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아티스트의 글을 싣는 지큐의 디지털 저널 <Letters From.>. ‘당신이 열렬히 사랑하는 낭만은 무엇인가요?’ 에디터가 던진 질문에 선우정아가 답장을 보냈다. 열렬한 마음은 깨진 조각마저 사랑스럽게 만든다고.
P의 사랑
실행의 첫발을 떼는 순간, 그는 계획과 전혀 다른 걸음을 내딛으며 애써 세워놓은 계획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다. 긴 시간 고민 끝에 섬세하게 짠 프로젝트의 기획도 그의 발목을 붙잡지 못한다. 외부에서 들이닥친 변수와 그보다 혼란한 그의 변덕으로 인해, 세워둔 계획들은 도미노처럼 시원하고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그는 때로 실행 시도조차 하지 않아 계획을 멋쩍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내일 오전 9시 30분에 일어나서 일 나가기 전에 가벼운 요가를 한 뒤 아침을 먹고, 커피를 내리는 동안 두 번째 끼니를 위한 도시락을 챙긴다. 귀가 후에는 30분간 달리고, 샤워로 젖은 머리카락이 마를 때까지 곡 작업을 하다가 잔다’ 라는 일상 계획은 늦잠과 함께 꿈처럼 사라져버리는 식이다. 그는 대단한 갈등도 하지 않고 산뜻하게 기상 알람을 꺼버린다. 다음 단계도 전부 무시하고 완전히 다른 하루를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그는 사실 계획을 사랑한다.
하루의 계획을 이렇듯 시작도 전에 없애버릴 때도, 몇 날 며칠 치밀하게 설계한 프로젝트의 기획을 하루아침에 뒤집어엎을 때도, 그는 계획하는 행위를 사랑하고 있었다.
기능과 레이아웃이 다양한 플래너와 스케줄러 앱,
타임라인, 체크리스트, 표, 미디어 레퍼런스를 통해 세밀하게 연출해보는 목표,
여러 모양으로 그려보는 브레인스토밍,
틈만 나면 머릿속에 펼쳐놓는 스토리보드 같은 내일의 계획….
계획을 세우는 과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매우 행복해한다.
아마도 태어나 처음으로 동그란 생활계획표를 만들어보던 그 순간,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절대 지키지 못할 기상 시간과 공부 시간을 정하면서 어린 그는 마냥 행복해했다. 서툰 손으로 미래의 하루를 알록달록하게 그려보는 것을 참 좋아했다. 여러 경우를 상상하는 재미도 좋았다. 예쁘게 그려둔 계획표대로 살지 못하는 스트레스보다, 내일의 계획을 기대하는 설렘이 훨씬 컸다. 그는 계획의 깨진 조각들조차 사랑스러워한 것이다.
그의 눈앞에서 자꾸만 계획이 사라지고 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열렬하게, 심신과 시간을 잔뜩 사용해 새 계획을 짠다. 지켜내지 못했다는 절망도, 패배감도 없다. 앞으로 계획할 거리가 차고 넘치므로. 계획할 때 행복하고, 계획하는 행위를 그저 사랑하므로.
그에겐 이 글을 쓰기 위한 3개의 계획이 있었다. ‘내일 일어나서 공복에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써야지, 오늘 밤 자기 전에 써야지, 아이패드 들고 동네 카페에 가서 써야지….’
글을 쓰는 현재는 오늘도 내일도 아닌 다른 날이며, 계획과 달리 한 번에 쓰지 못하고 30분 쓰다가 일상을 보내고 다시 10분을 쓰는 식이며, 이동하며 스마트폰으로 작성 중이라 그의 손목은 매우 뻐근하다.
이번에도 그의 계획대로 되는 것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러든 말든, 그는 지금 내일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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