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마음에 새겼고, 어떤 이는 몸에 새길 결심으로 그렸다.
몸과 마음
몸이 좋으면 마음이 좋아진다. 마음이 좋아지면 몸이 좋아진다. 몸과 마음이 긴밀하다는 것을 옛사람들이 알았기에 이토록 비슷한 소리를 가진 것이겠지. 둘은 사실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스펙트럼에 가까운 것으로 표현될 따름이다. 어떤 마음이라 해도 그것은 몸에 종속되어 있으며, 모든 몸은 결국 마음의 표현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몸과 마음은 접속 조사로 연결된 두 단어가 아니라 하나의 단어처럼 여겨진다. ‘마음에 새긴 한글’을 몸에 새길 수 있도록 타투 도안을 그려보겠다는 기획을 제안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네, <지큐>도 제법이군(?)’ 이었고, 그 덕분에 나에게 몸과 마음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은 우리 삶의 전부를 아우르는 것이고, 동시에 타인과의 삶을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의 몸과 접촉할 때 우리에게는 어떤 마음이 일어나고, 그 마음의 일어남은 다시 우리 각자의 몸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요즘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타인의 몸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코 헤아릴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마음에 도달하기 위한 나름의 궁리이기도 하다. 황인찬(시인)
아프지 마
(꼭 뒤에 물결표를 붙여주어야 할 것만 같은? “아프지 마~”라는 문장은 여러모로 참 새삼스럽다. 금지를 의미하는 보조동사 ‘말다’가 동사가 아닌 형용사에 결합되었으니 구성요소대로라면 사실 말이 되는 문장은 아닌 것 같다. “울지 마”, “가지 마”라고는 할 수 있어도 “파랗지 마”, “맵지 마”는 좀 이상하니까. 모르긴 몰라도 일상에서 이런 의미를 이런 구조의 문장으로 전달하는 언어는 아마 우리말밖에 없지 않을까?
아프지 말라고 해서 아픈 것을 중단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말하는 사람은 물론, 듣는 사람 역시도.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길 바란다”라는 적확한 표현이 아니라, “아프지 마”라는 어찌 보면 막무가내 같기도 한 이 네 음절을 통해 앓거나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 상대의 회복과 안녕을 기원하곤 한다. “알겠어”라고 대답하면 꼭 그렇게 될 것만 같다. 그래서 “아프지 마~”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뭉클해지고 동시에 뭉글뭉글해진다. 보들보들한 수건으로 감싼 따뜻한 물주머니를 건네받기라도 한 것처럼. 장류진(소설가)
나긋나긋
가능하면 부드럽고 편안한 단어를 떠올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걸렸다. 이미 패션이 된 지 오래인데도 타투는 내게 비장한 이미지였나 보다. 돌이킬 수 없는 것. 지울 수 없는 것. 삶과 죽음의 경계라도 가를 듯한 문구들을 하나하나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부드러운 네 글자가 떠올랐다. 나긋나긋, 마음에 들었다. 나긋나긋한 것들에도 폭력적인 면이 있을까? 그렇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목소리든 몸짓이든 나긋나긋한 것은 평화로움 그 자체다. 부드럽게 두 차례 멈춰 서는 이 발음에서는 선선한 바람과 그 느슨한 리듬이 느껴진다. 온화한 기후와 천천히 흔들리는 나뭇잎들도 떠오른다.그런 풍경이라면 시간을 잊고 긴 이야기를 한없이 듣고 싶을 것 같다. 게다가 나긋나긋함에는 위엄이 있다. 마냥 순하고 착한 것과는 다르다. 느긋함보다도 살짝 긴장감이 있다. 이 말에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파란만장한 경험이 담겨 있고, 거친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 같은 든든함도 있다. 게다가 유혹적이기까지 하다. 얼마나 많은 옛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나긋나긋한 노래에 깜빡 잠이 들고 그대로 무장해제되었던가. 평화가 순진하게 들리는 이 폭력의 시대에 이 ‘나긋나긋’이라는 단어를 골라보았다. 부드럽고 위엄있는 네 글자를. 김목인(싱어송라이터, 작가)
불안은 신발같은 것
소설에 이렇게 적어둔 적이 있다. 예술가에게 불안은 신발과 같은 것이라고, 신발이 없어도 걸을 수 있지만 신발이 있으면 더 멀리까지 걸어갈 마음을 품을 수 있다고.이 말을 했던 사람은 <밤의 여행자들>의 시나리오 작가로, 그는 거대한 재난을 기획하는 중이었고 자꾸 따라붙는 권태와 둔감함을 전문가의 냉철함 정도로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무언가가 결여된 것이 분명한 자리를 애써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 거기서 오는 권태가 어쩌면 슬픔의 다른 이름임을 마주할까 모른 척하는 사람.그에게 당시에 내가 자주 떠올리던 말 하나를 빌려주었고, 그는 그 말을 스스로의 안심을 돕는 다리미처럼 사용했다. 불안이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사실은 진짜 불안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겁한 예술가에다가 끔찍한 사람이지만, 사실 그와 내가 얼마나 다를까 종종 생각한다. 어쩌면 겨우 한 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대한 자주 의심하고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 불안이 나를 떠나가지 않도록, 내가 안주하지 않도록. 오만을 허용하지 않는 그 불친절한 공기는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 안으로 한걸음씩 내밀어보는 것은 너무쉽게 낡아버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도발이다. 윤고은(소설가)
다하다, 남김없이···.
엄마는 조그만 저보다도 더 조그만 사람이었습니다. 1943년 4월 식민지 시절의 끝자락에 종로 한복판에서 태어났을 때도, 여학생 시절에도, 연애와 결혼과 출산과 그 후 뜻하지 않게 이어진 지독한 생활고 속에서도 여전히 내내 조그마했습니다. 그 조그만 몸에서 평생 수많은 닳지 않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인내와 공평한 마음, 측은지심과 놀라운 지혜, 포기를 모르는 근성과 한도 없는 자비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희귀난치병을 만나 7년간 이어진 투병 생활 중에도 그 쏟아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움직임을 잃고 말을 잃었을 때도, 기억을 잃고 시야를 잃어갈 때도, 매일의 계획과 내일의 희망, 다음 또 그다음 봄에 대한 상상이 눈으로 숨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10년 전, 2012년 4월, 7년의 긴 투병 끝에 저와 지내던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의 엄마는 제가 본 그 조그만 엄마 중에 가장 작았습니다. 작은 병상의 3분의 1도 채우지 못한 하얗고 작은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이 말을 떠올렸습니다. [다하다, 남김없이···.] 지금도 무언가를 완성하고 “다했다”라고 말할 때 엄마를 떠올립니다. 그러면 늘 ‘정말 다··· 한 건가···?’라는 물음표가 돌아옵니다. 김지혜(드라마 작가)
해버려
시작은 이옥섭 감독의 말이었다. “저희(2X9, 이옥섭과 구교환)는 만약에 누가 너무 미우면 사랑해버려요.” 이 말이 왜 좋을까, 왜 자꾸 기억에 남을까. 미우면 사랑한다는 발상도 기괴하고 멋지지만 방점이 찍힌 건 “해버려”라는 쪽이란 걸 나중에 깨달았다. 해버려. ‘하다’와 ‘버리다’는 도무지 다른 속성의 말이 들러붙어 이토록 쿨한 조합을 이루어내다니. 그 앞에 어떤 말을 넣어도 좋을 것 같은말. 많은 생각을 단숨에 속성 다이어트 시켜줄 것 같은 흔쾌한 말. 주저 말고 해! 라는 뉘앙스로도 들리고, 해서 버리라는 말 같기도 해서, 정말 해버리고 나면 찌꺼기가 버려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 앞에 ‘사랑’, ‘애정’같은 달콤하고 다정한 단어를 넣으면 문장의 표정이 좀 더 다이내믹해진다.
영어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을 그 특유의 질감, 분위기가 이 말에는 담겨있다. 평생 타투같은 건 도전해보지 못할 것 같은 쫄보이지만 언젠가 만약에, 이 말이 내 몸에 지워지지 않는 타투로 남는다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만한 곳에 은밀히 새기고싶다. 지갑 속에 접어 넣는 부적처럼 가끔 잊고 있다가 이따금 꺼내볼 수 있도록. 전희란(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전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