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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추럴 와인의 다음 주자 사케

2023.06.23김은희

맛 따라 멋 따라.

 “어? 나도 지금 일본인데.”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댓글이다. 코로나로 인한 국경 봉쇄가 해제되자마자 많은 사람이 앞다퉈 일본으로 떠났다. 인스타그램 피드도 어느샌가 일 본 여행에 대한 정보로 가득 찼다. 재미난 것은 일본에 관한 인기 키워드 중 하나는 “한국인은 모르는 맛집”이라는 사실이다. 여행지에서 자국민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욕망은 어쩐지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기묘한 느낌이 있다.

나도 일본은 신물이 날 정도로 다녔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는 물론, 일본 사람들조차 어디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의 시골까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탓에 나에게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출장은 조금 긴장했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의 출국인 탓도 있고, 이번 출 장의 결과를 반드시 성공적으로 가져가고 싶은 욕심 탓도 있었다. 내가 발굴한 새로운 사케들을 꼭 한국 시장에 소개하고 싶었다.

일본계 상사에서 10여 년간 일하며, 출장을 갈 때면 동네 이자카야에서 혼술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주로 찾는 곳은 단골 위주로 장사하는 허름한 가게였다. 정장을 차려입고 홀로 잔을 기울이는 이방인이 신기했는지, 동네 술꾼 오지상(아저씨)들이 이것저것 마셔보라며 참견을 했다. 그렇게 알게된 사케에 대한 지식이 제법 쌓였다. 정신 차려보니 결혼도 양조사와 하게 됐고, 술에 대한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술에 대한 애정 표현은 이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어느샌가 사케 수입 에이전트로 활동하게 되었다. 덕업일치. 덕후는 나만 알고 싶었던 것을 모두와 나누고 싶다는 소명 의식을 가질 때 진화한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시장을 뜨겁게 달군 내추럴 와인 열기는 조금씩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누군가는 위스키, 누군가는 전통주에 주목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 주류 시장은 기존의 소주냐 맥주냐의 이분법을 벗어나 다양성을 중심으로한 제3지대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모두가 일본에 열광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내추럴 와인의 바통을 이어받을 주자 중 한 명으로 사케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내추럴 와인의 다음 주자로 사케를 기대하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와인 메이커는 본질적으로 농부다. 그해의 작황에 따라 술의 품질이 크게 좌우되는 것은 그들에겐 자연의 섭리다. 포도밭의 지력을 꾸준히 가꾸고 보다 나은 포도를 재배하기 위해 아무리 애쓴다 해도, 하늘이 외면하면 소비자 또한 기대와 다른 술을 마시게 될 운명에 놓인다. 반면 사케 양조장은 농업보다는 제조업의 정체성을 가졌다. 매해 다른 품질로 생산되는 쌀을 가지고 매년 최대한 비슷한 맛의 술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와인처럼 그레이트 빈티지를 만나는 기쁨은 없겠지만, 소비자로서는 같은 맛의 술을 매년 마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요즘처럼 불확실성이 높은 시대에 이런 항상성의 즐거움은 가치가 크다.

이번 출장은 기차 이동만 대략 1천 킬로미터 이상, 하루 평균 3시간씩 일주일을 이동해야 하는 강행군이다. 방문 약속을 잡은 양조장은 총 네 곳, 선별한 기준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변혁의 가능성을 품은 헤리티지.” 일본의 주류 시장은 한국과 닮은 구석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 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처럼 일본 사람들도 정작 사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가장 많이 마 시는 술은 맥주. 사와 또는 츄하이로 대변되는 혼성주가 그 뒤를 잇는다. 전체적인 주류 소비량은 30년 가까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술에 대한 시장의 니즈를 충족시키고자 보다 젊은 감각의 라벨과 브랜딩으로 승부하려는 양조장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 또한 한국과 비슷하다. 모두가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상황에선 무엇이 새롭고 무엇이 새롭지 않은지가 모호해진다. 헤리티지는 그것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다. 전통이라는 형식에 매몰되어 동시대성을 잃는 것도 문제지만, 시류에 휩쓸려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전통 또한 매력적이지 않다. 헤리티지를 바탕으로 확장하려는 변혁의 시도가 있을 때, 전통은 생명력을 잃지 않고 계속 계승될 수 있다.

스기노모리 杉の森 브루어리는 그 좋은 예다. 이 양조장이 위치한 나라이주쿠는 예로부터 교토와 에도(지금의 도쿄)를 잇는 길목 중간의 민박촌이 었다. 전통 건축물 보존 구역으로 지정된 약 2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의 경관은 번 성했던 과거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스기노모리의 술은 사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련된 섬세함이 매력이다. 경쾌한 미탄산에서 이어지는 달콤함과 감칠맛의 부드러운 조화는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졌다. 일본 사케 산업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지역사회와의 강한 연결성이다. 지역에서 생산한 쌀로 술을 만들고, 지역민들은 그 술을 마신다. 아무리 전국적으로 인기를 끄는 큰 양조장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위치한 지역에만 한정해서 유통하는 저렴한 술을 반드시 만든다. 그것을 지역사회에 대한 보은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효 고현의 후쿠니시키 富久錦 양조장이 그렇다. 효고는 오래전부터 곡창지대로 유명했다. 근대화 이전의 일본에서는 이 지역의 술이 가장 인기가 있었고, 지금도 일본에서 사케 생산량으로는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다. 이 양조장의 술은 전국적인 유명세는 없지만 지역민에겐 친숙한 얼굴이다. 택시에 올라 주소를 말하니 기사님이 제일 좋아하는 술이라 말한다. 풍성한 쌀 내음과 감칠맛이 매력적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시장을 달군 내추럴 와인의 열기가 조금씩 이동 중이다. 뻗어나가는 줄기 사이 분명한 것은, 개인의 미식에 따른 다양성이 구심점이 되어 제3지대로 향하고 있다는 것.

술 빚기의 신도 만났다. 이시카와현 石川県에 위치한 노구치나오히코 연구소 農口直彦研究所는 이번 출장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이곳을 이끄는 토우지(杜氏, 헤드 브루어) 노구치나오히코는 올해 아흔 살. 일본 최고령 토우지다.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데도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는 노구치 토우지는, “니혼슈 日本酒의 신”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한 잔만 마셔도 온몸이 새빨개질 정도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체 조건을 가지고도 ‘신’으로 칭송받기까지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일본 사케 산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컬러 텔레비전과 신칸센의 보급, 고속도로의 발달이 불러온 유통 혁명 등, 세상의 발전에 따라 격변하는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스스로의 기술과 신념을 갈고 닦아온 장인의 발자취는 이 산업에 몸담은 후대의 사람들에겐 어두운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양조장에서는 쌀로 술을 빚으니 밥 굶을 걱정은 없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열여섯 나이에 양조사가 된 그, 70년이 넘는 세월을 술을 빚어왔음에도 여전히 양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진정한 대가만이 보일 수 있는 자신감 넘치는 겸양. 그의 술은 청주 치고는 아주 높은 19도 정도의 도수를 가졌지만 놀라울 정도로 알코올 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볍고 절제된 감미와 풍부한 산미의 균형이 뛰어나다. 어 떤 음식과 먹어도 조화롭다. 달리 더 나은 감탄사가 떠오르지 않아 “과연 신이 빚 은 술인가 싶습니다” 하고 찬사를 건네니 돌아오는 말이 단호하다. “신이니 부처 니 하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이렇게 눈을 번뜩이는 신도 있답니까? 나는 열심 히 내 술을 만들고 있는 것뿐이에요.”

미식은 지금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맛있는 음식과 술에 대한 열망은 가장 보편적이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솔직한 욕구다. 그런데 무엇이 미식인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제법 철학적인 질문이 된다. 서울대학교 푸드비즈니스랩의 문정훈 교수는 미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식은 식재료의 다름을 이해하고 그 다름을 즐기는 데서 출발하는 문화적 행동이다. 미식의 방향은 한 곳을 가리키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발산한다. 즉, 미식이냐 아니냐는 셰프나 레스토랑에 의해 결 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섭취하는 소비자에 달려 있다”.

이번 출장에서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미식의 방향을 확장하려 애쓰는 이들이었다. 남들은 아직 모르는 즐거움을 내가 한입 먼저 맛보고 왔다. 에이전트 일의 묘미는 이런게 아닐까? 앞서 언급한 술 모두 곧 한국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같이 즐거워할 사람들이 늘어나 기쁘다. 성공적인 출장이었다.

이창협 이쁜꽃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