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보면, 이러고들 있다.
처음엔 몸매였나? “몸매가 착하시네요” 같은 말이 퍼졌다. 그 다음은 가격이었던가? “이렇게 착한 가격!” 어떤 세일 문구는 이랬다. “더 착한 세일!” 순서를 따질 것도 없이 우후죽순 착한 뭔가가 대거 등장했다. 착한 식당, 착한 커피, 착한 소비, 착한 경쟁, 착한 이사, 착한 기업, 착한 광고…. 처음엔 ‘좋다’는 뜻을 재치 있게 말하는 정도였는데 점점 덩치와 의미를 부풀리더니만 나중엔 ‘면죄부’라는 뉘앙스까지 뒤집어 썼다. 마침 적절한 ‘신상’ 하나가 눈에 띈다. <경향신문> 기자의 녹취 파일을 동의 없이 공개한 JTBC <뉴스룸>을 향해 누군가 쓴 댓글이다. “잘못은 잘못인데, 언론으로서의 역할에 몰두 하다가 생긴 해프닝이니, 일종의 착한 잘못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착한 잘못이라니, 이쯤에서 현숙의 노래를 개사해 불러볼까? “착한 잘못, 나쁜 잘못 따로 있나?”
그런데 이 ‘착하고, 더 착하고 또 착한’ 흐름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착하다는 말은 “너 참 착하구나” 하듯이 다른 사람에게 하거나 듣는 말일 텐데, 이제는 “나는 착해요” 자기가 자기를 어필하는 표현으로 쓴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소개 같은 거랄까? “저는 착합니다. 고로 온순합니다. 저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데모 같은 거 안 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저는 착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쓴 착하다는 왕관은 일종의 안전장치로도 기능한다. 실수해도, 틀려도, 잘못해도, 누가 뭐랄 수 있나? 본인이 착해서 그랬다는데. 그러니 미워하지 마세요, 밟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자르지 마세요, 뽑아주세요. ‘착하다’는 화법은 점점 대상에 밀착한다. 어떤 대상인가? 당연히 권력자와 지배자, 별의별 ‘갑’을 향한다. 저보다 못한, 저보다 낮은, 저보다 어리석은 이에게 착하다는 어필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일련의 ‘착한’ 것들은 모두 복종의 언어로 기능 하는 게 아닐까?
더구나 자신이 ‘착하다’는 신드롬은 그 바탕이 꽤나 취약하다. 착해서 착하다고 어필하는 게 아니라, 결국 착한 척 연기를 하기 때문이다. 연기인 줄도 모르고 연기하는 ‘몰입’의 경지에 다다른 착함도 있다. 제아무리 ‘배드 걸’ 이미지로 설치듯 무대를 돌아다니면 뭐 하나? 무대를 내려오는 즉시, 본모습은 그게 아니라며 애교를 부리는 ‘굿 걸’이어야 하는 것을. 시뻘건 고딕체 볼드로 쓴 말은 불편하고, 같은 말을 파스텔 손글씨로 쓰면 착한 게 되는 식이니 어느 새 팩트가 오염되는 것도 부지기수다. 맞춤법이 틀려도 손글씨로 쓰면 괜찮아진다. 착하니까.
2014년 4월 16일로부터 시간이 흘러 2015년 4월 16일이 되었다. 여기저기 노란 리본이 넘실거렸다. 그중엔 수채화로 그린 리본 밑에 이런 문구를 적은 것도 있었다. “예쁜 아이들이 천국으로 소풍간 날.” 글쎄, 착한 등급으로 치면 가히 1등급일지 몰라도, 팩트로는 서정적인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웬걸, 댓글엔 눈물 모양 이모티콘, 기도하는 이모티콘이 줄줄이 걸린다. 착하고 착한 것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넘실대고 있다.
- 에디터
- 장우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