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만 고집할 순 없어도, 존재감은 주연 못지않은 배우들.
류승룡
류승룡은 이미 캐릭터가 그려지는 얼굴이다. 굵고 진한 눈썹에 다부진 코와 볼, 거기에 남성미가 짙게 풍기는 표정과 음성은 흔히‘ 성격파’나 ‘개성파’라는 수식어를 위해 누군가 매뉴얼대로 제조한 얼굴 같다. 선과 악을 넘어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그 어떤 어설픈 농담과 거짓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한 남자의 향기다‘.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을 영화화한 <아이들…>에서 자신의 가설대로 범인을 지목하는 황우혁 교수, 한번 포착한 표적은 끝까지 놓치지 않는 <최종병기 활>의 청나라 정예부대 리더 쥬신타는 그야말로 적역이다. <평양성>에서 연개소문이 큰아들남생(윤제문)이 아니라 꼼꼼하고 타협을 모르는 작은아들 남건(류승룡)에게 지휘권을 넘겨준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었다. 류승룡은 이른바‘ 장진 사단’이 장영남과 더불어 신하균, 정재영에 이어 배출한 가장 탁월한 연기자일 것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를 시작으로 <거룩한 계보> 등 줄곧 장진의 남자로 살던 시절, 그는 축적된 무대 경험이나 연기 역량과는 무관하게 그 미래를 쉽게 내다보기 힘든 배우였다. 장진의 품을 벗어나 일종의‘ 독립’을 한 뒤, 2007년 같은 해 출연한, 모두 다른 감독들의 작품인 <천년학>, <황진이>, <열한 번째 엄마>에서 어딘가 정형화된 역할들, 굳이 말하자면 그의 거칠고 센 외모에 최적화된 역할들만 맡았다. 하지만, 빤한 거친 남자 계보를 이을 것만 같았던 류승룡이 새로운 역할로 돌파하게 된 계기는 드라마였다.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의 사려 깊고 강직한 강승조 경무관을 연기하면서 그가 지닌 유별난 개성들을 오직‘ 정의로움’으로 세련되게 수렴한 캐릭터로 만들었다. 여러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질서정연하게 조율하는 그 솜씨는 전편을 책임지는 주연배우의 그것이었다. 이후 <된장>에서 된장 맛의 비밀을 밝히려는 방송국 PD, <베스트셀러>에서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아내를 보호하는 남편 등 조연의 자리에 있더라도 이제 그로부터 정형화된 거칠고 어두운 면만 발견하는 일은 드물어졌다. 특히 드라마 <개인의 취향>에서 미술관 관장으로 나와 폭풍 애교를 마다하지 않는 게이 연기는 다른 인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가히 독보적이었다. 말하자면 그가 걸어온 길은 결국‘ 연기 잘하는’ 사람이‘ 진리’라는 단순한 법칙의 재발견이다‘. 남자’로 시작해 결국‘ 배우’라는 종착역에 다다른‘ 한국의 클라이브 오웬’이라고나 할까. 내리깐 눈과 그보다 더 내리깐 음성의 선 굵은 개성으로 주목받던 이 배우는 이제 당당한 주연의 카리스마를 꿈꾸고 있다. 주성철(<씨네21>기자)
조진웅
“무-사 무휼!”을 외치던 호위무사에 반해 조진웅의 필모그래피를 뒤지기 시작한, 갓 그의 팬이 된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그 역할도 조진웅이었어?” 부산이 고향인 덩치 큰 배우는 원한다면 사투리와 육중한 이미지를 팔아 좀 더 빨리 이름을 알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선량한 눈동자 사이의 사나운 미간. 불평이 많고 늘 익살을 부릴 것 같은 얇은 입술. 턱을 들어 밀어 올리면 금세 자부심에 찬 표정이 되는 얼굴도 꽤 매력적이다. 십 년을 훌쩍 넘긴 경력임에도 대중이 조진웅의 이름 석 자와 얼굴을 쉽게 연결시키지 못했던 이유가 뭘까? 조진웅은 20편이 넘는 영화와 9편의 드라마를 거치는 동안 몸무게를 줄였다 늘이기를 반복하고 표준말과 사투리를 오가며 배역에 따라 연기의 패턴을 달리한다.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고 단번에 꿰어지지 않는 팔색조. 이런 말은 대개 자신을 지우고 극기를 감행하는 주연 배우들에게 동원되는 수사들이다. 바꿔 말하면 극단적인 변신은 조역을 주로 맡는 배우가 대중에게 얼굴과 목소리를 각인시키는 데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도 조진웅은 극사실에 가까운 연기를 지향하며 관습적인 캐릭터를 거부하는 배우인가 하면, 아둔한 청년이나 욕심 많은 악당 등 양식화된 연기를 구현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다. 그는 여러 가지 춤의 스텝과 매너를 능숙하게 익힌 춤꾼, 어느 자리에 초대받아도 썩 잘 어울리는 손님 같다. 하지만 능숙한 연기자 모두에게 주역이 주어지지 않듯, 조역에서 한 단계 올라서는 데는‘ 팬’이 필요하다. 노회한 시청자와 관객을 상대로 의외의 답을 내놓거나, 보여준 것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하는 배우들. 그들이 거느린 팬의 존재는 정형적인 미남 미녀가 아닌 배우들도 주역이나 준 주역급에 올려놓는다.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조진웅은 최동원의 그늘에 가려 있는 울분으로 늘 시비를 일삼던 김용철 역으로 등장한다. 영화 막판 일장연설이 영화가 김용철이란 캐릭터에게 요구한 역할이라면, 영화 중반부 은사의 유언을 전해 들으며 얼이 빠진 채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김용철의 표정은 기대 이상을 해내는 배우의 역량을 가늠케 한다. 실은 이 맛에 연기를 하고, 팬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조진웅은 개봉을 앞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김판호 역을 맡아 최민식, 하정우 등과 나란히 섰다. 이번 영화는 그가 안정적으로 주역급 배역을 따낼 수 있는 배우인가에 대한 검증의 기회다. 그리고 이름난 연기 귀신들 사이를 오가며 뭘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크다. 고백하자면, 그의 영화들을 다시 보다 결국 팬이 되어버렸다. 유선주(TV비평가)
마동석
최동원, 선동렬이 주인공인 줄 알았던 <퍼펙트게임>. 보고 나니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해태 타이거스의 만년 후보 포수 박만수다. 9회에 대타로 등장한 박만수는 극적인 동점 홈런을 날린다. 아내는 야구 그만하라고 타박하고 아이는 왜 경기에 안나오냐고 묻는 상황, 박만수는 그동안의 설움을 스윙 한 번에 날린다. 이 극적인 가상 인물을 연기한 이는 마동석. 요즘 들어 스크린에 부쩍 자주 얼굴을 보이는 배우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만 따져도 <퀵>, <통증>을 거쳐, 2012년 설을 노리고 같은 날 개봉한 영화 <네버엔딩 스토리>와 <댄싱퀸>에 동시에 얼굴을 비췄고, 2월에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 등장한다. 마동석은 이런저런 영화에 동시에 나오는‘ 잘나가는’ 조연의 반열에 본격적으로 오른 셈이다. 그의 험상궂은 얼굴과 커다란 체구는 고교 시절 이민 갔던 미국 생활의 흔적이다. 헬스클럽에 발을 디딘 60킬로그램짜리 고교생은‘ 질 수 없다’는 경쟁심에 120킬로그램까지 몸을 불렸다. 트레이너 자격증을 따고, 이종격투기 트레이너까지 했다. UFC 초대 챔피언 마크 콜먼이 그의 마사지를 받았다. 그러다가 배우 해보겠다며 하던 운동을 다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끈기 하나로 무명 시절을 버텨냈다. 체력 좋아 보이는 그는 밤샘 촬영도 너끈히 버텨낼 것 같지만, 무리한 운동과 부상 경력에 오히려 몸이 성치 않은 편이다‘. 형사 아니면 조폭’ 같은 외모 덕을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비스티 보이즈>, <부당거래>는 마동석의 이미지를‘ 정직’하게 이용한 영화들이다. 많은 악역 배우들이 그러했듯, 마동석의 얼굴과 몸은 그에게 벗지 못할 굴레가 될까. <심야의 FM>은 좋은 반전의 계기였다. 그가 가녀리고 단정한 수애에게 접근했을 때, 대부분의 관객은 양을 잡아먹으려는 늑대를 연상했을 것이다. 감독은 그 연상을 역이용해 관객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다. 물론 마동석은 기회를 살렸다. 마동석 역시 이미지의 전복에 재미를 붙인 듯하다. 최근 맡은 역할은 모두 남자다움과 거리가 멀다. <퍼펙트 게임>에선 아내와 아이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기가 죽어 있었고, <댄싱퀸>에선 초반 동성애자 역할로 웃음을 선사한다. 물론 <범죄와의 전쟁>은 마동석에게 익숙한 역할일 것이다. 그렇게 마동석은 외모가 주는 느낌을 곧이곧대로 혹은 반대로 이용하고 있다. 물론‘ 불러주는 대로’ 출연하는 조연 배우가 자신의 이미지를‘ 이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자. 지금 마동석을 둘러싼 이미지와 역할의 길항은 배우 본인과 제작진, 그리고 대중이 함께 즐기는 놀이다. 백승찬(<경향신문>기자)
윤제문
<뿌리 깊은 나무>의 초반, 궁의 은밀한 곳을 드나드는 백정 가리온은 늘 궁금증을 유발하는 캐릭터였다. 이를테면 천박함과 명민함을 한꺼번에 표출하는 말투와 행동은 살과 칼을 만지는 백정이라는 캐릭터와 맞물려 묘한 긴장을 자아냈다. 그는 굴욕적이지만 꾀 많은 여우 같았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얼굴을 꼿꼿이 들고 정체를 밝히던 그 반전의 순간, 윤제문의 얼굴에도 짜릿한 쾌감이 흘렀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부터, 그가 비밀의 주변이 아닌 비밀 그 자체가 되는 순간부터다. 가리온이 밀본의 정기준으로 커밍아웃하여 이도의 라이벌에 위치하게 되면서, 배우 윤제문의 생기는 분열하는 한석규의 활기를 따라잡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윤제문이 매혹적일 때는 그가 어떤 대응관계의 한 축이 아니라, 과잉이나 결핍된 캐릭터로 그 축 밖에 던져질 때였던 것 같다. 마초들의 폭력적인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들의 형상에 윤제문은 제법 잘 어울리지만, 노골적으로 연민을 자극하는 남자 캐릭터들과 그의 인물들은 좀 달랐다. <비열한 거리>나 <우아한 세계> 등 그가 폭력배로 나온 영화들을 돌이켜보면, 이상하게도 그의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잔인하지만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는 외로워 보이던 사내의 모습만 떠오른다. 이건 어느 정도 그의 얼굴에 기인한 인상이기도 한데,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종종 살기를 띤 눈빛과 아주 작은 입이 불러일으키는 부조화를 생각하곤 한다. 번뜩이는 매의 눈빛과 꼭 다문 토끼의 입술이라고 할까. 그 눈과 입이 고집스러움으로 상통할 때, 그는 차갑고 과묵하고 세속적인 남자가 되고, 그 둘이 따로따로 놀 때, 그는 어눌하고 귀여운 남자가 된다. 요컨대 <차우>에서 엘리트 포수 백만배를 잘 생각해보라. 말총머리 하나 붙이고서 겉으로는 진지하고 무서워 보이지만, 실은 가볍고 수줍고 맹한 이 남자의 속내를‘ 실수처럼’ 내보였다. <어깨너머의 연인>에서 보여준 모습은 또 어떤가. 순정적이면서도 영악하며, 능청스러우면서도 연약한 남자의 사정이 여기 있다. 어떤 배우들은 매번 원래의 자기와는 다른 인물로 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배우들은 매번 자기 안에 감추어진 여러 면을 수줍게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윤제문은 후자의 경우다. 언제나 그 의중을 다 드러내지 않는 남자. 그래서 남몰래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것 같은 남자. 배우 윤제문에게 어울리는 캐릭터는 그런 남자들이며, 이 남자들이 골몰하는‘ 딴 생각’의 의외성이 궁금해질 때, 우리는 그의 연기에 빠져든다. 남다정(영화평론가)
- 아트 디자이너
- 일러스트/이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