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가 지나가자 거리가 멈췄다.
Day 1 니스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깊어진 밤하늘은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멀리서는 오렌지 빛 가로등이 촘촘하게 빛났다. 그 옆으로 우뚝하게 솟은 커다란 국기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걸로 봐선, 그럼 저기가 니스 해변일 것이다. 공항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니스의 바다는 밤에도 빛이 난다.
Day 2 다음 날, 호텔 앞으로 롤스로이스 팬텀 한 대와 컬리넌 한 대가 도착했다. 롤스로이스가 마련한 ‘팬텀 시리즈 ll 글로벌 시승 행사’에 가기 위한 의전 차량이었다.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할 Hal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모나코까지는 40분 정도 걸릴 겁니다. 가는 동안 롤스로이스의 편안함을 경험해보세요.”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특유의 외국식(?) 유머도 곁들인다. “아마 잠이 들지도 몰라요.” 세상에. 나는 잠을 자는 대신 할과의 대화를 선택했다. 유머 코드는 맞지 않았지만, 호텔 앞에서 할이 내비친 자신감에는 분명 아직 보여주거나, 말해주지 않은 이슈들이 한가득 준비돼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게 뭐든 물어봐 줘야지.
‘맘씨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의 할은 롤스로이스에서 오랜 시간을 지낸 브랜드 전문가다. 하나를 물으면 두 개, 세 개를 척척 대답했고, 일과 관계없는 대화에서도(이를테면 그의 나라 싱가포르에 대한 이야기) 그 끝은 신기하게도 항상 롤스로이스로 마무리됐다. 어쨌든 이런 전문가에게 브랜드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건 기회고 행운이니까, 모나코에 다다를 때쯤 나는 할이 들려준 롤스로이스에 관한 이야기들에 대해 고마움을 꾸벅 전했다. 할은 부끄러워하며 손사레를 쳤다. 롤스로이스에 대한 진짜 생생한 이야기는 내일, 보스에게 직접 듣게 될 거라면서. 그리고 할은 잊지도 않고 여기에도 유머 한 스푼을 더했지 아마. “듣다가 잠이 들지도 모르지만요!”
Day 3 롤스로이스가 ‘팬텀 시리즈 ll 글로벌 시승 행사’의 기점으로 마련한 장소는 메이븐 리베이라 호텔이었다. 프랑스 코트다쥐르의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 Roquebrune Cap Martin 지역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데, 덕분에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동쪽으로는 모나코와 몬테카를로가 바로 내려다 보이는 귀한 지리적 이점을 자랑한다. 1박에 1백만원이 훌쩍 넘는 숙박료를 지불해야 하는 이 최고급 호텔을 행사 기점으로 삼은 롤스로이스의 의도를 단순히 ‘롤스로이스니까’로 치부한다면 글쎄, 그건 롤스로이스를 ‘비싼 차’로만 이해하는 오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롤스로이스모터카의 CEO인 토스텐 뮐러 오트보쉬가 이곳, 메이븐 리베이라 호텔로 글로벌 기자들을 모은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 “프랑스 남부는 롤스로이스와 인연이 깊습니다. 특히 몬테카를로가 그렇고요. 이곳 프랑스 남부와 모나코에는 롤스로이스를 타는 오너들이 실제로 많이 살고 있거나, 여행을 옵니다. 이것이 메이븐 리베이라 호텔로 여러분을 모신 이유입니다. 팬텀 고객들이 휴양을 목적으로 주로 찾는 이곳에서,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직접 경험해보시길 원합니다. 롤스로이스는 단순히 차가 아니기 때문이죠. 롤스로이스를 타고, 보며, 느끼는 모든 것이 더해져야 진짜 롤스로이스를 타본 거니까요.”
실제로 그랬다.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광장을 빙 돌아 나올 때, 한국보다는 분명 넓었던 주차장에 간신히 팬텀을 후진으로 집어넣을 때, 니스 시내를 쇼핑하듯 여유롭게 돌아볼 때, 그들이 예약해준 식당에 들르기 위해 해변 가까이에 주차했을 때 등등. 팬텀과 함께한 모든 순간마다 거리의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토스텐 뮐러 회장에게 이날의 경험들을 꺼내놓자 웃으며 말한다. “맞아요. 롤스로이스가 지나가면 거리가 멈춘다는 말이 있죠.” 문득 이런 ‘움직이는 예술품’을 거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롤스로이스의 전시는 모터쇼에서도 보기 어려웠다. 반짝이는 가치는 공유될수록 더 넓게 빛날 수 있지 않은가. 더 많은 사람이 롤스로이스를 경험할 수 있다면 브랜드 입장에서도 나은 것이 아닌지, 다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럴 계획은 없습니다. 조금 전 거리에서 경험한 그런 반응에서 롤스로이스에 대한 호감과 각인이 더 효과적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임팩트입니다. 쉽게 볼 수 있는 브랜드로 롤스로이스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진 않아요. 지금처럼 귀한 오브제로서 빛나길 바랍니다.” 그랬다. 대부분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것들은 드물어서 귀한 경우가 많았다. 우문이었음을 깨닫고 멋쩍게 웃자 토스텐 뮐러 회장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최정상의 자리에 두 가지 포지션은 있을 수 없죠. 하이앤드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물론 그만큼 보기 어렵고요.”
Last Night 모나코 해변을 배경으로 전시된 팬텀에 대해 매튜 댄턴 수석 디자이너가 설명을 이어간 시간은 저녁 식사 직전이었다. 매튜는 최근까지 롤스로이스가 지켜야 하는 것과 변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했노라고, 팬텀의 디자인을 두고 진행한 한 시간 남짓의 PT를 마친 후에야 고백하듯 말했다. 지켜야 하는 것은 응당 브랜드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그릴과 각진 실루엣일 텐데, 그렇다면 수석 디자이너의 깜깜한 고민은 분명 ‘변화’에서 시작됐을 거라고 나는 예단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대체로 맞았다. “롤스로이스의 디자인은 진화하고 있습니다. 비스포크 오너들의 주문은 늘 창의적이고요. 딜레마지만, 동시에 보존되길 원하는 지점도 분명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죠. 저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바꾸고 디자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튜가 이야기한 ‘어려운 일’은 ‘균형을 찾아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절대적 기준이 모호해진 시대에, 나름의 기준을 이야기하면 자칫 꼰대가 되어버리는 요즘, ‘균형’이란 걸 찾을 수 있긴 한 걸까. 다행스럽게도 매튜는 해답을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건, 매튜가 찾은 답보다 힌트를 얻은 과정이다. 그는 지혜롭게도 1백 년 전 시간 속에서 해답을 건져 올렸다.
“롤스로이스의 창립자인 헨리 로이스 경 Sir Henry Royce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먼저 최고의 것을 가진 후에 개선한다.’ 최근 제가 찾은 해법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로 디테일이죠. 롤스로이스가 지켜온 전통과 상징은 건들지 않고, 디테일한 변화에 집중하는 겁니다. 제가 생각한 팬텀의 키워드는 존재감입니다. 그 존재감을 지켜내는 일이 제 역할이죠. 디테일한 변화를 통해 기존의 존재감을 더 두드러지게 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롤스로이스의 디테일에 주목하고, 매 세대마다 달라진 디테일을 발견해주신다면, 디자이너로서 커다란 영광일 겁니다.” 매튜는 말하는 동안 가끔씩 시계를 확인하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는데, 그건 거듭 이야기해오던 디테일을 적용한 자신의 디자인을 직접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해가 빨리 져야 하는데 아쉽네요. 여기 헤드라이트 주변을 보시면 은은한 별빛이 보일 겁니다. 팬텀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트에 별을 새겨 넣었죠. 3D 레이저를 활용해 한쪽에만 5백80여 개의 별을 수놓았어요. 또 여기 도장면을 자세히 보면 작은 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빛을 반사시키면 은은하게 빛나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런 별들은 실내에서도 만날 수 있죠. 밤이 되면 루프에는 별을 형상화한 라이트가 켜집니다. 가끔 혜성도 떨어지죠.”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보여주는 매튜의 설명을 따라가다 차 뒤로 보이는 모나코의 바다를 보니, 며칠 전 니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니스의 바다는 밤에도 빛이 났는데···.’ 이날 저녁, 나는 팬텀에 뜬 별들을 보듬으며 같은 생각을 또 했고, 팬텀 위로 빛나는 무수한 별도 그렇게 빛날 거라 상상하며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