에 걸쳐 약진한 온라인 서점에 주목한다. 온라인에서 파는 책은 편집의 전체적인 조화와 촉감, 느낌, 즉 아우라로 구매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래서 표지 이미지의 위상이 남다르다. 마케터는 표지가 손톱만 한 크기로 나와도 책 제목이 잘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향과 맞아떨어지는 게 캘리그래피와 일러스트의 조합이다. 캘리그래피를 아주 난해하게 쓰지 않는 한 이미 나와 있는 활자보다 눈에 더 잘 띈다. 예전에도 표지 일러스트는 존재했지만 디자이너가 콘셉트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책들의 경우, 일러스트가 들어가야 한다는 전제하에 디자인하는 상황이다. 디자이너는 창의력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인데, 시장에선 창의력이 아니라 교통정리를 원한다. 이승욱(지노 디자인)
시리즈물이나 전문 서적은 그림이나 사진에 대한 의존도가 낮고, 유독 소설 부분에서는 의존도가 높다. 왜일까?
전문 서적이 ‘정보’를 전달한다면 소설이 담고 있는 것은 서사, 즉 ‘이야기’다. 소설 표지에 사진과 그림이 빈번히사용되는 까닭은 인생사 회로애락이 녹아든 한 편의 ‘이야기’를 단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주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좋은 그림이나 사진은 잘 쓴 소설만큼 다층적이며 깊이 있는 서사를 한 화면 안에 담고 있다. 반면, 전문 서적은 지식의 정확한 전달이 목적이므로 서사성을 띠는 그림이나 사진과 맞지 않다. 시리즈물의 경우, 시리즈라는 통일된 형식미를 강조하는 디자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사진과 그림을 쓰지 않아도 된다. 이를테면,시집 시리즈(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민음의 시 등)가 그렇다. 요즘은 시리즈물, 특히 소설류에서 사진이나 그림을 적극적으로 쓴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등) 기타 장르에서도 이런 현상이 눈에 띈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심리학 책에서도 ‘심리’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초현실주의 그림들을 자주 사용한다. 사실, 전문 서적이라고 해도 제목을 연구서 형식으로 딱딱하게가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림과 사진을 표지로 쓸 수 있다. 같은 내용이 담겼더라도 ‘철학자들의 만찬’과 ‘현대철학의 계보’란 제목을 택했을 때의 결정이 사뭇 다를 것이다. 정은경(문학과 지성사)
일부 디자인을 다루는 책들의 과도한 디자인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인상을 준다.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예컨대 스테판 자그마이스터의 [Things I have learnedin my life so far]를 보고 ‘과하다’라고 느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일것이다. 스티븐 헬러의 [Looking Closer4] 표지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과도한 디자인’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요컨대 디자인을 다루는 책들의 표지는 지나치게 자의식적이며 방어적이고 동시에 자기과시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디자이너들은 다른 누구보다 ‘책 만들기’의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방심한 전문가들은 종종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은 대체로 익숙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낯선 타이포그래피, 낯선 사진 처리 방식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세 번째 이유는 디자인 책들이 대부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한 것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네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디자인을 다루는 책에 관심을 갖고, 여기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오로지 디자이너들 뿐이라는 사실이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김형진(워크룸)
타이포그래피를 중심으로 한 디자인은 그림을 채택하는 표지에 대한 온전한 대안일 수 있을까?
대안은 한 가지일 수 없다. 디자이너들이 책 저마다의 성격을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 표지에 타이포그래피를 썼다면 책 내용을 하나의 대표적인 그림이나 사진으로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겠다는 판단이 있을 수 있고, 책 성격자체가 잔잔해서 그렇게 갈 수도 있다. [한국의 자연유산]은 대표적인 이미지 하나를 꼽기엔 너무 많은 내용이 담겨서 글씨 자체만으로 보여주려고 한 경우다. [예술가와 디자이너]란 책은 양쪽이 공존하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 타이포그래피를 선택했다. 타이포그래피를 쓰는 이유가 있을 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진이나 그림을 사용해 표현하는 게 일반적이다. 타이포그래피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래픽적인 요소들이 빠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꼭 전문 지식이 없더라도 이제 물이 거의다 차고 있다는 건 대중들도 잘 알고 있을 거다. 조급할 것 없다. 박상일(수류산방.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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