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2023 제복의 영웅들

2023.06.07신기호

6∙25전쟁 정전 70주년과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지큐>카메라 앞에 모였다.

국가보훈부는 작년, 6·25전쟁 72주년을 맞아 호국 영웅들을 위한 새로운 제복을 선보였다. 프로젝트는 <제복의 영웅들>이라는 이름 아래 캠페인으로 확장됐고, 6·25전쟁 참전용사 10명이 참여해 캠페인 전 과정을 함께했다. 제복의 디자인과 제작은 패션 디자이너 김석원이 맡았고, 새 제복을 입은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모습은 사진작가 홍우림이 기록했다. 이번 화보는 작년 <제복의 영웅들> 캠페인을 이어받아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모습을 새로 담는다. 기획은 73년 전, 이들에게 새겨진 시대의 상처가 다른 무엇도 아닌 이들의 천진한 미소로, 당당한 태도로, 유쾌한 모습으로 조금이나마 치유되고 희미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화보는 73년 동안 호국 영웅으로서 짊어져야 했던 무게와 책임을 조명하기 보다, 비로소 평온하고 화목한 현재의 초상을 채집한다. 이들의 존재는 퇴색될 수 없고, 여전히 유효하며, 또 자명하기에.

김기열 참전용사

김기열 참전용사는 6·25전쟁 주요 전투에 다수 참여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 3개를 수훈한 영웅이다. 1950년 당시, 김기열 참전용사는 이리농림학교 5학년이었다. 학도병으로 징집된 후 7사단 8연대 1대대 수색대원으로 배정받고 곧장 참전길에 오른다. “당시 인민군이 논산까지 밀고 와서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훈련은 커녕, 무기와 군복도 없이 후퇴하던 중에 구식 소총을 받게 됐습니다. 그 소총 한 자루 들고 영천지구전투, 자양전투, 낙동강 다부동 전투를 겪으며 부산까지 걸어갔죠.” 이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대구에서 평양까지, 하루 40킬로미터 이상을 꼬박 걸으며 10월 18일, 밤 9시에 평양에 입성한다. 이후 김기열 참전용사는 평남 순천을 거쳐 덕천을 지나 평안북도 회천까지 목숨을 걸고 북진했는데, 이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1951년 1월 4일, 1·4후퇴를 하게 된다. “후퇴하는 길에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10중으로 포위망을 펼쳐 오도가도 못하게 됐습니다. 당시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었지만 목까지 차오르는 평천강의 시린 강물을 거스르며 건넜어요. 얼어붙은 옷을 체온으로 녹여가면서 후퇴작전에 성공했던 때가 생생합니다.” 그 후에도 김기열 참전용사는 주요 전투에 모두 참전하며 북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당시 친구와 함께 팔에 독수리 문신을 새겼습니다. 아무래도 이 전쟁에서는 살아서 만나지 못할 테니, 둘 중 누가 죽더라도 이 문신을 보고 내 시신을 찾아다오, 하고요. 그런데 명줄이 긴지, 운이 좋은지 우리는 모두 전쟁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김기열 참전용사가 우리 세대에 전하는 이야기

저는 운이 좋지요. 여태 살아남아서 좋은 세상을 만났으니까요. 일제 강점기를 겪은 나의 부모님, 전쟁을 겪은 우리 세대. 그대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렇게 좋은 세상을 누리지 못하고 스러져갔습니다. 젊은 친구 여러분! 대한민국처럼 이렇게 좋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좋은 나라를 위해서라도 질서 잘 지키고, 나라를 사랑해주세요.

고융희 참전용사

고융희 참전용사는 인천상륙작전에서 팔미도 등대에 등불을 켜며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부대로 유명한 ‘켈로부대’ 출신이다. 고융희 참전용사에게 전쟁 당시의 상황을 묻자, 생생하게 기억해내며 담백하게 말한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거, 총 맞아서 죽어가던 거, 후퇴할 때 포위당했다가 정신없이 도망치던 거, 기억에 남는 건 다 그런거지 뭐.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개풍군 전투. 개풍군이 개성인데 그때 동료들이 아주 많이 전사했어. 그래서 잊을 수가 없어.” 고융희 참전용사는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한 건 후손들의 노력도 크다고 말하면서도, 켈로부대의 공을 기억해 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이북 땅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영종도 섬을 지켜낸 것. 절체절명의 순간, 결국 등대의 불을 켜낸 것. 모두 켈로부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인천에서는 지금도 켈로부대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기억해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켈로부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아직도 단단합니다.”

고융희 참전용사가 우리 세대에 전하는 이야기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한 건, 참전유공자들의 공도 있지만 후손들도 노력도 컸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성장한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렇게 옷까지 해주고, 또 그 옷을 입고 찍은 사진도 널리 알리고, 여러가지에서 의미가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님들, 동료들 만나서 기분도 참 좋았습니다.

김상유 참전용사

김상유 참전용사는 6·25전쟁과 월남전에 모두 참전한 대한민국의 영웅이다. 그는 1950년 헌병학교 11기로 교육받은 후, 1사단에 배치된다. 이후 보급계와 병기계, 수송대와 행정병까지 다양하게 보직을 발령받고 근무한다. 이후 마산에 헌병중대가 창설되고, 후방으로 배치 받는다. “사실 그렇게 후방 배치돼서 근무하니까 전투에 관한 기억은 많이 없어요. 교통정리나 운전, 행정, 보급 관리 등의 업무를 맡았죠. 다른 전우들, 참전용사들처럼 고생을 했어야 하는데, 저는 그에 비해 덜했어요. 함께 6·25전쟁을 보냈지만 맡았던 임무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전장에서 피 흘리며 싸운 다른 전우들 보기가 부끄럽습니다.” 겸공한 태도지만, 그는 누구보다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기억하는 군인이다. 그래서 그는 바란다. 무슨 할 말이 있겠냐만은 국가가 혼란했던 때가 지나고 이렇게 평화로운 시기가 와서 다행입니다. 그래서 항상 평화를 바라고요.”

김상유 참전용사가 우리 세대에 전하는 이야기

자부심보다도 현재를 살아가는 분들이 전쟁의 참상을 잘 모르고 외면하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섭섭합니다. 제가 얼마나 살지는 모르겠지만 6·25참전용사들을 위한 예우가 강화됐으면 좋겠어요. 특히 이번에 보훈처가 보훈부로 승격했으니, 많은 정책과 좋은 대안들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우리가 과거에 대한민국을 위해, 또 미래 세대를 위해 희생했으니 이런 참전용사들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보훈문화가 자리 잡힌다면 좋겠습니다.

김영환 참전용사

18살. 김영환 참전용사가 입대한 나이다. 그는 1·4후퇴 당시 인천에서 부산까지 걸어와 그 길로 입대한다. 입대하고 보니 선임은 22살이었다는 그의 회고에서 당시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8사단 16연대 3대대 소속이었는데, 백석산 전투에 참전했어요. 그 전투가 제일 기억이 나지. 백석산 피의 능선. 거길 그렇게 부른다고.” 김영환 참전용사는 그 백석산 전투에서 둔부에 총상을 맞고 후송된다. 이후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1년이 지난 1953년 6월 10일, 전상군경으로 제대한다.

김영환 참전용사가 우리 세대에 전하는 이야기

국가를 위해서 일했고 또 나라를 위해 충성했으니 보람은 남았지. 학도병으로 나가서 우리나라를 결국엔 지켜냈으니까. 이제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국가가 됐잖아. 모두 아주 고마워. 참, 여담인데 내가 예전에 모델도 지원했다고. 떨어졌지만. 하하! 근데 이제 모델 된 거 아니야? 이렇게 멋진 제복 입고 촬영했으니까. 영광이지, 영광이야!

류재식 참전용사

류재식 참전용사의 가슴에는 중공군의 총탄이 아직도 남아 있다. 1953년 7월 20일, 휴전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맞은 총상이었다. “갈비뼈가 8개 부러졌어요. 다행히 총알은 심장 직전에 멈췄고요. 군의관은 가는 길에 죽을 수도 있으니 후송 길이라도 편히 가라며 모르핀을 놔줬습니다. 그때 마산 병원에서 오늘 함께 촬영한 박옥선 간호장교를 만났어요. 덕분에 살아 남았죠.” 나라를 위해 싸우다 가슴에 총알까지 품게 만든 불사의 용기는 그를 다시 전장으로 이끌며 이후 월남전까지 참전하게 만든다. 

류재식 참전용사가 우리 세대에 전하는 이야기

전초진지에 틀어박혀서 싸웠습니다. 밤에는 진지 공사하고 해가 뜨면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의 반복이었어요.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소대장이건 분대원이건 할 것 없이 팬티만 입고 그랬죠. 그러다 전투가 시작되면 모두 두더지처럼 기어다니면서 싸우는데, 고개를 조금이라도 들면 총 맞아 죽고, 기어가다 포탄 맞아 죽고. 또 어떤 때는 산 속에서 마주보며 총구를 겨누고 있다가 어느 한쪽이 고개만 들었다 하면 바로 쏘는 거죠. 오줌 누려고 일어섰다가 총 맞아 죽고 그랬어요. 당시에 신문이 있어, TV가 있어. 전방에서 우린 아무 소식도 모르고 계속 싸웠어요. 우리 중대원 1백70명 중 단 7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너무 많은 젊은이가 죽었어요. 그 땅 한 뼘을 넓히려고, 또 지키려고 너무도 젊은 친구들, 나의 전우들이 산화됐습니다. 그런데 6·25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들 한다죠? 이렇게 피를 흘리고, 불구가 되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는데 잊혀지고 있다니 분통합니다. 우리나라 땅 어디를 밟아도 전쟁터가 아니었던 곳이 없어요. 우리 발 밑에 참전용사들이 묻혀 있습니다. 군번도 모르고, 이름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에요. 잔혹한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김경오 참전용사

김경오 참전용사는 ‘대한민국 최초 여성 공군 조종사’라는 우뚝한 타이틀을 가졌다. 예상가능하게도 그녀가 이 타이틀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몹시 험난했다.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도 18살에 거뜬히 시험을 통과해낸 그녀는 최초 15명이 입대한 교육 과정에서 혼자만 수료하며 공군 조종사가 된다. “여자라는 이유로 훈련도 심하게 받았지만 훈련이 강한만큼 나도 강해졌어요. 또 여자라는 이유로 조종을 못할 뻔했지만, 그런 편견과 차별을 이겨내고 비행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김경오 참전용사는 대구, 사천, 진주, 대전 등 비행장에서 비행장으로 기밀문서를 수송하는 임무를 받아 복무하다, 1956년 대위로 전역한다. 그녀는 지금도 “나라를 위해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는 것이 아주 자랑스러웠다”고 말하는 참군인이다.

김경오 참전용사가 우리 세대에 전하는 이야기

휴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부르셔서 “제대하고 미국으로 가서 선진국의 기술을 배워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라”는 말에 곧장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다시 돌아올 땐 ‘한국 유일의 여성 조종사’로 미국에서 후원을 이끌어내 경비행기를 한대 가지고 돌아와 항공대학에 기증했죠. 이후 저는 김영삼 대통령 후보에게 ‘사관학교에 여자를 뽑아 달라’고 건의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여자 공군 사관학교’가 생기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됐습니까? 사관학교에 여생도들이 많아졌어요. 참 잘 된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하늘을 지키기 위해서 후학을 많이 양성해야 한다는 것을 하루도 잊은 적 없습니다. 1997년, 공군사관학교에서 여생도를 뽑은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전투기 편대장 등 우수하고 귀한 여성 후배가 많이 생겼습니다. 기쁘게 생각합니다.

박옥선 참전용사

박옥선 참전용사는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곧바로 입대를 결심한다,피난길에 올랐는데 수원에서 인민군을 만났어요. 무차별로 사격을 해대는데 당시 피난민들이 정말 많이도 죽었습니다. 그야말로 시체가 산을 이루는 참혹한 모습을 보고 입대를 결심했어요.” 아버지는 입대를 결심한 딸을 막아 세웠지만 그녀의 각오는 단단했다. 아버지 꼭 가야합니다. 1년만 다녀오겠습니다, 했죠. 외동딸 걱정에 뒤돌아 눈물 흘리는 아버지를 보고 제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한 몸 희생했지만, 부모님에게는 불효를 한 것 같아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간호장교로 근무하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거든요.” 그녀가 기억하는 또 다른 아픔은 백마고지 전투의 참상이다. 야전병원으로 부상당한 병사들이 밀려들어오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고, 생생한 기억은 여전히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한번은 총알이 안면을 관통한 육군중위가 있었어요. 주변에서는 그 환자를 포기하자고 했지만, 우리 동기들은 꼭 살리자고 했죠. ‘네가 책임지고 살려라!’하는 말에 며칠을 밤낮없이 치료했어요. 중위의 얼굴을 완벽히 고치진 못했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생존해 계시죠. 참, 마산병원에서 류재식 참전용사를 만났어요. 가슴에 총을 맞아서 실려 왔죠. 그게 인연이 돼서 여태까지 참전유공자회를 함께 이끌고 있습니다.”

박옥선 참전용사가 우리 세대에 전하는 이야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보훈병원에서 일하면서 월남전 부상자들을 돌봤습니다. 그땐 6·25전쟁 환자, 월남전 환자, 4·19 환자가 병원에 한꺼번에 다 있었어요. 대한민국에 ‘전쟁’은 정말 끝이 없었죠.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이죠. 지금도 휴전중이잖아요. 지금도 저보다 더 몸이 불편하신 유공자분들을 위해 ‘6·25참전유공자지회장’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여러 매체에서 주는 출연료는 다른 분들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유공자분들을 모두 편안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2년전부터 파킨슨병을 겪고 있어요. 몸이 불편해서 촬영에 도움을 못 준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우리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잊지 않고 멋진 제복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종현 참전용사

1·4후퇴 피난 가는 길. 군인들은 보이는 남자들을 모두 징집했다. 그의 나이는 고작 16살.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사이, 대관령 전투에 끌려와 있었다. “처음에는 나이가 어리니까 군 보급품 관리를 하라고 했는데, 이후에 전투병이 모자라니까 군복을 입혀서 전투에 나가게 됐습니다. 동부전선을 따라서 양양, 속초를 거슬러 올라가다 지금의 휴전선 인근까지 북진하게 됐어요. 그때 한계령을 넘어가는데 인민군한테 우리 부대가 포위를 당했죠. 오랫동안 포위당한 탓에 굶어 죽게 생겼는데 미군이 비행기로 보급품을 떨어뜨려주더라고요. 그거 받아먹으면서 버텼습니다. 이후에는 치열하게 싸우며 포위망을 간신히 뚫고, 본부대대를 만나서 살았죠.” 그는 이후 지리산 무장공비 토벌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현역 군인 3명과 함께 한 조를 이뤄 수색작전을 펼쳤다. 보름이 넘게 눈밭에서 추위와 싸워가며 작전을 수행한 용감한 소년은 쉴 틈도 없이 금성전투에 투입되며 더 이상 소년이 아닌 군인으로,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한종현 참전용사가 우리 세대에 전하는 이야기

정말 목숨 바쳐서 싸웠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요. 또 우린 죽는다는 두려움도 없이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런 우리의 희생에 비해서 사회적인 대우가 허약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개인의 자유가 우선 시 되는 현대사회가 됐지만, 그 자유는 피를 흘리며 죽어간 전우들이 지켜낸 거예요. 우리 같은 노병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이재국 참전용사

피난 길, 팔공산 근처에서 천막을 치고 지내던 가족을 향해 사복을 입은 한 사내는 정보원에 지원할 사람을 찾았다. 정보원이 되면 너라도 살 수 있을거란 아버지의 말에 이재국 참전용사는 16살의 나이에 입대하게 된다. 그런데 막상 임무에 투입되어 보니, 적군 근처에서 활동하는 유격대였고, 군번도 없이 임무 수행을 지시받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무서워서 자꾸 울고 그러니까 그냥 집에 가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유격대에서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오니, 문경에서 특공대를 뽑는다고 해서 곧장 그리로 갔습니다. 공비를 토벌한다고 말이죠. 당시엔 곳곳에 무장공비들이 많았어요. 실제로 무장공비한테 습격도 받았죠. 공비토벌 작전에 나가서는 동상에 걸린 북한 여군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따발총 한 자루 들고 누비고 다닐 때죠.” 그렇게 16살에 전쟁을 겪은 이재국 참전용사는 유격대와 특공대에서 임무를 수행했지만 군번 하나 없이 임무를 수행한 탓에 탈영병으로 몰릴까 염려해 자진 입대한다. 전쟁으로 지워진 그의 10대다.  

이재국 참전용사가 우리 세대에 전하는 이야

전쟁을 처음 겪어봤습니다만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경험은 정말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두려움도 이겨낸 살고자 하는 의지로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 같아요. 우리 참전용사들이 더 명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포토그래퍼
    김형상
    주관
    국가보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