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 위스키와 어떤 순간들.
부쉬밀 싱글 몰트 21년ㅣBushmills Single Malt 21 Year Old
오렌지 껍질같은 달콤쌉싸름한 향이 잠든 코를 간지럽힌다. 보드라운 실크 커튼처럼 혀를 스쳐가는 텍스처, 달콤하고 드라이한 맛, 한 방을 남기는 감초의 발자국. 부쉬밀 21년은 올로로 소 셰리 캐스크, 버번 캐스크에서 19년 동안 살다가 마데이라 캐스크로 옮겨 2년을 보낸 결과다. 스무 살은 아직 서툴고, 스물한 살쯤 되니 이제 좀 어른이 된 것 같은 건 술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일까. ABV 40퍼센트, 70만원대.
퍼컬렌 싱글 몰트 18년ㅣFercullen Single Malt 18 Year Old
잔잔한 수면 위에 이따금 피어나는 젖은 바람처럼 바닐라, 꿀, 건포도의 향이 우아하게 피어난다. 마른 입 안을 살짝 적실 정도만, 성찬식 하듯 경건하게 털어 넣은 퍼컬렌 싱글 몰트 18년은 나를 어디론가 부드럽게 이동시킨다. 빠르게 스치는 팔레트에는 사과와 포도같은 기분 좋은 산미도 있고, 잘 익은 복숭아 같은 조화로움도 있고, 버터 비스킷 같은 진한 단맛도 있다. 그리고 풍성하고 길게, 넛맥은 매콤함을, 곡물은 고소한 맛을 남기고 간다. 거기다 물을 몇 방울 섞으면 스파이스와 건과일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현현한다. 위클로 산맥의 화강암 사이를 유영하면서 천연 필터링된 물이 술이 되어 내 안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공짜로 여행한 기분. ABV 43퍼센트, 33만원.
디 아이리시맨 싱글몰트ㅣThe Irishman Single Malt
더운 나라의 휴양지가 은은하게 춤춘다. 오렌지, 구운 파인애플, 살구, 복숭아, 그야말로 소년 소녀의 홍조 같은 향기. 맛은 좀 더 본격적이다. 과일 그 자체라기 보다는, 살구잼, 캐러멜에 푹 담근 과일처럼 달콤하고 정겨운 맛. 그러고는 산뜻한 스파이시와 단맛으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을 톡 섞으면 더 힘차게 과실 향과 보리의 고소함이 피어오른다. 물 몇 방울, 얼음 몇 알에도 이 술은 즐겁다. 전통 방식을 따라 세 번 증류하고, 버번 캐스크,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에서 시간을 보냈다. ABV 40퍼센트, 10만5천원.
라이터즈 티얼즈 더블 오크ㅣWriters Tears Double Oak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브램 스토커···. 19세기 말~20세기 초는 아일랜드 작가들의 황금기이자, 아이리시 위스키의 전성기였다. 그들의 타자기 곁에 늘 놓여 있었을 것이 분명한 아이리시 위스키를 이 시대의 방식으로 재현했다. 라이터스 티얼즈 이야기다. 버번 캐스크, 프렌치 코냑 오크 캐스크에서 시간을 보낸 라이터즈 티얼즈 더블 오크는 콧속 깊은 곳까지 전진하는 힘찬 시나몬, 바닐라 향에 한번 취했다가,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복숭아 소르베 같은 상큼함에 다시 취한다. 테이스트는 더욱 우아하다. 청사과, 포도 같은 풋풋함과 코냑 같은 우아함이 공존하니 나이 들어도 멋진 프랑스 여배우 같다. 강렬하게 들어와선 의외로 부드럽게 돌아선다. 니트로도 좋지만, 민트 줄렙으로도 근사하다. 더블 오크 45밀리리터, 민트 잎 10장, 설탕 시럽 15밀리리터와 사각 얼음 몇 알이면 충분하다. ABV 46퍼센트, 11만5천원.
맥코넬스 아이리시 위스키ㅣMcConnell’s Irish Whisky
북아일랜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1776년에 문을 연 맥코넬스. 아이리시 위스키임에도 ‘Whiskey’가 아닌 ‘Whisky’로 표기하는 배짱은, 스펠링 논쟁이 일었던 1800년대 후반보다 앞서 이미 존재했던 브랜드라는 자부심에서 왔다. 퍼스트필 버번 배럴에서만 5년 숙성한 결과는 침착하게 우아하다. 처음 코에 대면 언뜻 포도와 시트러스 과일 향이 감지되고, 바닥엔 바닐라의 따뜻함이 잔잔하게 깔려 있다. 복숭아 등 핵과류의 침착한 산미, 바닐라와 버터 스카치의 나서지 않는 단맛, 순서를 기다리는 후추의 캐릭터가 모두 조화롭다. 스페이사이드 위스키가 연상되는, 비기너도 애호가의 데일리 위스키로도 좋은 말하자면 호불호 없는 맛을 낸다. 니트로도 좋고, 아이리시 티로 만들면 찬바람 부는 가을밤에도 좋다. 레시피는 위스키 35밀리리터, 레몬주스와 레몬그라스 시럽 각 10밀리리터, 뜨거운 물 120밀리리터. ABV 42퍼센트, 8만9천원.
딩글 싱글 몰트ㅣDingle Single Malt
잔에 따르기도 전에 향이 저만치에서 예고 없이 걸어온다. 상큼한 박하, 라임, 조린 배, 복숭아잼 같은, 이를테면 봄과 여름 같은 향기. 글랜캐런 잔에 코를 깊숙이 박고 잔을 내 쪽으로 기울이면 이번에는 계절이 이동한다. 핫 토디 잔 바닥에 꾸덕하게 굳은 설탕과 함께 남아 있는 사과를 닮은 맛, 은은한 바닐라에서는 가을의 맛이 난다. 꿀에 절인 생강같은 피니시에선 영락없이 겨울이 떠오른다. 밖은 추운데, 우리를 둘러싼 공기는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겨울의 안쪽 풍경. 나이트 캡으로 홀짝홀짝 마시다가 머리 맡에 두고 자면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은 위스키다. 2012년, 아일랜드에서 1백여 년 만에 처음 탄생한 독립 증류소 딩글의 코어 위스키인 딩글 싱글 몰트 ABV 46.3퍼센트, 9만원대.
웨스트콕 버번 캐스크ㅣWest Cork Bourbon Cask
힘찬 기포를 가진 창, 싱하 탄산수에 웨스트콕 블렌디드 위스키를 섞는다. 거기다 오렌지 필로 짠 오일 몇 방울. 웨스트콕 버번 캐스크를 마시면 오래전 할머니가 깎아준 사과도 떠올랐다가, 베를린에서 한낮에 마신 사이더의 풍경도 떠오른다. 그레인 위스키 75퍼센트와 몰트위스키 25퍼센트로 블렌딩했다. ABV 40퍼센트, 4만5천원.
리마바디ㅣLimavady
반전 없이도 강렬한 영화. 말린 무화과와 건자두, 둘의 조합에 따분함을 지우는 조연 시트러스 향이 등장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선 뒤엔, 티저로 파악한 뉘앙스가 폭넓고 드넓게 펼쳐진다. 오, 셰리! 버번 배럴에서 숙성한 뒤 PX 셰리 캐스크에서 피니시한 술의 역사는 이 보틀 안에 성실하게 담겨 있다. 달콤하고 달콤하고 또 달콤하지만, 그러나 지루하지는 않은 리마바디는 술 장에서도 꺼내기 좋은 위치에 놓고 싶다. 구운 고기, 로스트 비프, 디저트와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최초이자 유일의 싱글 배럴 아이리시 위스키 리마바디 ABV 46퍼센트, 10만원대.
레드브레스트 12년ㅣRedbreast 12 Year Old
발아되지 않은 생보리와 몰트를 혼합했다고 하더니, 과연 위스키 애호가에게도 생경한 결과물이 내 앞에 있다. 레드브레스트 12년. 보리와 맥아가 뒤섞여 배, 사과, 혹은 레몬 같은 싱그러운 향을 버블처럼 뿜다가, 입 안으로 들이는 순간 곡물 캐릭터는 더 구수하고, 과실은 더 산뜻해진다. 보리밭 옆 사과나무에서 한 바람에 향이 꽃다발처럼 실려오는 기분이랄까. 무모한 도전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1800년대 아이리시 위스키 제작 방식을 그대로 재현한 결과란다. ABV 40퍼센트, 12만원.
제임슨 블랙 배럴ㅣJameson Black Barrel
제임슨 블랙배럴을 오픈했더니, 볼륨감 있는 셰리와 버번 캐릭터의 향이 높은 파도처럼 들이친다. 두 번 탄화한 버번 배럴에서 숙성한 시간으로부터 오는 강렬함일까. 거칠 줄 알았는데 실크처럼 보들보들한 텍스처로 셰리의 바다가 넘실거린다. ABV 40퍼센트, 5만8천원.
킬베간ㅣKilbeggan
향으로부터 싱그러운 과일 맛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캐러멜 팝콘인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캐러멜에 담근 복숭아에 가까웠다는 유쾌한 배신극. 그런데 이것도 썩 나쁘지 않다. 니트, 온더록, 하이볼로도 제법 괜찮은 기량을 뽐낸다. 두 번 증류 후 버번 캐스크에서 최소 4년 이상 숙성한 것 치고는 훌륭한 가성비. ABV 40퍼센트, 5만원대.
버스커 트리플 캐스크ㅣThe Busker Triple Cask
달콤한 향으로부터 이어지는 달고나 같은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단맛. 잔잔하게 마무리되는 엔딩 크레딧. 버번 캐스크, 셰리 캐스크, 마르살라 캐스크에서 숙성한 버스커 트리플 캐스크는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어디든 떠나고 싶다. 캠핑에선 하이볼로, 목욕 후엔 얼음 몇 알 넣어서 온더록으로, 잠이 오지 않는 가을 밤에는 나이트 캡으로. 흥청망청 마셔도 부담 없으니까. ABV 40퍼센트, 3만9천9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