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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서 "어떤 역할을 맡으면 저는 완전히 괴짜가 돼요"

2022.09.30전희란

최희서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된다.

블랙 재킷, 스커트, 슈즈, 모두 돌체&가바나. 실버 이어링, 리얼리즘 × 아몬즈.

GQ 제가 ‘기적’이란 말을 참 좋아하는데요.
HS (빙긋)
GQ 멀리 있다고 생각할 때는 덤덤했던 이 말이 왜 좋아졌는지 더듬어보았는데, 모든 것이 기적같이 느껴진 어떤 순간이 있었던 것 같아요. 희서 씨의 에세이집 <기적일지도 몰라>가 제 마음을 툭 건드린 포인트이기도 하고요.
HS ‘기적일지도 몰라’는 책 속 한 파트의 소제목이기도 해요. <박열>을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의 이야기예요. 이 영화를 일본에 가져가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니, 하면서 번뜩 기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어요. 로또처럼 엄청난 기적이 아니라 제가 겪는 생활 반경 안에 있는 무척 좋은 일. 이것이 제게는 기적이에요.
GQ 바로 그 포인트. 일상에 빈번한 기적들요. ‘쓰고 싶다’는 마음은 어디서 와요?
HS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많이 썼는데, 제게 어떤 해소 방식이었던 거 같아요. 그게 좋은 명상 효과가 있고, 제가 기록의 습관이 든 사람이란 건 후에 알았어요.
GQ 그때는 주로 뭘 썼어요?
HS 다양했어요. 운동회 연습, 엄마랑 영화 보러 간 일, 동생이랑 싸운 얘기···. 마라톤 대회 나가서 넘어진 이야기도 썼고요.
GQ <아워바디> 이전에 이미 뛰는 사람이었군요.
HS 그러네요.(미소) 어릴 때 단거리 마라톤에 나갔는데 출발선 지나자마자 넘어진 거예요. 무릎에서 막 피가 나는데, 그래도 뛰었어요. 그때 제 자신을 기억하고 싶어서 글을 썼어요. 나 거의 꼴찌였지만 그래도 뛰었다.

블랙 재킷, 돌체&가바나. 실버 이어링, 리얼리즘 X 아몬즈.

GQ 제법 쓴다는 건 언제 알았어요?
HS 중학교 1학년 때 백일장에서 별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장원을 했어요. 국어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너 이거 어디서 배웠어?”, “뭘요?”, “그러니까 너 일본에서 왔다며, 그런데 왜 이렇게 잘 써?”, “저는 일본에서 계속 한글로 일기를 썼는데요.” 아, 그런데 갑자기 자랑하니까 되게 민망한데.
GQ 듣고 싶어요. 그러니까 뭐가 좀 달랐다고 하시던가요?
HS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논리 정연하게는 잘 못 써요. 제 글에는 묘사가 많죠.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 일기를 보면 운동회 연습을 하는데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구름이 호두과자처럼 흘러간다”, 이렇게 써놨더라고요.
GQ 책을 보면서 비슷하게 느꼈어요. 분명 에세이인데, 왜 소설을 읽는 느낌이지?
HS 시각적으로 기억한 걸 그대로 더듬어보면서 쓰다 보니 묘사가 많아지고, 그래서 비주얼한 글이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글을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그럴 깜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요.
GQ 어떤 단정을 짓거나, 자기 삶이 되게 정답인 것처럼 얘기하는 이야기들요.
HS 그래서 자기계발서도 싫어해요. 배우로서의 화두이기도 한데, 작품 할 때도 정답이 정해진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메시지가 너무 강한 시나리오에는 별로 끌리지 않더라고요. 사람 사는 군상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좋아요.
GQ 그렇다면 <박열>은···.
HS 아, <박열>은 메시지가 너무 명확했는데.(웃음) 그래도 가네코 후미코라는 사람의 죽기 전 3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니 예외로 둘게요. 제가 글이나 영화로 강요하는 걸 좋아하지 않다 보니, 저의 글 또한 해답을 찾거나 누군가에게 그걸 말하고자 하는 글보다는 그때 겪은 것들을 기록하는 느낌으로 써요. 아마도 그래서 소설 같은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GQ 강요하는 글을 쓰고 싶지 않은 건, 강요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에요?
HS 그게 근본적인 이유인 것 같아요. 좋은 영화는 영화관을 나와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게 모든 예술에 꽤 해당되는 것 같아요. 미술관을 나와서 이 색깔은 무엇이었을까 질문을 던지는 그림, 시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렇고요.

그레이 니트 톱, 프라다. 실버 체인 네크리스, 코스.

GQ 시각적인 글을 쓰는 최희서가 영화 <반디>를 만든 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느껴지네요.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말하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든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지’ 같은 걸 느꼈거든요.
HS 생각해보니 어떤 관객도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은 없어요. 맞아요. 제가 갖고 있던 처음의 발상 지점은 ‘어떻게 발화를 할 것인가’였어요. 그러니까 어떤 말을 써야 죽음이나 탄생, 사랑에 대해 소통할 수 있을까···. 소통을 어려워하는 말 더듬는 아이가 주인공이라면 정확히 무언가를 정의 내리지 않아도 표현되는 게 분명히 있지 않을까? 아이는 엄마가 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미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죠. 소영(엄마)도 말로 설명해줘야 하는데, 하고 생각은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스케치북에 쓰기 시작해요. 그것이 제게는 중요한 포인트였어요. 말로 하지 못하겠으니 글로 써봐야지, 라고 소영이 마음먹은 시점부터 영화는 완전히 전복되어 몽타주가 되거든요.
GQ 어떤 말을 하는 데 ‘말’이라는 수단이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네요.
HS 그렇죠. 저는 대사가 많지 않아도 훌륭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글에서 제가 반성하는 건, 문장이 너무 길어요. 출판사에서 “글 손이 크시네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좀 더 여백을 남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고, 연기도 그래요.
GQ 직접 쓰고, 연기하고, 연출한 경험을 지닌 감독으로서 배우 최희서가 새롭게 보이기도 하던가요?
HS 최희서는 정확한 감정에 다다르고자 노력하는 배우더라고요. 조금 덜 노력해도 될 것 같은데, 하는 지점도 있었고.(웃음) 저를 타자화하니까 너무 이상하네요.
GQ 덜 노력해도 될 것 같다?
HS 어떤 컷들은 너무 모든 걸 다 보여주더라고요. 표정이든 대사든, 모든 걸 다 보여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여서 ‘조금 더 편하게 있어도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디>는 맨 마지막에 소영과 딸이 갈매기살 구워 먹으면서 영화가 끝나거든요. 원 테이크로 찍었는데 마지막 대사들은 전부 애드리브였어요. 소이랑 즉흥으로 이야기한 거였죠. 대단한 소이! 그래서 그 장면이 제일 좋더라고요.

블랙 시퀀 베스트, 생 로랑 by 육스.

GQ 즉흥을 즐길 줄 아시는군요. 화보 찍을 때도 느꼈어요.
HS 좋아해요. 제가 요즘 현대 무용을 배우고 있거든요. 아버지가 “그거 나무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 같은 춤 아니야?”라고 하시더라고요. 정확한 표현이죠. 축이 있고,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춤. 다양한 현대 무용이 있겠지만 제가 배우는 건 좀 더 움직임에 따라 팔다리를 쓰는, ‘언밸런스’를 이용하는 춤에 가까워요. 그것이 제가 지향하는 배우나 작가의 모습과도 비슷해요. 어디로 움직일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일단 나라는 사람은 버티고 있고,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겨볼 수 있는.
GQ 안 그래도 촬영 컷 보면서 저희가 그랬어요. 댄서 같다!
HS 그래요? 아직 멀었는데.
GQ 춤이 연기에도 어떤 영향을 미쳐요?
HS 분명 좋은 영향이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 멀리를 봐야 한다.” 저에겐 이것이 올봄의 명언이에요. 다리를 움직일 때 꼭 다리를 보지 않아도 발이 보일 수 있고, 나의 시야가 저어 멀리까지 볼 수 있는 것처럼 시야에 들지 않아도 내 몸을 볼 수 있다는 말이에요. 몸을 움직일 때 그 움직임에만 집중하지 않아도 감각의 시선으로 발이나 팔을 쓸 수 있다는 거죠.
GQ ‘본다’는 의미의 확장이네요.
HS 연기할 때도 항상 생각해요. 계획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혹시 모르니 계획은 해두지만 그 너머의 것을 할 수 있다고 항상 생각하거든요. 모든 촬영에서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해도 한계를 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가죠.
GQ 최근에 그런 경험이 있었나요?
HS 미국에 단편을 찍으러 다녀왔는데, 감독님이 대본에도 없고 사전에 없었던 어떤 주문을 하셨어요. 디렉션의 연장으로 제가 어떤 대사를 했는데, 그 말을 한 순간 갑자기 안도의 마음이 들면서 울고 싶어지더라고요. 컷, 하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울었어요. 이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공개할 수 없어서 여기까지. 저는 그렇게 현장에서 새로운 디렉션 주시는 감독님들이 너무 좋아요.

GQ 절친 손석구에게 추천한 역할은 다 합격했다면서요. 그 예리한 시선으로 배우 최희서가 아직 하지 않았지만, 너무 잘할 것 같은 역할 하나 추천해준다면요?
HS 하나에 꽂힌 괴짜.
GQ 이를테면?
HS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 특이한 걸 연구하는 사람요. 이를테면 지방을 분해할 수 있는 고기를 만든다든지···.
GQ 최희서는 괴짜인가요?
HS 괴짜 같은 면이 있죠. 어떤 역할을 맡으면 저는 완전히 괴짜가 돼요. 시도 때도 없이 생각에 빠지고, 그러면 잘 듣지도 못하고요. 오늘도 사이클링 하다가 어떤 대사를 생각하면서 피식피식 웃었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더라고요.
GQ 스토리텔러로서 최희서는 요즘 어떤 이야기에 빠져 있어요?
HS <반디>에서 했던 이야기가 제게는 커다란 이야깃거리예요.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세상을 떠난 사람, 반려 동물, 평양냉면집이 될 수도 있고, 요즘 꽂혀 있는 건 헌책방이에요. 아무도 읽지 않고 언젠가는 다시 읽힐지도 모르는 이 종이 더미들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의 심정에 대해서요.
GQ 책에 쓴 나고야의 작은 영화관이 떠올라요. 소제목이 ‘기적일지도 몰라’였던.
HS 그 영화관은 앞으로도 40년은 더 할 것 같으니 걱정 마세요. 그곳을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힘이 대단하거든요. 일본에는 아직도 지방에 오래된 미니 시어터가 아주 많아요.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건 단점이지만.(웃음)
GQ “기적일지도 몰라”란 문장은 뭔가 그렇게 계속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어요.
HS 음···. 기적일지도 몰라, 만나는 일은?

피처 에디터
전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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