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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왜 비트라(Vitra)같은 가구가 없을까

2022.06.10전희란

‘디자인 가구’란 말이 넘쳐나는 한국에서 이렇다 할 디자인 가구가 탄생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리빙, 라이프스타일 분야에서 과연 세계적인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을까?

2006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비트라의 유명한 컬렉션 <100 마스터피스> 전시회가 열렸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의자 100개를 선정해 오리지널 제품을 전시한 것이다. 당시 월간 <디자인> 편집장이었던 필자는 이 전시 개최에 무척 고무되어, 드디어 한국에서도 가구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전시회의 흥행 성적은 매우 저조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대중에게 가구는 그저 집 안의 살림 도구일 뿐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제품, 또는 사치품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대개 모던 가구보다는 고전 가구를 선호했다. 서민들은 브랜드보다는 이른바 ‘사제’ 가구점을 찾아 혼수를 장만했다. 디자인 가구에 대한 열망이 없다는 것이 이 분야의 발전을 막는 근본적인 이유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의류나 자동차에 대한 욕망은 성숙한 반면, 가구에 대해서는 욕망이 아니라 마치 욕구를 해결하듯 대충 구색을 갖추는 데 만족했다.

왜 그럴까? 첫 번째는 가구가 자랑하기 힘든 소유물이라는 점이다. 임스 의자를 샀다고 옷처럼 걸치고 나갈 수도 없고, 자동차에 싣고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랑할 수 없는 품목에 큰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법칙이 있다. 게다가 그때는 SNS도 발달하지 않았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한국 사람은 유럽과 북미 지역 사람들보다 부동산인 집에 너무 많은 비용을 들인다는 점이다. 집을 구매한 뒤 은행에 갚아야 하는 대출금, 전월세 비용이 ‘상대적으로’ 크다. 가구 문화가 발달한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평생 임대주택 같은 제도가 있어 집이 없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집을 장만하거나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적다. 이에 따라 지출의 많은 부분을 가구와 조명, 커튼과 태피스트리 같은 직물 제품이 차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북유럽 사람들은 가구는 물론 창문과 벽지를 화사하게 장식하는 걸 좋아해서 다른 나라에 비해 그 분야의 브랜드와 디자인이 발전했다. 게다가 그들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보다 훨씬 높다. 인테리어가 발전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반면 한국인들은 대출 이자, 전월세금, 잦은 이사에 따른 비용 등 집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 즉 부동산 투자가 집을 꾸미는 데 드는 비용을 압도한다. 그나마 부동산이 아닌 재산 가운데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상은 체면을 유지하고 과시할 수 있는 의류와 자동차다. 한국인에게 명품 브랜드는 으레 패션과 자동차, 시계, 구두 따위의 상품군과 연결된다.


가구를 비롯한 인테리어 디자인이 발전하려면 집 안에서 벌어지는 행사가 빈번하고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어야 한다. 유럽에서는 일찍이 살롱 문화가 발전했다. 이러한 행사가 공공장소가 아닌 집 안에서 이루어진다. 파티도 이와 비슷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집주인은 손님들에게 자신의 높은 교양과 안목을 과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교양과 안목은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형태로 구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바로 화려한 인테리어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서양의 대저택에는 반드시 ‘갤러리’ 공간이 있다. 우리로 치면 복도다. 복도는 특정한 방에서 특정한 방으로 이동하는 통로이므로 외부 손님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대개 거울과 같은, 당시로서는 값비싼 물건과 화려한 액자가 달린 그림과 조각품, 최고의 재료와 기술로 만든 가구로 장식한다. 그러한 살롱 문화, 파티 문화 속에서 극도로 정교한 바로크와 로코코, 신고전주의 양식이 탄생했고, 그런 문화를 주도한 프랑스는 17세기 중반 이후 19세기까지 유럽 인테리어 디자인을 주도할 수 있었다.
물론 오늘날 일반 가정에서 그렇게 호사스러운 파티를 빈번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집으로 손님을 초대해 만찬과 작은 파티를 즐기는 문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반면 한국은 파티가 대개 외부에서 벌어진다. 과거에는 한국에도 서양의 파티에 해당하는 잔치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잔치는 대부분 마당에서 천막을 치고 이루어졌다. 심지어 왕실 잔치조차 궁의 마당에서 펼쳐졌다. 한옥은 서양의 맨션(대저택)과 달리 아주 작은 칸을 단위로 방이 만들어지는데, 99칸을 소유한 대감의 집이라 하더라도 가장 큰 방이 서양의 홀과 같은 커다란 연회장과 견주면 초라할 정도로 작다. 이러한 문화가 현대에도 이어져 손님을 초대해서 여는 큰 잔치는 집 안이 아니라 호텔이나 웨딩홀의 연회장에서 한다. 유럽의 실내 문화를 어설프게 흉내 낸 호텔이나 웨딩홀의 연회장을 방문한 대중은 그것을 고급 인테리어 문화라고 착각한다. 따라서 집 꾸미기에 소홀할 수밖에 없고, 큰돈을 들여 꾸민다 해도 독창성 없는 고전 가구들을 선호하게 된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이 한국 가구와 라이프스타일 디자인의 고유성을 저해한다.


2010년대 들어 조금씩 변화의 현상이 나타났다. 2012년 대림미술관에서 개최한 덴마크 가구 디자이너 핀 율 전시회가 20만 명 넘는 관객을 들이면서 전환점이 되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SNS로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특히 미술관 관람과 같은 특별한 문화 활동이 주목받으며 가구와 조명,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요즘은 젊은 세대들에게 유명 리빙 디자이너의 이름이 낯설지 않게 된 거 같다. 이처럼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이 문화의 한 축으로 감상되는 것이야말로 디자인 발전의 원동력이다.
과시욕도 한몫한다. 과거에는 과시욕이 유한 계급의 전유물이었다. 특히 다른 사람이 소유하지 못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컬렉션에 대한 충동과 욕망은 창조적인 디자인을 낳는 동기가 된다. 이런 디자인은 대기업에서 생산하기 힘들다. 세계적인 가구 브랜드인 카시나, 카르텔, 카펠리니, 마지스 등은 대형 유통점이자 가구 생산 업체인 이케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를 유지한다. 이케아는 ‘디자인의 민주화’를 위해 대중의 입맛에 부합하는 안정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데 반해, 소규모 가구 회사들은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승부하려고 한다. 한국도 한샘(최근 롯데가 인수), 현대 리바트, 신세계 까시미아처럼 대기업이 중소 가구 회사를 인수한 것이 고유 디자인 시대를 여는 데 어떤 장단점이 될지 진단해봐야 한다.


21세기 들어 하지훈, 이광호, 박원민, 노일훈, 권중모 등 해외에서 인정받는 라이프스타일 분야의 디자이너가 다수 등장했다. 아쉬운 건 이들의 제품이 상품이라기보다 작품으로 취급되며 대중이 접근하기 어려운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실용적인 제품이지만, 유통되는 곳이 갤러리라면 그것으로 한국 디자인 문화의 수준을 판단하기는 힘들다.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디자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문화 저변을 이끌어갈 수 없다. 이 점이 앞으로 한국의 가구와 라이프스타일 디자인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대중과 디자이너의 수준은 분명히 높아졌다. 심지어 비트라와 프린츠 한센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의 가구를 살 수 있는 소비력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한국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생산한 제품을 시장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마지스, 아르테미데 같은 회사는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협업을 시작하면, 그의 독창성을 수용하면서도 대중이 받아들일 만한 디자인과 가격의 접점을 찾고자 엄청나게 노력한다. 마지스가 재스퍼 모리슨과 협업해 생산한 공기 의자, 아르테미데가 미켈레 데 루키와 협업해 생산한 톨로메오는 그런 조율의 결과로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히 미켈레 데 루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도저히 대량 생산할 수 없을 것 같은 가구를 디자인하던 작가에 가까웠다. 하지만 일단 기업과 협업하자 타협하며 독창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냈다. 여기에 기업이 가진 생산 기술과 유통의 힘, 홍보에 힘입어 수십 년 동안 스테디셀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건축 분야에서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를 받지 못하는 한국 건축의 현실을 한탄한다. 한 국가의 건축 디자인 수준이 부실한 것은 건축가보다는 건축주, 그리고 건축 사용자의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가구와 라이프스타일 디자인의 발전 역시 시장, 즉 대중의 안목이 결정한다. 그런데 최근 희망이 보인다. 그것은 대중의 관심이 패션을 넘어 실내 문화로 도약하고 있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글 / 김신(디자인 칼럼니스트)

피처 에디터
전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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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라, 대림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