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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코세이지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찾아야만 해요”

2023.12.14김은희

이제 여든. 이 전설적인 감독은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창의적인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며 앞으로 남은 모든 도전, 그리고 기회에 생을 소비하고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수년 동안 스스로에게 물어왔다. “내가 늙으면 어떻게 될까?” 어렸을 때 천식으로 자주 아팠던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과로와 운동으로 약해진 심장 때문에 30대의 좋은 시절을 꽤 오래 고생하며 보내야 했고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까지 가기도 했다. 죽음은 그의 삶, 그중에서도 특히 폭력적이고 갑작스러운 결말의 방대한 기록인 그의 영화에서 항상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 반복되는 질문은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 질문이란 이러했다. 내가 늙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더 깊은 곳이 있을까?

11월이면 스코세이지는 여든한 살이 된다. 1967년, 데뷔작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 Who’s That Knocking At My Door>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작품 활동을 중단한 적이 없다. 그는 중독, 네 번의 이혼, 비평적 및 상업적 실패,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열세 번의 고배(그리고 한 번의 수상)를 겪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그동안 훌륭한 장편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지만, 일부만 읊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온다. <비열한 거리 Mean Streets>, <이탈리안아메리칸 Italianamerican>,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라스트 왈츠 The Last Waltz>, <분노의 주먹 Raging Bull>, <좋은 친구들 Goodfellas>, <카지노 Casino>, <노 디렉션 홈: 밥 딜런 No Direction Home>, <디파티드 The Departed>,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사일런스 Silence>,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디너 파티에서 흥미로운 주제로도 올릴 만하다. 1970년대 이후 스코세이지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까지 각 10년 최고의 영화를 만들었나? 아마 아닐 수도 있지만(개인적으로는 이번 세기 첫 10년의 커리어가 가장 약한 것 같다),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자신이 재능이 있는지 그리고 그 재능이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나이가 들면 이 재능이 다른 무언가로 발전할 수 있을지 항상 궁금했어요. 내가 늙으면 말입니다. 뭐가 됐든 계속 발전할 수 있을까? 똑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을까? 그리고 같은 영화를 만든다면 그게 나쁜 걸까?”

얼마 전 스코세이지는 신작 <플라워 킬링 문 Killers Of The Flower Moon>(이하 ‘킬링 문’)을 앉아서 끝까지 시청했다. 그는 1920년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오세이지족 사이에서 일어난 미스터리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자 데이비드 그랜의 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을 2017년부터 구상해왔다. ‘킬링 문’은 20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데, 이는 시나리오 작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즘 들어 스코세이지에게, 시간을 내어 머리를 비우고 매일 마주하는 수많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좀 있었어요. 사람들이 말하듯이 저는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고, 가족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전 영화의 전체적인 걸 봐야 했고 믹스를 확인해야 했죠.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렸어요. 이걸 어떻게 다 해내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집중할 수 있을까요?”

그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영화를 봤어요.” ‘킬링 문’은 사랑과 속임수, 탐욕에 관한 영화에 대한 길고 불안한 꿈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삼촌을 만나기 위해 오클라호마주 오세이지 카운티로 돌아온 불성실한 참전 용사 역을 맡았다. 최근 발견된 석유 덕분에 오세이지 사람들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 속했다. 시간이 지나 디카프리오의 캐릭터는 릴리 글래드스톤이 연기한 오세이지 여성과 결혼한다. 그리고 오세이지족은 죽어가기 시작한다. ‘킬링 문’은 폭력적이고, 슬프고, 분노를 자아내며, 때로는 매우 웃기기도 한다. 말하자면 스코세이지 영화인 만큼 스코세이지는 이 영화에 푹 빠져들었다. 그는 어떻게든 한 번 더 무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게 현실이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2017년부터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니 6년 정도 됐거든요. 이 프로젝트와 함께 살았죠. 그냥 뭔가가 있었다고나 할까···. 그냥···, 전 이걸 좋아했습니다.”

스코세이지는 맨해튼 미드타운의 한 건물, 망한 것처럼 보이는 부동산 대출 업체와 같은 층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데, 복도에는 빈티지 영화 포스터가 늘어서 있고 직원 몇 명이 조용히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사무실 주방에 앉아 스코세이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데,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한 분이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티를 따라 주러 들어왔다. 스코세이지의 오랜 편집자이자 아카데미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셀마 스쿤메이커 Thelma Schoonmaker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스코세이지와 함께 사용하는 편집실로 돌아갔다. 벽에는 스파이크 리의 1983년 졸업 작품인 영화 <조의 이발소 Joe’s Bed-Stuy Barbershop: We Cut Heads>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스파이크 리가 은색 잉크로 이렇게 적은 사인본이다. “마티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

스코세이지는 파란색 스포츠 코트를 입고 내가 살면서 여태 본 것 중 가장 큰 선글라스를 낀 채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요.” 그는 이틀 전 응급 치과 수술을 받았다. “말하자면 속임수 같은 시술이었어요. 안 그랬으면 치아가 두개골까지 갔을걸요.” 콤팩트 디스크를 한아름 안고 있는 그에게 누군가 물었다. “지금도 통증이 있으세요?”. “그럼요!” 스코세이지는 능청스러운 춤을 추며 말했다. 우리는 그의 사무실에 앉았다. 새하얀 셔츠에 슬랙스, 갈색 로퍼를 신은 그는 매우 불편한 상태에서도 활기찼다. 대화 초반에는 대부분 서 있었고, 한번은 소파에서 갑자기 뛰어올라 나도 따라 일어섰다. 그랬더니 그는 진지하게 헷갈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디 가세요?”

창문 너머로 퀸즈보로 다리 Queensboro Bridge를 오가는 차들이 마을을 드나들고 있다. 스코세이지는 말이 많기로 유명하지만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한다. 아마도 이곳에서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어린 시절의 유산 때문일 것이다. “저는 바워리 Bowery(역자 주: 뉴욕의 거리. 과거 싸구려 술집과 여관이 모여 있었다)에서 자랐습니다. 마치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았죠.” 오늘날까지 스코세이지는 <택시 드라이버>의 길모퉁이에서 싸우는 남자들, <뉴욕, 뉴욕>의 오프닝 장면에서 수백 명의 엑스트라 위로 미끄러지는 카메라, <에비에이터>에서 분주한 영화 세트장을 걷는 디카프리오 등 주어진 프레임에 놀라운 양의 인간 군상의 삶을 담아내는 데 성공해왔다. ‘킬링 문’에도 이러한 유형의 장면이 가득하다. 인파를 헤치고, 군중을 뚫고, 가족으로 가득 찬 집을 탐색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여러모로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의 관점, 즉 액션의 바로 바깥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스코세이지에겐 항상 집 안에 틀어박혀 영화만 보고 간접적으로만 삶을 경험한다는 오해가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스코세이지는 고립된 어린 시절의 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영화를 보게 된 건 천식이라는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된 거였어요.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와 관련이 있는,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는 ‘외로움’에서 비롯되었어요. 부모님은 저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저를 영화관에 데려갔죠.”

지금까지도 품고 있는 외로움이라···. 그의 아내 헬렌 모리스 Helen Morris는 수년 동안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스코세이지는 말한다. “집에서 제 개인적인 삶에 많은 것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디너 파티 같은 걸 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훨씬 줄어들고 있지요. 저는 거의 혼자예요. 그리고 사람들과 만난다 하더라도 일 관련된 것들뿐이니까요.” 스코세이지는 요즘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이별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몇 주 전에 바로 여기서 오랜 친구를 만났어요. 1970년부터 알고 지냈는데 몇 년 동안 못 본 사이였죠. 하지만 그녀가 떠날 때까지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채 10분 정도 서로를 껴안은 채 꽉 붙잡고 있었어요. 더 말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좋은 것이기도 해요. 범위가 좁혀진다는 거니까.”

스코세이지에게는 세 명의 딸과 두 명의 손자가 있다.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죠. 하지만 제가 궁금한 것은 어디에 잘 어울리냐는 것입니다.” 스코세이지에게 ‘어디’란 기본적으로 일터라는 의미다. “저는 제가 만들고 있는 영화와 그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스코세이지는 아직 30대에 불과했을 때 <비열한 거리>, <엘리스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 Alice Doesn’t Live Here Anymore>, <택시 드라이버>, <분노의 주먹>까지 약 7년 동안 최고의 영화 서너 편을 연출했다. 1970년대 후반, 거의 죽음으로 종결할 뻔했던 한동안의 파티와 방황으로 잃어버린 집중력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선명함 덕이었다. “<라스트 왈츠>를 찍을 때 로비 로버트슨이 아예 제 집으로 (살러) 들어왔고,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도 속하지 않았죠.” 더 밴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라스트 왈츠>를 만든 건 그가 밴드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나온 걸까? “그 마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어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라이프스타일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 많은 부분이 파티와 관련되어 있어요. 저는 파티가 너무 힘들었어요.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하지만 파티에 가고 싶었어요. 깊이 들어가보고 싶었죠. 제가 어디로 가게 될지 보고 싶었죠. 다행히도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작품에서 순수성과 집중력이 사라졌다. “(다른 것들로부터)영향을 받을 수 있는 시기였죠. <비열한 거리>를 찍을 때는 마음이 편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리고 <비열한 거리>는 성공했죠. ‘앨리스’도 어느 정도는 성공했고 <택시 드라이버>도 확실히 성공했고요. 이 역시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후로 비평가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걱정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그것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가 빠져든 수렁과 약점은 제 작업 방식을 바꾸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 시도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했어요. 결국 모든 것은 <분노의 주먹>이 되었습니다. 나한테서 떨어져. 마음에 안 들면. 난 어쩔 수 없어. 떠날 거야. 그러곤 떠났어요.” 하지만 <분노의 주먹>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스코세이지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수년간 고군분투하면서, 때로는 별로 만들고 싶지 않은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스코세이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정확히 해냈던 초창기의 명확한 집중력이 다시 돌아온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말한다.

여든 나이에도 스물다섯이나 서른다섯 살 때와 같은 느낌이 들까? 아니다. 스코세이지가 답한다. 전혀. 완전히 달랐다. 스코세이지는 “그저 여든 살이 된 경험”이라고 말했다. “인생을 경험하고 가족을 갖는 것···, 젊은 시절과 지금이 다릅니다. 가족 상황도 달라졌고요. 태어난 첫날부터 제가 육아를 도운 아기가 있다는 사실은 그 이전의 두 딸을 키울 때와는 달라졌다는 말이지요.” 스코세이지와 모리스의 결혼은 다섯 번째이며, 두 사람의 딸 프란체스카는 최근 스물세 살이 되었다. 스코세이지는 말한다. “그 전에는 결혼은 거의 곧바로 파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모두 아주 가까운 사이이지만, 여전히 그때가 그립습니다. 그 시절이 그리워요. 그들이 아니라 제가 넘어졌어요. 그리고 네, 가족이 죽어가는 것도요. 부모님, 동생,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고 사촌 두 명 정도만 남았을 거예요. 저희 어머니는 일곱 남매를 두셨어요. 아버지는 여덟 남매를 두셨고요. 그리고 그분들에게도 자녀가 있었죠. 모두 사라졌어요. 모두 사라졌다고요. 그게 뉴욕 갱들의 종착지예요. 길거리에서 싸우다가 묻히고 무덤에 풀이 자라는.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건물이 들어섰죠.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겪은 모든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스코세이지는 우리가 알 법한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해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고군분투하다가 인생이 끝났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냐는 생각이 들 거예요. 그 의미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냥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살지 않기로 했다면, 살지 않는 걸 선택하겠다면, 그건 당신 마음이죠. 하지만 우린 존재하고 있고, 이 존재함과 함께 살아 있는 거예요. 저는 그게 변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제가 원하지 않으면 카메라를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그냥 더 이상은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스코세이지는 당시 셀마 스쿤메이커와 함께 영화감독 에머릭 프레스버거 Emeric Pressburger와 마이클 파월 Michael Powell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었는데, 두 사람은 초기에는 스코세이지의 영감이자 우상이었다가 나중엔 친구이자 멘토가 되었다.(스쿤메이커는 1990년 파월이 사망하기 전 파월과 결혼했다.) 스코세이지와 스쿤메이커는 영화 클립의 길이가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이게 맞는 장면일까? <북위 49도선 49th Parallel>부터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I Know Where I’m Going!>까지 모두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스몰 백 룸 The Small Back Room>, <저주의 카메라 Peeping Tom>, <여호 Gone To Earth>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잠깐, 왜 이 이야기를 내게 하는 걸까? 스코세이지는 무언가를 둘러싼 고유의 이야기 방식이 있다. 두 번, 세 번 되풀이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말하기도 한다. 그는 모든 영화, 모든 감독,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과 관련된 개인적인 사소한 것까지 인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아, 맞다. 영화는 꼭 선형적이어야 하나? 스코세이지는 처음부터 시작해서 ‘거기‘까지 갔을 때 끝나는 방식에 늘 알레르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저는 직선적인 스토리텔링을 싫어합니다.” 물론 그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감독들 중에는 이렇게 하는 감독도 있다. 라울 월시 Raoul Walsh, 킹 비도르 King Vidor, 마이클 커티즈 Michael Curtiz 등. 스코세이지는 “그들을 존경하지만 저는 그들 중 한 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종류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매료된 채로 성장했다. 존 카사베츠 John Cassavetes, 스탠 브래키지 Stan Brakhage, 셜리 클라크 Shirley Clarke, 프랑스와 영국의 뉴 웨이브 신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영화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감독들 말이다. 앤디 워홀! “워홀은 영화의 문법을 재정의했거나 재정의하려고 노력했습니다”라는 것이 스코세이지의 정의다. “그래서 워홀은 <수면 Sleep>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한 남자가 5시간 동안 잠을 자는 내용이죠. 단 한 번에 촬영했어요. <수면>이 대단한 영화라는 말은 아닙니다. 영화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흠, 어디까지 이야기했던가? 그렇다, 우리는 다른 많은 영화처럼 함축된 에피소드적 구조를 가진 작품 ‘킬링 문’ 때문에 영화가 어떻게 구성되거나 해체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러티브는 줄이고, 분위기는 살리고, 일화나 장면, 캐릭터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 스코세이지는 ‘킬링 문’에 대해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촬영을 시작하면서 그 안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세계를 표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이 영화를 반쯤 봤을 때 ‘잠깐, 내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지?’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냐고? 악한 인간들. 스코세이지 감독이 말하는 ‘킬링 문’은 사랑과 권력, 배신, 백인 우월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다른 사람의 땅에 들어와서 조직적인 폭력으로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백인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다. “제가 느낀 것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모든 사람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모두가 그런 거라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인으로서 우리도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죠.” 스코세이지는 자신이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을 상상한다. “저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부끄러워할까요? 아무것도 못 본 척할까요?”

마피아, 케네디 가문, 인권운동가 지미 호파 Jimmy Hoffa, 그리고 지난 세기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준 범죄 요소에 대한 영화 <아이리시맨>이 미국에 관한 이야기인 것처럼, 그리고 특정 종류의 끊임없는 탐욕과 자기 발명에 관한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미국에 관한 이야기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킬링 문’도 미국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스코세이지의 영화에서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이야기인 <비열한 거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리 부자가 되는 것.’

미국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실상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다. “뭐 하나 말해줄까요? 1950년대 뉴욕의 가톨릭 교육과 가톨릭 학교에 몰입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스코세이지는 학교에 가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형도 자기 할 일을 하고 거리의 다른 애들도 자기 일들을 하고 있었어요. 저도 학교에서 친구를 좀 사귀었죠. 하지만 나중에야 이해한 건, 제 생각엔, 그들이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꼭 수녀님들만 그런 건 아니고요. 몇몇 신부님, 특히 제 멘토였던 프란시스 프린시페 신부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스코세이지는 프린시페 신부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곤 한다. 한때 신부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교회에 관심을 갖게 해준 사람이 바로 프린시페 신부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해준 것 중 하나는 최초의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고, TV에서 처음 방영되었다는 것이었어요. 제 기억에 수상작은 <워터프론트 On The Waterfront>나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였던 것 같아요.(실제로는 <지상 최대의 쇼 The Greatest Show On Earth>가 최초의 수상작이고, <워터프론트>와 <지상에서 영원으로>는 그다음 해에 수상했다.) 그리고 스코세이지가 집에서 TV로 보던 시상식에는 거대한 오스카상이 무대에 걸려 있었다. “한 3층 높이 같았어요. 다음 날 프린시페 신부님을 제외한 모두가 신이 나서 학교에 왔어요. 신부님은 “텔레비전에서 그 장면 보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린이 모두는 멀뚱히 서로를 쳐다봤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몰랐어요. 신부님은 “저것이 바로 골든 아이돌”이라고 하셨죠. 신부님이 직접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그것은 몰록(Moloch,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지역의 신. 사람들은 어린이를 제물로 바쳐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이었어요. 성공이라는 신을 섬긴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연결된다는 걸까? 스코세이지가 말을 잇는다. “그런 것들이 저를 사로잡았어요. 로드 설링 Rod Serling이 쓴, 이후 영화로도 제작된 <패턴스 Patterns>라는 TV 프로그램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배우 밴 헤플린 Van Heflin이 출연한 영화 <패턴스>에서는 그가 새 건물의 로비로 걸어 들어가 직장에 첫 출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시기는 이그제큐티브 스위트의 시대이기도 하지요. 미국의 기업 생활, 말하자면 미국의 기업 전쟁을 다룬 이 두 영화는 어렸을 때 저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나중에 스코세이지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디카프리오의 캐릭터가 처음으로 직장에 출근할 때 <패턴스>에 나오는 것과 같은 로비를 촬영했다. “<12명의 성난 사람들 12 Angry Men>과는 다른, 서로를 찢어발기는 두 남자의 모습은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처음 알 수 있는 계기”였다고 스코세이지는 설명한다. 미국은 영화이고 탐욕이었으며 금지된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였다. 돈과 경쟁, 폭력이 난무했다. 스크린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카데미 동상이었다. “저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겨우 열한 살, 열두 살, 열네 살인 사람요. 모든 게 형성되고 있는 시기이죠.”

당시 그의 동급생 중 마틴 스코세이지를 뛰어넘은 사람은 없었고, 스코세이지 역시 성직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상관없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전 여기에 있어요.” 어쩌면 현재 생존한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일지도 모른다. “로마로 가진 않았잖아요.”

마틴 스코세이지에 대한 특이한 사실은 그가 실제로는 영화 제작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웃기려고 하는 얘긴 아닌데, 하여간 문제는 정말 일찍 일어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코세이지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동안 “늦게까지 TV를 보거나, 늦게까지 책을 읽거나, 늦게까지 숙제를 하거나, 늦게까지 대본을 써보려고 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저는 올빼미였어요. 거리는 어두웠으며 빛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해가 어디에서 뜨고 어디에서 지는지 이해하는 데 수년이 걸렸죠. 몰랐어요. 농담이 아니에요. LA에서 배웠어요. 선셋 대로를 달리다가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에 접어들면, 오후 7시 즈음에 딱 저녁노을이 펼쳐지는 거죠.”

그는 스탠리 큐브릭의 불평을 빌리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연출할 때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차에서 내리는 것’이라고 답했어요. 차에서 내리면 그때부터 질문이 시작되니까요.” 이제 스코세이지는 아침에 차에서 내릴 때 그의 AD에게 “오늘은 말하면 안 되는 게 뭐죠?”라고 묻는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일한다. ‘킬링 문’은 한여름의 오클라호마에서 몇 달간 촬영했다. “처음에 차를 몰고 가니 대초원이 펼쳐졌고 야생마가 보였어요. 방목장에 방목된 야생마들이 마법처럼 신비롭게 보이더군요. 마치 고대 그리스 엘리아스의 들판에 와 있는 것 같았어요.” 덥다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도 있었다. 애플TV의 지원을 받은 이 영화의 예산은 약 2억 달러로,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그의 마지막 영화인 <아이리시맨>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경력에서 흥미로운 모순 중 하나는 그가 비평적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는데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스튜디오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적응하지 못했고,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돈과 지원을 찾아 젊은 시절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그 시절엔 여러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실패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한번은, 아마 <카지노> 때였던 것 같은데, 그들은 ‘우리는 6천만 달러를 벌었습니다’라고 했거든요. 그 말을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는 그 영화로 6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거나 그와 비슷한 수익을 올렸습니다만 우리는 3억 6천만 달러를 벌고 싶었습니다’라는 거죠.”(최종적으로 이 영화는 미국에서 약 4천3만 달러, 해외에서 7천3백만 달러의 수익을 거뒀다.)

최근 몇 세기 동안 스코세이지는 자신이 영화 제작에서 원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업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과 영화의 길이와 예산을 놓고 씨름한 <갱스 오브 뉴욕>(2002),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하고 스코세이지가 “이 영화에 대한 집착은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스스로 표현한 <에비에이터>(2004)를 지나며 스코세이지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몇 년 지나지 않아 2006년에 다시 <디파티드>를 시작했다. 디카프리오와 다시 만난 작품이자 스코세이지가 그리고 싶었던 또 다른 이야기였다. 워너 브라더스가 디카프리오와 맷 데이먼이 연기한 두 주인공 중 한 명을 살릴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스코세이지는 다시 한번 후회했다.(스포일러 경고: 그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프랜차이즈였습니다. 한 사람이 죽고 사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었죠.” 그건 다음 영화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스코세이지는 관객과 영화 제작자 모두가 황홀해하면서 극장을 빠져나갔던 테스트 상영을 기억한다. “그런데 스튜디오 사람들이 나가면서 매우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영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프랜차이즈를 원했죠. 그 말은 더 이상 여기와는 일할 수 없다는 뜻이었어요.”

<디파티드>는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아홉 번이나 오른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처음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안겨준 영화다. “저는 항상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 것을 좋아했어요. 전 <택시 드라이버>가 후보에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영화의 주연 배우인 조디 포스터와 로버트 드니로는 후보에 올랐지만 스코세이지나 시나리오 작가 폴 슈레이더는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이라든지, <분노 의 주먹>이 오스카상을 받지 못했을 때라든지, 그를 통해 제 인생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해했어요. 하지만 저는 항상 이렇게 말했죠. 그냥 조용히 영화나 만들자고요. 상을 받으려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상을 받으면 좋았겠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계속해나가야 했고 영화를 만들어야 했어요.” 스코세이지는 지금까지도 아카데미와 거리가 멀거나 특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사실은 영화 산업인 어떤 커뮤니티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업계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지가 않죠. 제가 그들처럼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전 그냥 제 일에만 신경 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세이지는 오스카상을 수상하면서, <셔터 아일랜드>라는 또 다른 영화를 만들며 용기를 얻었다. “그로 인해 내가 <사일런스>를 만들고야 말게끔 해주었죠.” <사일런스>는 기독교를 처벌한 17세기 일본에서 그들의 신앙을 의심받게 된 두 명의 사제에 관한 또 다른 스코세이지의 열정적인 프로젝트였다. 그는 결국 2016년에 이 영화를 완성했고, 이 작품은 그의 후기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디카프리오가 또 한 번 주연을 맡고 파라마운트에서 개봉한 지각과 자기기만에 관한 장르 영화 <셔터 아일랜드>에 대해서는 “내가 만든 마지막 스튜디오 영화라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그 이후로 스코세이지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독립적인 자금 조달을 모색해왔으며(넷플릭스를 통해 극장에서 잠시 상영된 <아이리시맨>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파라마운트가 극장에서 배급하고 있다), 우연이라 할 수 없는 형태로, “논쟁적인 상황은 누그러졌다”고 정리한다. “(논쟁이) 항상 있기는 해도, 이젠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수준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재능 있고 헌신적인 영화 제작자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던 업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나? 스코세이지의 생각은 이러하다. “이 산업은 끝났습니다. 다시 말해 제가 속해 있던 업계는 거의 5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1970년에 무성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스코세이지에게는 이런 의견이 있다. “스튜디오가 더는 많은 예산으로 개인적인 감정이나 개인적인 생각, 개인적인 아이디어와 감정을 표현하는 개인의 목소리를 지원하는 데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지금 일어난 일은 그들이 그것을 ‘인디’라고 부르는 걸로 특정 카테고리에 욱여넣고 있죠.”

스코세이지는 직접 설립을 돕기도 했고 이후 수백 편의 영화를 보존 및 복원해온 비영리 단체인 필름 재단 Film Foundation과 함께 일한 덕분에 종종 과거를 역행하는 옹호자로 비춰지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는 영화관이 죽지 않는다고 믿는다. “극장의 형태는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함께 경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스코세이지의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극장은 사람들이 가서 즐기고 싶거나 감동을 주는 무언가를 보고 싶어 하는 장소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해요.”

나는 스코세이지에게 영화관에서 할리우드가 실제로 만든 영화만 상영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할리우드가 코믹북과 프랜차이즈 영화만 만들고 어떤 관객층은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영화관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과거에 마블과 코믹북 영화에 대한 스코세이지의 회의적인 발언이 많은 악플을 불러일으켰는데 말이다. 내가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더 많은 악플을 유도하고 있는 것 같아 자책이 든다. 비판은 그가 아닌 내게 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스코세이지는 현재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프랜차이즈 및 코믹북 엔터테인먼트의 과잉을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 문화에는 위험한 영향을 미칠 수 있죠. 이제 영화란 그런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세대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더 강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풀뿌리 수준에서 나와야 합니다. 영화 제작자들 스스로가 나서야 합니다. 사프디 형제와 크리스 놀란이 있잖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전방위적으로 다 해보길 바라요. 그리고 포기하지 않기를
요. 실력 좀 보자고, 자, 나가서 해봐요. 재창조에 도전해봐요. 불평하지 말고요. 틀린 말이 아니에요. 영화를 구해야 하니까요.” 스코세이지는 영화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꼭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도 말한다.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란 영화도 있었지 않나. 하지만 스코세이지는 이 말을 건넸다. “만들어진 콘텐츠는 진짜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아니요, 저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제가 하려던 말은, 그런 것들이 만들어진 콘텐츠라는 겁니다. 마치 인공지능이 영화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죠. 훌륭한 감독과 특수효과 전문가가 멋진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영화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줄까요? 무언가를 완성한 다음 몸과 마음으로부터 그걸 잊어버리는 것 말고는요? 그럼 여러분에게 무엇을 주는 걸까요?”

그는 러다이트(Luddite, 신기술 반대론자)나 테크노포비아가 아니다. 그는 <아바타: 물의 길 Avatar: The Way of Water> 3D와 IMAX 등 형식적, 기술적 실험에 대해 다른 누구 못지않게 흥분하고 있다. “새로운 방식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보세요. 저는 이렇게 오래, 멀리까지 왔어요. 그리고 그게 제가 하는 일이죠. 신이 원하신다면 한두 작품만 더 만들 수 있다면, 아마도 한 작품만이라도 더 만들 수 있다면, 그게 다예요.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하세요. 제 말은 두개골과 오장육부를 뜯어내리만치 죽어라 하라는 겁니다. 당신이 정말로 무엇을 찾으려면.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당신이 정말로 무엇을 말해야 한다고 느껴본 적 있습니까? 그러면 영화로 말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뭐죠? 무언가를 말해야 합니다.”

스코세이지는 대규모 예산으로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는 오리지널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이라는 점에서 자신이 언제까지 예외가 될 수 있을지 종종 궁금해한다. 그는 WGA 파업 이전에 영화배우 토드 필드 Todd Field와 함께 처음 작업을 시작한 후, 켄트 존스 Kent Jones와 함께 작업을 시작한 마릴린 로빈슨의 <집 Home>을 각색하는 등 지금도 더 많은 영화를 개발 중이다. 하지만 그는 물었다. “내가 얼마나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곧 여든한 살이 될텐데요.” 그렇다면 이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모르겠어요! 그들이 나를 바닥에서 건져 올릴 때까지 노력할 겁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스코세이지는 현재 자신이 보는 현대 영화에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볼 수 있을까? “네,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기는 해요. 하지만 저는 보통 스토리와 분위기를 봅니다. 확실히 많은 콘텐츠에 그런 영향이 있습니다. 너무 심해서 시청을 중단해야 할 정도인 것도 있어요. 뭘 배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고, 사실은, 저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을 겁니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영화를 보지 않잖아요. 하지만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다른 방식의 깨달음을 얻게 되지요.”

조안나 호그 Joanna Hogg가 감독하고 각본을 쓴 2010년작 <아키펠라고 Archipelago>를 예로 들어보자.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그 이후로 저는 운이 좋게도 조안나의 다른 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배우려고 본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배웠어요. 부분적으로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스타일이나 제가 하려고 하는 것, 또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지금 영화 제작에 대한 접근 방식이 그런 영화를 보는 것과 많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코세이지는 그 오래된 카메라 움직임, 그 오래된 제스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요점은 왜 그런 동작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언어의 일부가 됐잖아요.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카메라 무브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까요? <좋은 친구들> 같이요? 글쎄요, 전 해냈어요. 다시 해볼까요? 흠, 아니요. 돈이 안 됩니다. 정말 안 됩니다. 그 순간만큼은 좋았으니까, 그렇죠? 지금은 컷들을 아주 잘 붙이는 사람도 있고, 정말 아름답게 편집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기술적인 측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이미지의 축적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축적이죠.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요. 하지만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지금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메라는 돌고 있고요. 자, 그들이 모든 걸 하고 있으니 전 다른 일을 해야겠죠. 다른 곳으로 넘어가야 해요.”

스코세이지는 대부분 이스트사이드에 있는 타운하우스 5층에, 데이 베드로 바꿀 수 있는 소파가 놓인 작고 어수선한 서재에서 시간을 보낸다. 올여름 어느 날 오후도 그는 여기 있었다. “이곳에서 영화를 만들죠.” 아래층에는 짙은 색 목재와 <분홍신 The Red Shoes>, <마담 D Madame de···>, <상하이 제스 처 The Shanghai Gesture> 등의 영화 포스터가 더 있고, 아내의 물건으로 가득 찬 방에는 유화 그림과 아내의 선조이자 미국 건국의 헌법 제정인 중 하나인 거버너 모리스 Gouverneur Morris가 남긴 <미국의 역사적인 가문 들 Historic Families of America>의 원본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이 집의 첫 번째 주인인 밥 엘리엇 Bob Elliott이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세 마리의 개, 개들이 출입하는 문, 그리고 스코세이지와 다른 사람들이 이동하는 데 필요한 엘리베이터가 있다. 서재에서 스코세이지는 파란색 양말만 신고 신발은 신지 않았다. 방은 방음 시설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의 옷장은 복도 바로 건너편에 있다. 여기에도 간이 주방이 있고 영사기 스크린과 스티븐 스필버그가 선물한 수천 편의 영화가 담긴 크고 복잡한 기계들이 있다. 스코세이지가 기계들을 본다. “그도 하나 갖고 있어요. 프란시스(스코세이지의 오랜친구인 포드 코폴라 Ford Coppala)도 저걸 좋아했습니다.”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오는 창백한 오후의 햇살이 그의 흰 머리와 유명한 눈썹에 후광을 비춘다. 그의 옆 작은 탁자 위에는 급한 검은색 필체로 덮인 흰 종이 더미가 쌓여 있다. “저는 매일 제가 하는 일을 기록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1988년부터 이 일을 해왔다. 그의 기록은 치료의 일환이자 실용적인 일기장이며, 다 쓰기 전에 불태우려고 한다.(나중에 그는 마음이 바뀌었다며 그 종이들을 보관하겠다고 말했다.) 스코세이지의 많은 집착 중 하나는 자기기만이다. 이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제가 만드는 모든 영화는 신뢰와 배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점점 미쳐가는 트래비스 비클(로버트 드니로의 역할)의 머릿속에 갇혀 있는 <택시 드라이버>나 <좋은 친구들>, <카지노>, <아이리시맨>에 등장하는 모든 현명한 친구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작은 거짓말들을 생각해보라. ‘킬링 문’에서 디카프리오의 캐릭터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진실을 자기 자신에게까지 숨기면서 점점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스코세이지는 이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지점에서 그의 일기는 그런 의미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라고 묻습니다. 저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일기를 찾아서 보고 제가 쓴 내용을 보고 부끄러워할 수도 있죠. 아니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나 자신의 합리화나 나 자신에 대한 거짓말을 볼 수도 있을 거예요. 또는 내가 하고 있던 일을 하면서 살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요. 이해하시겠어요?”

이게 왜 중요할까? 스코세이지는 말한다. “제가 하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 진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말이다. “저는 제 자신에게 최대한 솔직해지고 싶어요. 작품에서 정직하다면 인간으로서도 정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요.” 그리고 내 경험상 스코세이지는 솔직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임박한 죽음에 대해 물어보면 그는 주저 없이 진실을 말해줄 것이다. 그는 “나는 항상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그의 다음 말을 모두가 함께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을 여기에 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내가 죽음에 대한 무례한 질문을 한 후 40분가량을 이야기했다. 지금은 대략적으로만 알 수 있지만 여기까지만 적기로 했다.

“이 방 안을 둘러보면서, 이 모든 것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스코세이지는 자신이 쌓아둔 모든 것을 손으로 빙 둘러 보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저는 영화와 책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을 가진 수집가였어요. 이제 그것들은 모두 어디로 가야만 하겠죠.” 그의 서재 뒤쪽에는 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친구와 자녀들의 사진이 빼곡히 꽂힌 선반이 있었다. 그는 “저 뒤의 내 작은 모자이크”라고 불렀다. 그는 저것도 치워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가에 꽂혀 있던 영화 책들도 모두 보내야 한다.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든 게 달라집니다.” 스코세이지는 말했다.

어떻게? “당신이 쓰고 있는 시간은 정말로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거예요.” 스코세이지가 답한다. “시간을 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다음 그 속에서 현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소비하는 중에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냥 존재하세요. 창 밖을 한번 보세요.” 그리고 그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저 반만 보이는 나무를 보십시오. 제가 어렸을 때는 1940년대 영화의 포스터들을 올려다보곤 했지요. 제가 봤던 영화들 말이에요.” 그는 벽을 가리키며 고전 영화 <캣 피플 Cat People>과 <로라 Laura>, <과거로부터 Out Of The Past> 등의 포스터들을 보여줬다. ”<과거로부터>는 밤비와 더블 빌에서 봤어요. 어렸을 때 극장에 가면 뭔가 앞으로 잘될 거란 희망을 주는 포스터들이었어요.” 스코세이지는 1940년대와 1950년대의 포스터와 팸플릿 수천 장을 소장하고 있지만, 이 포스터들은 달랐기 때문에 여기 있는 거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정말 시간을 보내는 것이니까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죠. 그래서 자신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 즉 어떤 사람들은 ‘휴식’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쉬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배우려는 미친 욕망입니다. 모든 것을요.”

그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기 뭐가 있더라? 이건 <오비드 Ovid>입니다. 어젯밤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 토머스 내시 Thomas Nashe에 관한 책을 집어 들었다. 또 다른 책으로 <셰익스피어의 선생, 토마스 키드 Shakespeare’s Tutor: The Influence Of Thomas Kyd>도 꺼냈다. 그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신곡 The Divine Comedy>을 읽고 싶다고도 했다. “전체를 다 읽어야 하는데 가이드가 필요하죠.” 그는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의 모든 작품(<피네간의 경야 Finnegans Wake>는 제외할 것)과 톨스토이, 멜빌,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을 읽었지만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 너무 많다고 했다. 이반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 Oblomov>를 예로 들어보자. 침대에만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에 관한 책이다. “그는 단지 존재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건 너무 문제가 많잖아요. 고통스러울 겁니다. 우정을 갖는 것도 너무 힘들고요. 정말 읽어보고 싶어요. 왜냐하면 어쩌면 모든 가치는···, 우리가 키우는 개들을 봐요. 개들은 존재하되 죄를 짓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이런 겁니다, 그런 공간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지만 동시에 저는 아카디아인 Akkadians에 대해 알고 싶고 키루스 대왕 Cyrus the Great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요.” 그래서 스코세이지는 엘람족 Elamites을 떠올리며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건 바로 문명의 시작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전 이제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습니다.”

그는 책과 영화 프로젝트, 그리고 여전히 하고 싶은 몇 가지 일을 보고 있지만, 그 일들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가 계속하고 싶었던 많은 것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제가 정말 계속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만약 다음 영화를 선택한다면, <홈>이라고 합시다. 아니면 ‘아, 나를 위한 작품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다른 작품이 나온다면 꼭 해야죠. 이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살아 있는 은혜와 건강만 허락된다면요. 하지만 저는 프로듀서로서 연출을 하고 싶긴 해도 시간이 촉박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이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겁니다.” 나이가 들기 전에는 늙는다는 사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아이리시맨>에 나오는 대사가 있어요. 간호사가 혈압을 재는데 혈압이 올라갈 때까지는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요. 거기까지 가기 전에는 이해하지 못한다고요. 그런 거예요.”

남은 것은 무엇인가? 물론 일이다. 가족, 그리고 믿음. 스코세이지의 경우에는 말이다. “저는 이 방식대로 자랐고, 밀고 나갔고, 거부했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다루는 모든 주제는 그것들입니다. 그 말은 제가 여전히 신앙의 일부이거나 신앙이 여전히 제 일부라는 뜻이겠죠. 그리고 제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찾아야만 해요. 그게 내 정체성과 어떻게 맞는지, 아니면 내가 어떻게 거기에 맞는지 말이죠. 플래너리 오코너 Flannery O’Connor는 ‘신앙은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전등 스위치를 찾을 때까지 비틀거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어요. 자, 어두운 방입니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작은 빛이 있을 거예요, 그렇죠?”

스코세이지에게는 “너무 늦었다는 것은 동시에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아직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몇 가지 질문을 웅얼거렸다. 마지막이 될 위대한 작업 하나를 더 남길까? 신과 화해하는 것은? 하지만 스코세이지가 말한 것은, 기본적으로, 해결 방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그곳에는 오직, 당신만 있을 뿐이다. “마지막 한 번의 위대한 업적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코세이지는 말했다. “그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탐구하는 문제입니다. 하느님과 잘 지내는 것은 언제나 그렇죠. 여러분은 그 과정에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없다는 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그런 측면을 매일 생각해야 하는 문제인 거죠. 누구를 상대하느냐, 어떻게 상대하느냐, 최선의 방법으로 상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과 잘 지내라’라는 말이 뭐 인생의 신비를 배우는 문제라고 생각하나요? 전 이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마 아무 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죄책감의 상실에 대한 얘기일까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그게 인간이니까요. 죄책감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그런 일이 닥쳤을 때 ‘그것도 나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삶의 아픔이 또다시 찾아오는구나. 좋아, 계속 살아가자. 오, 그가 내 머리 어딘가를 팍 쳤군, 그렇지? 좋아, 해보자. 오, 50년 전에 이미 고민했던 그 오래된 문제가 또 생겼군. 계속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가 말을 이어간다. 자신과의 싸움, 당신이 계속 만나고 알고자 하는 사람, 당신이 처음부터 일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결점과 희망과 꿈. 그 모든 대립과 과거가 계속해서 다시 돌아온다. 스코세이지는 “제 생각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원래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죠.”

스코세이지가 미소 짓는다. “그냥 이런 거예요.” 뉴요커 특유의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냥 이런 거예요. 그래서 어쩔 건데?”

ZACH BARON
포토그래퍼
BRUCE GIL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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