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한 아방가르드의 전사, 아티스트 백남준의 탄생 90주년을 맞아 곳곳에서 생일 파티가 열린다. 그것도 1년 내내 말이다.
아방가르드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 정의를 ‘백남준’이란 이름으로 대신하려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중고등학교 미술 혹은 사회 시간에 한 번쯤은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이름을 유학 시절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처음 접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전위 예술가이자 아방가르드 운동의 선두 주자이며,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의 창시자. 우리나라에 이런 예술가가 있었다고? 심지어 외국인도 알던 백남준을 그제야 알았다는 사실에 조금 창피했던 기억을 가지고 이제 탄생 90주년을 맞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백남준은 1932년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피아노를 비롯해 음악을 배웠다.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가 도쿄 대학교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이후 현대음악의 중심이라 불리는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석사 및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다. 그러니까 백남준은 대성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돈을 버는 일 보다 창작에 더 관심이 많았고, 특히 어린 시절 접한 아르놀트 쇤베르크 Arnold Schönberg의 영향으로 음악의 틀을 깨는 전위 음악에 꽂혀 있었다.
백남준이 독일에 머물던 1958년, 그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한 번에 뒤집어 버리는 인연을 만나게 된다. 우리에게는 ‘4분 33초’와 같은 작품으로 익숙한 전위 예술가이자 아방가르드 음악가인 존 케이지다. 백남준은 한 인터뷰에서 “나의 인생은 존 케이지를 만났을 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그에게서 지대한 영감과 영향을 받았다. 이전에는 그저 클래식을 탈피한 전자 음악에 심취했던 음악가였다면, 이후에는 전방위 예술가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적인 연주 및 퍼포먼스를 변주해나가기 시작했다. 케이지의 영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을 꼽자면 1959년 뒤셀도르프 갤러리 22에서 선보인 첫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 리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이다. 깡통을 차고 유리판을 깬 다음, 그 유리로 달걀과 장난감을 치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들려준 녹음 테이프에는 오토바이의 굉음과 베토벤의 교향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사이렌 소리 등이 섞였다. 백남준은 결국 피아노를 때려 부수는 것으로 충격적인 퍼포먼스의 마침표를 찍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행위와 음악을 결합한 작업을 “액션 뮤직Aktion-Music”이라 부르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곧바로 독일에서 우리가 익히 아는 플럭서스Fluxus 라는 전위 예술 집단이 생겨나며 새로운 예술 운동이 일어난다. 미국의 행위 예술가인 조지 마키우나스 George Maciunas가 1962년 독일 비스바덴 미술관에서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페스티벌 FLUXUS-Internationale Festaspiele Neuester Musik>을 열고 플럭 서스 매니페스토를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예술 그룹을 출범한 것이다. 기존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이를 만들어낸 제도와 모든 경향을 부정하는 반예술적, 반문화적인 이 운동은 음악, 미술, 공연, 무용, 영화, 디자인, 출판, 건축, 과학 등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윽고 탈장르적 예술을 지향했다. 새로운 것, 남이 하지 않은 것, 그래서 소위 ‘전위’적인 것들에 지대한 관심을 둔 백남준 역시 이 플럭서스 그룹과 운동에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3년 백남준은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역사적인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에서 그는 13대의 실험 텔레비전을 세 부류로 나누어 선보였다. 이는 백남준을 “비디오 아트 창시자”로 만들어준 전시로, 이후 파격적인 퍼포먼스에 더해 조금씩 과감한 비디 오 아트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1974년부터 백남준은 본격적으로 비디오 아트를 활용하며 “관람객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닫혀있지 않은 전자 환경”을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한다. ‘비디오 신시사이저’, ‘비디오 코뮨’, ‘TV 부처’, ‘굿 모닝 미스터 오웰’, ‘다다익선’ 등 무수한 비디오 아트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비디오 인스톨레이션이 탄생했고, 2006년 작고 이후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유수 갤러리와 미술관의 전시로 후대에 선보여지고 있다.
한데 이렇게 백남준의 생과 작품에 대해 줄줄이 읊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예술은 역시 읽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경험하는 데서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올해는 특별히 이 엄청난 괴짜 예술가의 탄생 90주년을 맞아 국내 외에 서그의 생애를 조명하고 또 작품 세계를 기리는 전시들이 대거 마련됐다. 이미 2022년의 끝자락에 온 만큼 종료한 전시가 많지만, 이를 놓쳤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직 예정되어 있고, 또 진행 중인 전시도 많으니까.
백남준아트센터는 올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특별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3월 3일부터 9월 18일까지 개최한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전을 시작으로 <완벽한 최후의 1초 – 교향곡 2번>전을 지나 11월 20일까지 이어지는 <필드 기억>전, 2023년 1월 24일까지 열리는 <바로크 백남준>전까지 여전히 살펴볼 전시가 많다. 특히 <바로크 백남준>전은 비디오와 빛으로 가득 찬 백남준의 영광스러운 옛 설치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전시보다 조금 더 특별하다. 갤러리, 미술관은 물론 심지어 아트 페어에서도 백남준의 작품을 자주 만날 수 있지만, 대규모 미 디어 설치 작업은 상대적으로 접할 기회가 드물다. 1993년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해 40대의 프로젝터를 활용한 작품 ‘시스틴 성당’을 선보였고, 1995년 에는 독일의 한 교회에 대규모 프로젝션과 레이저를 설치해 ‘바로크 레이저’를 소개하며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 지금은 누구도 사용하지 않고 찾아보기도 힘든, 무게가 80킬로그램에 달하는 삼관식 프로젝터 5대를 갖고 1998년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한 ‘촛불 하나’라는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모두 거대하며 장소 특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쉽사리 보여주기 힘든 것들인데, 2022년 백남준아트센터는 <바로크 백남준>전을 통해 이러한 작품들을 다시 재현한다. 이는 건축, 회화, 조각, 음악, 춤 등 모든 예술 매체의 이상적인 상호작용을 추구하고, 빛으로 상정된 통치 질서를 드러내는 바로크식 종합 예술과 닮았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전시를 보면 더욱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연일 화제가 되는 전시가 또 하나 있다.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리는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전이다. 1988년에 만든 ‘다다익선’은 총 1,003대의 브라운관(CRT) 모니터가 활용된, 백남준의 작품 가운데 최대 규모 작업이다. 2003년부터 모니터를 전면교체하는 등 30여년 동안 수리를 반복해오다 2018년 2월 전면적인 보존·복원 작업이 필요해 가동을 중단했는데, 3년 만에 드디어 다시 점등 및 재가동이 시작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다익선’ 설치부터 34년간의 운영 및 보존 과정을 담은 200여 점의 아카이브로 전시를 꾸렸다.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만 운영하니 시간을 꼭 확인하고 방문하기 바란다.
백남준은 이제 자기 자신이 후대 작가들의 ‘존 케이지’가 되었다.(물론 백남준은 일찌감치 존 케이지의 새장cage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확고한 작업세계를 만들어 나갔지만.)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그가 활발히 활동했던 20세기보다 더욱 빠르게 기술이 발전하며 실시간으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해 다양한 표현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독일의 문학 평론가이자 미디어 이론가인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는 “매체 Media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라고까지 표현했다. 그의 주장대로 매체가 세계를 보고(Seeing) 지각하는(Perceiving) 방식을 변화시킨다면, 예술가의 역할은 기존 매체의 어법에서 탈피해 다른 방식으로 미디어를 대하는 것이지 않을까. 백남준은 자기 작품을 두고 “엉성하다(Sloppy)”라고 표현했지만, 당시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아방가르드했다. 틀을 탈피하고자 몸부림치고 새로운 것을 찾아 수많은 매체 실험을 이어간 그의 정신은 여전히 후배 예술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탄생 90주년을 맞아 1년 내내 이토록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여는 현대 미술가가 어디 있는가. 당당했던 아방가르드의 전사 백남준의 기억은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200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글 / 정송(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