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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해진 극장 로비로 들어서며

2024.02.05김은희

극장이란 공간만이 불러올 수 있는 어제의 향수와 내일의 미지를 생각해본다.

글 / 이지현(영화평론가)

영화관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작년 한 해 <범죄도시 3>나 <서울의 봄> 같은 흥행작들이 극장 부활을 도모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반전되지 않고 있다. 최근 멀티플렉스 업계는 프라이빗 대관이나 특별관 등의 새로운 서비스를 도입하며 트렌드를 유도하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유의미한 상승세는 보이지 않는다. “로비에서 티켓을 끊고 10분, 20분 기다리면서 사용하던 소파가 사라져버렸다”라는 정우성 배우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서울의 봄>을 홍보하던 중 그는 최근 영화관 분위기를 언급하며 한국영화를 보러 와 달라고 청하기에도 무안하다고 고백한 적 있다. 평일 낮에 극장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수긍할 것이다. 텅 빈 팸플릿 선반과 의자가 사라진 로비, 그리고 직원이 없는 셀프 체크인 입구는 황량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사실 극장에 들르는 시간만큼 비경제적 행위도 없다. 이동 시간은 길고, 그 시간에 비례해서 부수적인 소비도 늘어난다. 개인적으로 영화관의 외부 상황이 콘텐츠와 별개라고 믿는 편이지만, 요즘엔 이런 생각마저 흔들린다. 영화관에 지출하는 비용보다 더 큰 만족도를 느낀 것이 언제였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어떤 이들은 장르의 경계를 허물어 극장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년 북미에서 흥행한 영화 <테일러 스위프트 디 에라스 투어>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의 흥행 이후 국내에서도 콘서트 투어 실황을 담은 영화들이 차례로 개봉했다. 하지만 이런 시장의 성장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 근원적인 대책은 되지못한다. 단언컨대 콘서트장보다 저렴한 티켓값만이 이 경우의 가장 빛나는 이점일 것이다.

비영화적인 프로그래밍과 마찬가지로, 비영리적인 도도함도 해결책은 아니다. 작년 원주시의 ‘아카데미극장’ 철거 문제가 그랬다. 1963년에 지은 이 공간은 비용 부담의 벽을 넘지 못하고 2023년 10월에 허물어졌다. 문화적 가치에 대한 논쟁이 일었지만 행정당국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원주시는 결국 야외 공연장과 주차장 설립 등의 대책을 언급하며 복원을 전격 중단했다. 개관 60주년을 넘기지 못하고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역사의 기록이 됐다. 비슷한 일이 해외에서도 있었다. 막 50돌을 넘은 도쿄의 독립영화관 ‘이와나미홀’이 2022년 7월에 폐관된 것이다. 소규모 미니시어터(일본의 ‘독립영화관’ 명칭)의 대표 격인 이 장소는 팬데믹 기간에 잠깐 동안 문을 닫았지만, 하마구치 류스케나 후카다 코지 등의 독립영화 감독들이 앞장서서 재개관을 도왔다. 그렇지만 예술영화 관객층의 복귀가 늦어지며 경영 악화로 결국 폐업했다. 영화가 문화가 아닌 대중적인 오락으로 여겨지는 일본의 상황에서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2023년 12월 초, 파리의 ‘고몽 샹젤리제 마리냥’이 거의 10년간의 검토 끝에 문을 닫았다. 무려 창립 90주년을 앞둔 시점이었다. 건물의 임차인인 파테 그룹은 건축상의 난제와 기술적 문제를 들어 리모델링을 과감히 취소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프랑스는 영화계 산업 전반이 회복되는 추세라서 지켜볼 여지는 있다. 이를테면 2024년 파리 올림픽을 계기로 다른 두 곳의 역사적인 영화관이 재개장을 추진하는 중이다.

시네마란 매체는 기본적으로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무한히 림보하는 공간의 예술이다. 스크린 속 공간만큼 영화를 상영하는 물리적인 장소의 역할도 그만큼 중요해진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공간 안에서만 전개되기 때문이다. 예술영화 시장에서의 영화관 위상은 더더욱 역사적이거나 세련된 편이 유리하다. 만일 장소가 그 작품을 보호한다면, 관람객은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실험자 혹은 생성자가 될 수도 있다. 아주 오래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한 앙리 랑글루아는 자신의 영화 도서관이 소위 ‘영화계의 루브르’가 되길 원했다. 그가 기획한 프로그래밍은 필름의 몽타주를 벗어나 작품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겨냥했다. 영화가 예술인지 아닌지를 논쟁하던 이른 시기에 그는 실제의 공간을 통해 예술에 다가서려했다. 시네마테크는 애초에 영화를 자료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시네마테크는 단순한 필름 저장소가 아니었다.

만일 시네마의 개념이 단순한 프로젝션을 넘어 배급이나 지역성을 포괄한다면, 이제 영화는 개별적인 체험마저 고려해야 한다. 관객들은 미술관을 거닐 듯 영화관을 선택한다. 그리고 오페라 하우스를 방문하듯 특별하게 공간을 감각한다. 최근 자주 들려오는 멀티플렉스의 고급화 전략은 그런 면에서 한정된 헌신처럼 보인다. 안락한 리클라이너 좌석은 그저 영혼 없는 아름다움이나 다름없다. 아마도 업계가 주목해야 할 진짜 가치는 더 높은 수준의 경험과 연관되어야 한다.

영화 <아멜리에>에서 주인공이 방문한 ‘스튜디오 28’의 붉은 벨벳 좌석이 생각난다. 이름처럼 1928년에 개관한 이 영화관은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개관 첫 상영작이었던 아벨 강스의 <나폴레옹>은 일종의 레퍼토리가 됐고, 루이 브뉴엘과 살바도르 달리 등의 아방가르드 감독들도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영화미술가 알렉상드르 트라우네가 디자인한 영화관의 로비나, 장 콕토가 직접 설계한 극장의 조명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콕토가 이름 붙인 별명처럼 이 장소는 ‘걸작 의 방 Salle Des Chefs D’oeuvre’이자 ‘영화관의 명작 Chef D’oeuvre Des Salles’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의 한복판에서 경험을 축적하면서 극장은 스스로 예술이 되었다. 예술이 아닌 관람자의 경험을 통해 명성을 쌓은 사례도 있다. 1997년 텍사스 오스틴에서 처음 문을 연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 시네마’는 식사와 알코올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상영관이다. 설립자인 팀 리그는 초기부터 모두가 가고 싶은 영화관을 꿈꿨다. “우리는 영화를 좋아했지만 영화관을 좋아하지 는 않았다”라는 그의 언급은 시네필적 경험과는 다른 영역을 추구하는 듯이 보인다. 어쩌면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들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2023년 미국 영화계의 회복세가 멈추지 않았던 것은 <바비>나 <오펜하이머> 등 일부 작품의 흥행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팬데믹 이후 다수의 사람이 외출하거나 활동하고 싶어 했고,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의 영업 방침은 이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서 빛을 발했다.

한편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의 초기 후원자로 알려진 쿠엔틴 타란티노는 200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중 하나인 ‘뉴 비벌리 시네마’를 직접 인수하기도 했다. 타란티노는 이곳을 고전영화나 B급 영화들을 상영하는 레퍼토리 전용관으로 바꾸었다. 모든 영화가 이곳에서는 35밀리미터 필름으로 상영된다. 좌석이 다소 불편하지만 요금은 저렴한 편이다. 2014년부터 타란티노가 직접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 선정 원칙은 “선량한 정신을 지닌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영화들”이다. 클래식은 항상 공정하다.

좋은 조건에서 영화를 상영하고자 하는 정당한 욕구에서 추진된 과거의 유산들을 되돌아본다. 그 어느 것도 자본적 고통 없이 완성되지 않았다. “예술은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아니다. 예술은 다만 삶을 더 견딜 수 있게 만드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이다.” 소설가 커트 보니것의 외침은 일견 시네마의 욕망과 부합한다. 그러고 보니 극장을 운영하는 행위야말로 가장 비경제적인 비전을 지니고 있다. 영화에 매혹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열렬하게 쏟아내는 것이 영화 산업의 본질적인 동력이다.

치워지지 않은 팝콘 더미와 콜라, 로비에서 사라진 의자를 보며 우리가 잊고 있던 영화관의 모습을 상기한다. 지금 우리 눈 앞에서 그 가능성은 짧은 쓰레기 더미 안에 갇혀 있는 듯하다. 팬데믹의 끝에서 발견하는 영화관의 입구는 그저 초라하다. 하지만 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세계는 변하고 있다. 더 안락한 좌석을 위한 멀티플렉스의 고민, 작은 독립영화관이 지닌 정제된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클래식에서 헤리티지까지, 우리가 사랑하는 시네마는 결코 여름철 유행 같은 찰나가 아니다. 취향이 아닌 경험으로 공유되는 모든 영화적 공간의 고귀함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