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함께 취하는 순간.
그날은 하필 햇살이 예뻤다. 술꾼에게 취할 핑계 따위는 사치라서 달지 않아도 될 핑계를 그날은 괜히 붙였다. 하여튼 그런 날. 여름날보다 화사한 오스트리아 내추럴 와인 생산자 와비사비가 만든 내추럴 와인, 그중에서도 츠바이겔트 품종으로 만든 로제 스파클링 와인을 오픈했다. 장미 꽃잎 차를 살짝 우려낸 와인에서 향긋한 여운이 몽글몽글. 그 곁에 야생 꽃과 허브 향이 잔뜩 피어나는 오렌지 와인, 플로라 2021을 함께 두었다. 두 와인으로부터 잔잔하게 부는 바람이 금세 코끝에 꽃밭을 일군다. 당장 베어 물고 싶은 잘 익은 복숭아와 마트리카리아를 테이블 위에 놓고, 푸릇푸릇한 카네이션을 코랄 빛 베이스에 꽂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름은 왜, 늘, 지난 뒤에야 그리워지는 건지. 백설 멜론을 마주하고 문득 지난여름을 돌이키고 싶었다. 그런 김에 찬장에서 푸릇푸릇한 진 3종을 꺼내왔다. 넘버 3, 블룸 런던 드라이 진, 그리고 헨드릭스 넵튜니아 진. 해조류와 시트러스 향이 풍기는 넵튜니아 진은 해안을 따라 걸을 때 파도가 전해준 시적인 선율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진이라 했던가. 찬장 속에서 가장 투명하고 얇은 잔을 꺼내고, 정성껏 얼린 영롱한 얼음을 몇 알 골라 잔에 채운다. 루모라 고사리 잎으로 장식한 테이블 위에 잔을 턱 놓고, 잔 속에 바다를 가두는 기분으로 정성껏 따라 마시는 날. 기껏 찾아온 가을에 여름을 마시는 날.
시작은 베르무트였다. 공복에 친자노 로쏘를 한잔 털어 넣었더니, 마침내 시동이 걸렸다. 기억의 오크통에 담겨 숙성된 추억들이 폴폴 피어올랐다. 노르망디에서 마신 칼바도스의 맛과 향, 여전히 잊지 못한 그날을 꺼내보려고 리저브 데 세뇨르 X.O.를 호기롭게 오픈했다. 시드르를 구리 증류기에서 이중 증류하고, 20년 이상 오크통에서 숙성한 귀한 녀석. 가죽, 모과, 말린 자두의 아로마 레이어드가 겹쳐진 추억을 착 펼친다. 겪어보지 않은 시절이 그리울 때는 미드를 소환한다. 덴마크 린든 꿀, 메도우스위트로 만들어 잔잔한 탄산이 번지는세미 드라이 미드. 그리고 8개월간 버번 배럴에서 숙성한 체리 미드. 인류 최초의 술 미드가 없었다면 찬란하게 취한 그간의 시간들도 없었겠지? 미세하게 터지는 꿀술의 버블을 음미하다가 아찔한 기분에 사과를 베어 물었다.
분홍은 멋이 없는걸. 심드렁하다가도 꽉 차게 익은 자연의 분홍을 마주하면 기어이 무너진다. 뭐야, 예쁘잖아. 자연에서 온 복숭아와 사과의 만남, 댄싱사이더 컴퍼니의 복숭아 사이더 치키피치는 분홍빛 무드에 딱 어울린다. 감미로운 복숭아가 샹송을 부르면, 교토 다카라 양조장에서 온 야마나시 백도는 엔카로 화답한다. 오크통에 숙성한 소주와 블렌딩한 백도 특유의 깊고 짙은 아로마, 과실. 복숭아만 마시다가는 금세 질릴까 봐 시마네현 출신 이즈모 샤인머스캣을 담은 소주, 실패 없는 조합 배와 꿀이 만난 배 사이더도 준비해두었다. 바람에 실려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풋풋하게 싱그러운 향이 나는 마루시아 장미, 아이보리 장미도 함께 두었고.
그날은 어쩐 일인지 꽃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한참 둘러보다 그냥 나오기 머쓱해서 한 송이 골랐는데, 이름이 엘레강시아 앤슈리엄이란다. 돌아와서 화병 대신 유리컵에 꽂아두고, 홀로 꼿꼿한 이 꽃을 한참 바라보다 어울릴 만한 술을 하나씩 불러왔다. 그린올스 와일드베리 진, 말피, 봄베이 브램블, 몽키 47. 모아두고 보니, 당장 떠나고 싶은 곳으로부터 온 친구들이다.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의 감성을 닮은 말피는 피에몬테 지역의 광천수를 블렌딩하고 주니퍼 베리, 아말피 레몬, 시칠리아 오렌지 등의 재료를 품었다. 블랙베리와 라즈베리를 인퓨징한 브램블은 힘찬 에너지가 느껴지며, 꽃과 약초의 짙은 향과 크렌베리 맛을 지닌 몽키 47은 단연 우아하다. 역시 꽃을 사길 잘했다.
계획이 없는 날이었다. 라운지 체어에 반쯤 누워 책이나 읽을 작정이었는데, 그날따라 예뻐 보여서 초록색 배를 샀다. 뭔가 곁들여볼까? 가고시마산 코마사 양조에서 미니 밀감을 잔뜩 넣어 만든 크래프트 진을 열었다. 쌀 소주에 주니퍼베리, 보태니컬 재료, 그리고 비장의 밀감. 얼음 몇 알 넣어 홀짝홀짝 마시니 오후의 독서에 딱 맞는 취기가 내게 왔다. 햇살이 가라앉기 시작하니, 어김없이 좀 더 독한 술이 당겼다. 노르망디 칼바도스 지역에서 온 노르민디아 진으로 갈아타 볼까? 생강, 코리안더, 클로브 등 15종의 식물과 과일이 담긴 이 이국의 진에서는 훌륭한 산도와 세련미가 풍긴다. 아주 살짝 스파이시하면서 꽃 향으로 마무리된다.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마치 그곳에 정원이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