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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 케인 "제 그림이 당신의 정신적 탈출구가 되기를 바래요"

2023.01.11김은희

태풍의 눈, 뜨다. 알피 케인의 백지 위에서.

GQ 아시아에서 여는 첫 개인전을 축하드립니다.
AC 무척 벅찹니다. 제 작품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일이 처음이라 기뻐요.
GQ 처음이라기엔 ARTSY(세계 최대 온라인 아트 마켓 플레이스)가 선정한 컬렉터들이 가장 기대하는 아티스트 1위에 오르기도 했잖아요.
AC 좋은 찬사를 받아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늘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어 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내 작품을 통해 그런 소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길 바랐어요.
GQ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한국 화방에서 산 그림 도구들이에요. 이 중 하나의 도구와 컬러를 골라보자면요?
AC 이걸로 하겠어요. 저는 초록색을 좋아해요. (붓펜, 크레파스, 4B 연필, 마카 중 초록색 마카를 골랐다.) 제 그림을 보는 분들이 녹색을 자주 쓰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서 문득 알게 됐어요. 녹색이 제가 쓰는 오렌지 컬러나 다른 화사한 색채와 좋은 대비를 이뤄서 그렇게 느끼시는 것 같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녹색을 제일 좋아하는 건 맞습니다만, 저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컬러를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Lacquer Staircase 2022, Vinyl and Acrylic Paint on Canvas 177.8 × 152.4 cm

GQ 이곳 서울에서 당신의 빈 캔버스 위로 옮기면 좋겠다, 받은 영감이 있나요?
AC 묵고있는 숙소에서 하늘과 지평선을 함께 편안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안개 때문인지 미세먼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몽환적인 분위기가 나기도 하고요. 원래 풍경은 가까워질수록 색감이 더 강렬해지잖아요. 이번에는 상당히 높은 시선에서 풍경을 바라본 이 경험이 돌아가서 작업할 때 많은 영감을 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 중 잠시 전등사라는 절에 들렀는데 그 절의 건축물에서 굉장한 영감을 받았어요. ‘오프닝’이 많더군요. 창문이나 문같은 안팎으로 열린 공간을 통해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모습이나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모습, 이런 여러 관점이 교차하면서 대단히 흥미로웠어요. 절에서 지내면서 그림을 한번 그려보면 좋겠어요.
GQ 오롯이 이번 전시를 위해 1년 동안 16점의 작품을 그렸다고요. 전시명을 <Moments of Calm: 고요의 순간>이라고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C 이번 전시명은 모든 작품을 완성한 후에 지었어요. 뒤로 물러서서 작품들을 보면서 공통점이 무엇인지 생각했죠. 고요함과 평온함, 적막함을 느꼈어요. 우리는 빨리빨리 바쁜 생활을 하잖아요. 보통 때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저만의 분위기로 고요함이 느껴질 수 있도록, 강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작업했어요.
GQ 제게 알피 케인이란 작가의 그림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고요함에서 스릴이 느껴진다는 점이에요.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그림자이거나 무채색으로 표현되기도 하죠.
AC 제 작품이 무언가 고독하고, 죽은 듯 정적으로만 보이는 건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림에 힌트를 넣었어요. 예를 들면 저는 혼자가 편하기는 하지만 온전히 혼자인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굴뚝의 연기를 말씀하셨는데, 연기라는 것은 집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암시하잖아요. 그와 같이 어떤 존재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완벽한 고독은 아니게 되죠.

Foxglove Farmhouse, 2022, Vinyl and Acrylic Paint on Canvas 120 x 90 cm

GQ 아, 외로움이나 ‘슬픔 Sorrow’도 느껴지곤 하지만 ‘스릴러 Thriller’ 같은 긴장 감을 말하고 싶었어요.
AC 오, 그 긴장감을 표현하려고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계획하는데, 감사합니다. 맞아요. 제 그림에는 무슨 일이 금방 일어날 것만 같은 힌트가 숨겨져있기도 해요. (위 사진 속 작가의 왼편에 걸린) ‘Before the Storm’을 보면 화사하게 꽃도 피어있고 밝게 창문도 열려있지만 저 너머로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죠. 무언가 예상치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느낌을 가끔씩 주고 싶어요.
GQ 케임브리지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상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나요?
AC 부모님과 미술 선생님들은 제가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할 것라고 생각했지만, 저 자신은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건축을 공부함으로써 디자인에 대한 저의 애정을 충족할 수 있었고, 동시에 저의 예술적 창의성을 발전시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어요. 대학에서 기술적인 드로잉을 많이 연습했고, 이후 그리는 과정 그 자체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컴퓨터로는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어요. 제게는 커다란 카타르시스가 됐어요. 2018년에 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멈추고 싶지 않았어요. 작품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자 사람들이 구매를 문의했고, 관심을 받게 될수록 그림이 나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느꼈어요.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일을 하는 나 자신을 상상할 수 없을만큼 매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GQ 건축은 왜 공부하고 싶었어요?
AC 건축과 미술 사이에서는 항상 많은 고민을 했어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디자인에 대한 강박이랄까요, 열망이 있어서 테이블이나 의자를 모으고는 했죠. 열 살 때 부모님께서 생일선물로 무엇을 줄까 물었을 때 의자라고 말했을 정도예요. 인테리어, 가구, 디자인에 늘 관심이 많았고, 늘 관련 책을 읽었어요. 이런 공부를 정식으로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에 건축학이란 학문을 꼭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화가가 되고 나서 좋은 점은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한 곳에 모을 수 있게 된 거예요.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열망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어서 좋습니다.

Bath by Candlelight, 2022, Vinyl and Acrylic Paint on Canvas 120 × 170 cm

GQ 혹자는 당신의 그림에서 데이비드 호크니란 이름을 꺼내기도 하죠. 불편하지는 않나요?
AC 전혀요. 지금까지 인생의 여러 지점에서 강력한 영향을 준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많아요. 2014년 피렌체와 베니스를 여행하면서는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본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과 베니스에서 본 벨리니의 활기찬 유화에 흥미를 느꼈죠.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면서는 17세기 네덜란드 그림을 보기 시작했는데, 암스테르담과 델프트에서 본 피터르 더 호흐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이 인상 깊었어요. 이들은 주변 운하를 따라 늘어선 공간에 나타나는 미묘한 빛의 변화와 인간의 실내 활동에 집중함으로써 주제를 확장시켰어요. 그리고 201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의 회고전을 봤을 때 저는 마치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했죠. 그 색채의 생동감이 제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히려 감사한 일이죠. 그때 이후 저 역시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GQ 실제로 마주한 당신의 그림은 화면으로 볼 때보다 더 놀라웠어요. 색감이 무척 아름다워서요. 예를 들어 석양과 같은 하늘빛은 단순히 주황색 혹은 분홍색, 어떤 하나의 색깔만으로 구현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AC 석양을 예로 들면 색깔을 얇게, 여러 번 층을 쌓아올려요. 여러 단계에 거쳐 오랜 시간 레이어를 입히죠. 그러나 어떤 색은 비치게도 하고, 어떤 색은 삐져나오게 하면서 그 깊이를 느낄 수 있도록 신경씁니다. 요즘은 무엇이든 스마트폰으로 많이 보는데, 스마트폰으로만 보고 만족할만한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아요. 이건 꼭 실제로 봐야겠다는 욕망을 일으키고 싶어요.
GQ 치밀하게 건축적인 공간감 역시 알피 케인의 것이죠.
AC 건축을 배우기 전에 그리던 주제도 항상 인테리어나 건축이었어요. 건축을 공부하면서는 건물이 어떻게 기초부터 지붕까지 지어지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됐어요. 필요한 디테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면서 그림을 그릴 때 훨씬 더 자신감이 생겼죠. 배운 지식을 응용해 그런 디테일을 줄 수 있게 됐어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거의 실재하는 것처럼 믿기고, 만질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을 그리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House on the Peninsula, 2022, Vinyl and Acrylic Paint on Canvas 177.8 × 203.2 cm

GQ 실제 작가님의 집, 공간은 어떤 모습인가요?
AC 아주 오래된 코티지예요. 집 자체는 ‘Foxglove Farmhouse’라는 그림 속의 집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제가 살고 있는 이스트 서섹스 East Sussex 라이 Rye의 조그마한 집이고, 가구 등을 빼면 그다지 특별할 게 없어요. 하지만 작품 속에서 보이는 오브제는 실제 저의 방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많습니다. 패턴, 카펫, 도자기, 이런 제 방의 실제 오브제를 약간씩 변형해서 상상한 배경에 넣어요. 또 하나, 제가 사는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전망이에요. 침실이 맨 위층에 있는데, 라이는 3층 높이 정도로 고도가 제한돼 제 집이 그리 높지않은데도 침실에서 도시의 전망이 다 보여요. 다른 집의 정원이나 인테리어가 보이기도 하죠. (공간의) 깊이감을 얻는 데 많은 영감을 받아요. 라이 에서 볼 수 있는 실제 건축물과 풍경에 제 상상력을 더해 특별한 랜드스케이프를 창작합니다.
GQ 2020년에 발표한 노래 ‘Alone on the Dancefloor’의 뮤직비디오에 잠깐 나오는 침실 풍경이 작가님의 공간은 아닐까 추측했어요. 작가님을 비롯해 다양한 개인이 각자의 침실을 무대삼아 춤추죠.
AC 그건 런던의 부모님 댁에서 촬영했는데, 코로나19로 집에 갇혀 있을 때 만들어본 거예요. 음악은 달리 말하면 사이드, 재미로 하는 프로젝트예요. 제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고 계속할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건 건축, 디자인, 그림 작업이지만, 말하자면 와일드한 순간들, 에너지를 분출할 출구가 필요할 때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해줘요. 내 사고의 다른 영역을 훈련하는 셈이죠. 그림을 그릴 때도 그림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하기도 해요. 한 노래를 계속 반복해서 듣기도 하고요. 그게 정신적으로는 탈출구가 되어 고요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비되는 힘이 됩니다.

Sofa by the Reeds, 2022, Vinyl and Acrylic Paint on Canvas 120 × 90 cm

GQ 집, 공간. 그것은 개인의 쉼터, 도피처, 작은 우주 같기도 합니다. 알피 케인은 왜 이토록 공간을 응시하나요?
AC 무의식적으로 항상 이런 주제에 머무르는 것 같아요. ‘왜 항상 이 주제를 그리는가’ 물어보면 그 답은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항상 너무나 끌렸어요. 이 주제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서 앞으로도, 조금 다른 요소를 넣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해온 작업처럼 건축, 인테리어, 익스테리어, 그 공간이 저의 근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 작품의 공간에서 실제 거주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길 원하지만, 동시에 이 공간들은 초현실적으로 무형이며 이상화된 세계이기도 합니다. 제가 그리는 이 공간들이 잠시나마 현실을 대신하며 일상으로부터의 정신적 탈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알피 케인의 <Moments of Calm: 고요의 순간> 전은 2022년 12월 9일부터 2023년 2월 19일까지 롯데갤러리에서 열린다.

피처 에디터
김은희
포토그래퍼
장기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