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디자이너 모놀로그

2010.07.28유지성

하루가 멀다 하고 패션 디자이너가 늘어난다. 과연 이 땅은 디자이너들에게 천국인 걸까?

명동 등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편집숍 A의 홈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신진 디자이너의 편집숍으로 더욱 다양한 패션 문화를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편집숍 A는 해외브랜드와 기존 국내 브랜드, 신진 디자이너의 제품을 함께 취급했다. 현재 그들이 취급하는 브랜드는 수백 개에 달한다. 대다수가 국내 신진 디자이너의 브랜드다. 한국에 디자이너가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생소한 이름의 옷가지들이 매장 곳곳을 꽉꽉 채우고 있다.

인터넷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인터넷 쇼핑몰의 시작은 ‘보세’ 라 불리는 대량생산 의류와 유명 브랜드 옷을 베낀 ‘짝퉁’ 이었다. ‘XX 스타일, OO 옴므….’ 그들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똑같이 만들어 많이 찍어냈다. 그런 인터넷 시장에도 언제부턴가 디자이너 브랜드를 표방하는 제품이 등장했다. 기존의 인기 쇼핑몰에서는 쇼핑몰 이름을 브랜드화한 자체 제작 상품을 들고 나왔고, 새롭게 등장한 디자이너들은 삼삼오오 모여 웹사이트를 열었다. 양쪽 다‘우린 직접 디자인을 하니까 다르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다.‘비싼 옷 = 갖고 싶은 옷’이라는 공식이 깨지면서, 큰 자본과 유통 교섭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소규모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우후죽순 늘어난 것이다.

“패션은 위에서 아래로, 또는 아래에서 위로 전파되죠. 그런데 최근 아래에서 위로 전파되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신인 디자이너들이 의욕적으로 브랜드를 시작하고 있어요. 자기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거죠.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예전에는 명품으로 휘감고 나왔다면, 요즘은 길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브랜드, 캐주얼한 의상을 자주 입으니까요. 빅뱅이나 f(x)를 보세요. 요즘 아이돌의 영향력은 어린 학생들에게만 미치는 게 아니잖아요?”올봄까지 편집숍A의 MD를 지내며 국내 디자이너의 팽창을 직접 지켜본 L이 말했다. 에디 슬리먼 이 영국 록 밴드의 패션에서 영감을 얻고, 중상류층 이상을 타깃으로 하는 백화점 바니스 뉴욕이 BBC(Billionaires Boys Club)와 마크 제이콥스의 옷을 한 층에서 판매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된 얘기다.

“그런데 사실 다 똑같아요. 다들 디자이너라는 이름은달고 있지만, 뭐가 유행하면 그거만주야장천 만드는 거죠.심지어 디자이너들이 편집숍에 와서 판매자에게 묻는 경우도 있어요. 요즘 어디 제품이 잘나가냐고, 좀 볼 수 있냐고.그런 사람들한테 물건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데 또 가게 입장에선 안 받을 수가 없는 게, 그런 물건들이 더 잘 팔리니까요. 디자이너 고유의 색깔이란 게 없을 수밖에 없죠.”L의 말이다.
잘 팔리면 살아남고, 안 팔리면 도태된다. 시장의 냉정함 앞에서 디자이너는 무기력해진다. 패션은 이미지가 중요한 산업이다. 한 번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는 게 쉽지 않다. 조직력과 자본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진디자이너는 쉽게 타협한다. 물론 판매를 생각 안할수 없다.‘ 무엇이 잘 만든 옷이냐’역시 정답이 없다. 그러나 소비자를 속이고 있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실제로 옷에 소재나 세탁법이 명기된 탭조차 제대로 달려 있지 않거나, 어디선가 베낀 디자인이 버젓이 디자이너의 이름을 달고 판매되고있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보인다.

“최소 3년입니다. 정상적인 브랜드라면 패션 브랜드의 공정상 투자한 자금은 적어도 세 시즌이 지나야만 회수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순환구조를 무시한 채 디자인과 영업을 진행하게 될 경우, 이를 버텨낼 수 있는디자이너는 사실 많지 않습니다. 품질이나 독창성 같은 부분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거죠. 패션에선 타이밍이 중요하니까, 자신있는 분야나 디자인이 시장의유행에 부합한다고 보면 준비가 안 된 채 뛰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란스미어의 브랜드 매니저 남훈의 우려다.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을 하는 대신 프로모션 업체들로부터 다량의 제품을 제안받고 사소한 부분만 변형시켜 제품을 출시하는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기존 디자이너의 옷을 사서 패턴을 그대로 따서 만드는 경우, 소재와 패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채로 브랜드를 시작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단 시안을 찾아요. 그걸 보고 대략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넘기면, 소재랑 패턴 같은 건 알아서 따로 골라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전 그걸 보고 비교해서 선택하죠. 디자인요? 제가 한다니까요.” 인터넷에서 자체 제작 브랜드를 운영하는 K의 말이다.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것과 디자인을 한다는 것이 동일한 개념이 될 수 있는 걸까? 어쨌든 그는 자신을 ‘디자이너 겸 사업가’ 라고 소개했다. 브랜드의 디자인실에서 도제 생활을 거치고 충분한 경험을 쌓은후 자기 브랜드를 세우는 전통적인 일련의 수행 과정은 더이상 일반적인 일이 아닌 셈이다. 코스와 주행은 무시하고 필기시험만 통과한 운전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디자이너들의 입장도 일견 일리가 있다. L은 MD의 눈으로 보기에도 디자이너들은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매장 옷걸이에 빼곡하게 옷이 걸려있어요. 사람은 미어터져요. 시장이랑 다를 바가 없는 거죠. 이런 상황에 대해 디자이너들은 유통업체에 가타부타 얘기할 수가 없는 구조예요. 소위 말하는 갑과 을 관계니까요. 사정이 그렇다 보니 디자이너들은 점점 실망을 하는 거죠. 고민해서 만들어봤자 잘 팔리지도 않는데다, 자기 옷 구깃구깃해져서 다른 브랜드랑 섞여 걸려 있고 땅에 떨어져 있고, 이런 걸 보고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러다 보니 그냥 자기들도 결국 지쳐서 가격 경쟁하고, 팔릴 만한 옷 만들고 하는 거죠.”

‘디자이너이자 사업가’ 인 K는 얼마전 편집숍A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입점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였다. 브랜드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그는 고심끝에 거절했다. 조건이 디자이너에게 너무 불리한 탓이었다.

“편집숍이 가격 조정 권한, 디스플레이 권한을 모조리 갖고 있어요. 관리 소홀로 로스가 나도 우리 쪽에 절반의 책임이 있죠. 편집숍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별로 없어요. 브랜드의 물건을 도매로 사들여 판매하는 방식이 아니고 판매량에 따라 커미션을 가져가는 형식인데다, 입점하고 싶어 하는 브랜드들이 줄을 서있거든요. 이런 조건은 디자이너나 브랜드에게 굉장한 판매 압박으로 다가와요. 남들 다 잘 파는데, 나만 예술 한다고 누가 밥 먹여주진 않잖아요.”

음반시장에 디지털 싱글이라는 새로운 포맷이 등장했을 때, 셀 수 없이 많은 음원과 뮤지션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수준 미달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그들은 막연히 들떠 대형 기획사 일변도의 음악계에 혁명을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배를 채운 건 뮤지션이 아니라 몇몇 이동통신업자와 포털 사이트, 그리고 역시나 대형 기획사였다. 디자이너는 늘어나는데, 그들은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곤 쉬운길을 택한 뒤, 곧 사라진다. 지금 패션 시장의 상황은 꼭 그때의 음반시장을 닮았다.

    에디터
    유지성
    포토그래퍼
    김종현
    스탭
    아트 에디터/김영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