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세종, 너무 시끄러운 고독.
GQ 생각의 문이 있다면 두드려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늘 카메라 앞에 선 양세종을 보고도 그랬죠.
SJ 시안에 흑백 사진이 많더라고요. 가만히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느낌. 어떤 사진은 몽환적이고, 어떤 사진은 서늘했어요. 쭈그려 앉아 고개 숙인 남자의 사진을 한참 쳐다봤어요. 그 느낌을 고스란히 가져가려고요.
GQ 오늘의 장면들 속에서 문득 “조용한 사람의 내면이 가장 시끄럽다”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양세종과 어울린다고 생각한 말이기도 했고요.
SJ 조용한 사람의 내면이 가장 시끄럽다…격하게 공감되는 말이네요. 맞아요. 제 안에서는 늘 요동이 일어요. 요동치는 나날의 저를 매일 마주해요. 그렇지 않은 날보다 그런 날이 더 많아요. 누군가 툭 지나가듯이 던지는 말도 저는 잘 흘려보내지 못해요. 그래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요.
GQ 주로 안으로 삼켜요?
SJ 요즘 복싱에 빠져 있어요. 헬스하면서 쇠를 들어올리면 무언가를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드는데, 복싱은 자꾸 털어내는 느낌이 들어요. 제 안에서 요동치던 것들이 100에서 19 정도까지 떨어져요. 그만큼 비워져요.
GQ 20도 아니고 10도 아닌 19.
SJ 20이나 10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아니에요. 털어내도 여전히 제 안의 요동은 찌꺼기처럼 남아 있죠.
GQ 언젠가 외로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표현한 적이 있어요. 그 표현이 퍽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궁금했어요. 외로움을 사랑한다는 건 뭘까?
SJ 배우는 외로운 직업이에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래요. 어떤 인물이 제게 주어지면 몇 개월 동안 그 인물에 풍덩 빠져서 그 생각에만 골몰해 살아요. 그렇게 푹 빠져야 누군가 공감할 수 있는 연기가 나올 수 있다고 저는 감히 믿거든요. 달리 의지할 곳이 없어요. 나 자신을 믿어야죠. 정말 외로워요. 신인 때는 그런 과정들이 외롭다 못해 고통스럽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 숙명 같은 외로움을 사랑해버리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외로움을 그저 받아들이게 됐어요.
GQ 그러면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숙명처럼 외로운 일을 왜 지속하는가에 대해서.
SJ 마력이 있어요. 짜릿함? 강렬함? 처음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 첫 연극 공연을 보면서도 ‘간질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현장에서 감독님, 상대 배우와 무언가를 만들어나갈 때의 짜릿한 느낌이 좋아요.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일 뿐, 그 만져지지 않는 느낌을 적확하게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워요.
GQ 양세종이 생각하는 좋은 연기란 무엇이에요?
SJ 중요한 건 진정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툭, 내뱉는 대사만으로 울림을 줄 때가 있잖아요. 그것을 느낄 때 이 배우가 완전히 캐릭터에 빠져 있구나, 혹은 이 정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구나, 대단하다 느껴요. 호흡에서 충동이 일어나면서 내면에서 요동치면 그것이 눈으로도 드러나죠.
GQ “솔직한 사람 되겠습니다.” 양세종의 신인 연기상 수상 소감이야말로 울림을 주는 한마디였죠. 그때 느꼈어요. 때론 한마디가 더 많은 말을 하는구나.
SJ 제가 이야기한 ‘솔직함’ 안에는 말씀하신 대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연기에서 저는 제 자신에게 솔직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어떤 대사를 뱉고 나서 내용물 없이 껍데기만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도 대사 톤이 좋거나 다른 걸로 커버되면 오케이가 날 수도 있죠. 그럴 때 본인은 분명히 알아요. 그 순간 솔직하지 못했다는 것을. 누군가는 ‘다행이다, 잘 넘어갔네’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감독님 잠시만요, 방금 그거 잘못한 것 같아요” 말할 수도 있죠. 정답은 없지만, 나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건 그럼 점에서예요.
GQ 뱉는 대사를 온전히 다 느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SJ 맞아요. 그것이 너무너무 맞는 말인데, 매 신을 다 그렇게 느끼기란 너무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대본을 계속 봐요. 인물에 대한 서사를 명확하게 이해하면, 체화되어 알아서 뿜어져 나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GQ 껍데기만 뱉으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괴로워요?
SJ 괴로워요. 무너져 버려요. 그래서 혼자 있을 때 연습을 엄청 하죠. 그런데 연기란 게 톤을 사전에 완벽히 정해두면 현장에서 상대 배우가 주는 자극에 제대로 반응하기가 어렵게 돼요. 진실하게 하되, 열린 태도로 여러 상상도 해보고, 여러 방식으로 뱉어보기도 하면서 계속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GQ 이전 인터뷰들을 보면, 답변을 비워둔 질문이 많더라고요.
SJ 꽤 있었죠. 인간 양세종의 정곡을 쿡 찌르는 질문을 받으면, 그래서 한없이 솔직해져야 하면 겁이 났던 것 같아요. 돌려서 말하기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우니까 차라리 “답변 못 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너 한없이 솔직해야 하는 질문 받으면 답변할 수 있어?”라고 한다면, 아직도 “네”라고는 못 할 것 같아요.
GQ 그렇다면 그때 대답하지 않은 같은 질문을 지금 다시 받으면 어떨까요? 이를테면 “당신이 내 안을 깊게 들여다보는 이유는?” 같은 것.
SJ (긴 공백)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궁금해요. 나는 진짜 누구일까? 남들이 판단하는 나 말고, 내가 생각하는 나. 그에 대한 답은 아직 내리지 못했어요. 가까운 사람들은 저를 보며 “상남자 같다, 투박하다”고들 하는데, 아 그런가 보다 하다가도, 또 생각이 많아져요. 그러다 일단 생각을 멈추죠. 그러니까 나를 깊게 들여다보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GQ 인터뷰하고 있는 2023년 2월 23일의 양세종은 어떤 사람이에요?
SJ 오늘은… 지금은 진지한 세종인 것 같아요. 인터뷰에 따라 가벼울 수도 있고, 지금처럼 굉장히 딥해질 수도 있어요.
GQ 딥해지면 힘든가요?
SJ 굉장히 집중해야 하니까요. 지금 1백 퍼센트 집중 상태예요.
GQ 양세종에게 시간을 나눈다는 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에요?
SJ 굉장히 가치 있죠. 그만큼 내 안에 들어왔다는 얘기니까. 만약 친한 친구나 좋아하는 동생이 거듭 잘못을 해요. 그러면 저는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놓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 않으면 그냥 놔버려요. 시간을 주지 않아요.
GQ 누군가를 좋아하기까지 시간을 많이 들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전에 ‘충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과는 동떨어져 보이더라고요.
SJ 어릴 때는 첫인상을 무척 믿었어요.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처음에 좋은 느낌이 든다 해도 ‘오래 지켜봐야지’라고 마음을 다잡아요.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정을 퍼주는 편이었어요. 그렇게 시간이 쌓이다가 관계가 삐거덕하면 무척 힘들더라고요. 정을 준 만큼 큰 감정의 폭으로 다가와요. 그래서 누군가를 좋아하기까지 시간을 들이게 됐어요. 마음을 주는 저만의 방식이 생긴 거예요.
GQ 양세종에게 말을 거는,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는 대체로 어떤 거예요?
SJ 단순하게는 글이 재미있으면 심장이 뛰어요. 그 정서가 제 안에 온전히 들어와 자리 잡으면 이야기가 술술술 읽혀요. 저는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받은 순서대로 일단 전부 읽어요. 거절할 심산이라도 일단은 다 읽어요. 1번, 2번, 3번, 순서대로 쭉 읽다가 ‘어어?’ 싶게 마음에 들어오는 대본이 있으면 마음속에 체크해두고, 순서가 끝나면 마음에 잔향을 남긴 그 대본을 다시 읽어보죠.
GQ 제가 느낀 양세종은 곁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SJ 맞아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그동안 선택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GQ 왜일까요?
SJ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침묵) ‘진짜’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GQ 진짜가 되고 싶어서.
SJ 진짜, 진짜가 되고 싶어요.
GQ 아까 영상 촬영할 때 시나리오를 쓴다면 아주 막 사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죠. 그 끝엔 비극이 있을 거라고 했고요.
SJ 굉장히 현실적이지 않아요? 정말로 막 사는 나쁜 남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랑이 이루어지는 게 저는 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비극을 맞이하든, 그 편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죠.
GQ 그 비극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SJ 누군가는 이야기에서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사랑이 이루어지길 내심 바랄 수도 있어요. 여자가 남자를 정말 사랑했다면, 남아 있는 자의 슬픔이 남겠죠. 남아 있는 감정들에 대해 다뤄보고 싶어요. 여운이 있을 것 같아요.
GQ 그 나쁜 남자를 직접 연기해보면 어때요?
SJ 하고 싶어요. 그런데 회사와 상의도 해야 하니까…(웃음)
GQ 이야기하다 보니 군대가 양세종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준 것처럼 느껴져요.
SJ 맞아요. 군대 가서 처음 1년 동안 연기 생각을 전혀 안 했어요. 외로웠냐고요? 전혀요. 오히려 행복했어요. 어느 순간 제 자신을 보니까 엄청나게 웃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군생활에만 집중하다가 11개월쯤 되어 차기작을 검토하면서 조금씩 연기에 대해 다시 생각했어요. 여유를 가지면서 확실히 충동적인 부분이 덜해졌죠. 한껏 서 있던 날도 조금은 무뎌졌고요.
GQ 평안함에 이르렀나요?
SJ 여전히 불안정해요. 불안을 없애기보다는 얼마큼 잘 다스리는가에 무게 중심이 옮겨간 것 같아요. 환기할 수 있는 구멍들을 만들어두고, 불안을 온전히 느끼지 않을 만큼 스스로 수혈하는 방식, 그런 마음이 조금 생긴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