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art

모든 사업이 브랜드가 되지는 않는다

2024.03.13전희란

모든 사업이 브랜드가 되지 않듯, 모든 유명세가 명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시대의 품 안에서 동의와 공감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 바로 명성이라는 배지다.

글 / 한지인(브랜드 기획자)

‘명성과 브랜드’를 말할 때 단번에 떠오르는 대상은 명품이다. 명품에는 언제나 ‘브랜드 헤리티지’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헤리티지. 과연 명성이라는 단어와 걸맞은 무게감이다. 하지만 명품이라고 태생부터 명품이었을 리는 없다. 어떤 시작이든 패기 넘치고 싱그러운 창업 초기가 있게 마련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고 더 많은 팬을 확보하기 위해 좌충우돌 열혈 청춘의 기세로 내달리던 브랜드들은 과연 어떻게 명성을 얻고, 유지하고, 키워나갈 수 있었을까?

명품 브랜드의 창업 스토리를 재생하면 거기엔 어김없이 솜씨 좋은 청년들이 북적이는 거리가 통째로 담겨 있다. 저마다 재주를 장전해 가게를 만들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고객을 대하는 브랜드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면 괜스레 설렌다. 19세기 청년들이 이제 막 출항한 사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유명한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에 공들인 건 지금과 별다를 바 없다. 루이 비통이 만들어 팔던 여행 트렁크와 에르메스의 말 안장은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외제니 황후의 눈에 들면서 유명세를 탈 수 있었고, 까르띠에의 보석은 트렌드세터였던 마틸드 공주가 알아보았다. 재주꾼에서 번듯한 프랑스 황실 상인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순간이었다. 영국의 버버리와 스위스의 롤렉스는 특별한 유명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모험가 집단이다. 노르웨이의 북극 탐험가이자 동물학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프리드쇼프 난센은 북극권을 항해하며 버버리 개버딘(버버리의 대표 소재)을 사용한 최초의 극지방 탐험가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공군 준장 에드워드 메이틀랜드는 버버리를 입고 열기구 비행 세계 기록을 세우고, 존경받는 영국인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은 버버리를 입고 20세기 초의 대표적인 탐험 길에 오른다. 롤렉스는 여성 최초 도버 해협을 수영으로 횡단한 메르세데스 글리츠의 손목에서 15시간 동안 정확하게 작동한 일화로 더 유명해졌다. 그 후로 이 시계는 최초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에드먼드 힐러리, 텐징 노르게이와 함께 산을 타기도 했고, 스피드의 제왕 말콤 캠벨의 지상 스피드 기록 달성의 현장에도 한 자리했다. 저마다 ‘브랜드 스토리’다운 이야기들을 하나씩 장전하고 있다. 지금 알려진 대부분의 명품 브랜드는 낭만의 파리, 벨 에포크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전후 사회를 경험하며 ‘시대 속에서’ 변화, 모험, 자유, 평등의 이미지를 수집할 수 있었다. 낭만을 바탕으로 변화와 모험을 감행하고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으니 그 자체로 모더니즘이었던 것이다. 놀라운 브랜드 스토리 하나쯤 갖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한 시대의 인기를 모으는 것만으로 명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시대를 넘어서는 인기, 즉 명성을 구축해야 한다는 미션이 남아 있다. 브랜드의 ‘인기’가 ‘명성’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 위해서는 유연한 성장 전략이 필수다. 지금까지 부르주아를 위해 제품을 주문 제작하며 사업을 다졌던 이들의 창업 초기 전략은 서서히 더 큰 시장을 바라봐야 할 때를 맞게 된다. 시대가 변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읽고 방향성을 틀 수 있었던 브랜드, 즉 부르주아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대중의 아이콘이 되는 새로운 개인들에게 발탁되는 전략으로 갈아타는 브랜드만이 자신의 인기를 갱신할 수 있었다. 유명세는 동시대의 호응이자, 시대를 반영한다. 더도 덜도 말고 반보만 앞서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업의 철학과 딱 맞아떨어지는 가치이기도 하다.

시대를 한 보, 혹은 두세 보 앞서가는 브랜드는 선구자의 타이틀은 붙을 수 있겠지만 동시대를 풍미할 수 있는 특권은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다. 흉내 내는 브랜드가 순간의 인기를 맛볼 수 있는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 인기를 계속 붙잡아둘 원동력이 없을 때가 많다. 시대정신의 품 안에서 지금 여기의 세상을 탐하고, 정확하게 딱 반보만큼만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 이름을 걸고 걸어가려는 브랜드가 이름값, 명성을 돌려받는 것이 자본주의 브랜드 세계의 진리다.

여기서 결국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가 시대의 가치와 어떻게 나란한 결로 걸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이 점차 일상이 되어가던 시대에 태어나 방랑하며 돈을 벌고 생존해야 했던 코코 샤넬에게 ‘여성이 활동하기 편안한 옷’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그녀의 브랜드는 전후 미국 페미니즘의 유행에 정확하게 들어맞아 현대 여성복을 대표하게 된다. 사실 샤넬보다 먼저 여성을 위한 바지를 선보인 이들은 따로 있다. 미국의 여성인권운동가 엘리자베스 밀러와 아멜리아 블루머다. 하지만 반드시 바지를 입고 해야만 하는 활동이 많지 않았던 시대에 이 괴상한(?) 옷은 사람들의 호응은커녕 비난을 받는 것으로 끝나버렸으니, 모든 것이 타이밍이라는 말은 또다시 진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잘 입고 다닐 수 있는 옷을 디자인하고 생산하며 시대로부터 환영받은 샤넬에게서, 시대를 미리 읽어내려는 서툰 노력은 그만두고 지금 당장 나에게 유효한 일을 하라는 힌트를 얻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지 말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거대한 목표에 압도되지 말고, 눈 앞의 반짝이는 나만의 진실을 좇다 보면 시대의 흐름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유명한 브랜드가 될 수 있는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내용 자체에 집착 해야 한다. 이 명제를 가장 잘 설명하는 브랜드는 어쩌면 지겹겠지만, 누가 뭐라 해도 애플이다. 스티브 잡스는 마케팅, 브랜딩이라는 단어를 혐오할 정도로 고객에게 잘 보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에게는 다만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완벽하게 제품으로 구현해내면 사업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믿음을 직원들에게 열정적으로 설파하는 여러 영상이 여전히 회자되는 유명한 ‘짤’이 되어 그 어떤 애플 상업 광고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애플의 명성을 만들어낸 주인공이 과연 아이폰인지 스티브 잡스인지 헷갈릴 정도다.

창업자의 브랜드를 향한 덕력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애플의 인기는 유례 없는 심플한 디자인과 혁신적 기능을 기반으로 한다. 혹자는 이러한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가리켜 “애플이야말로 선구적인 브랜드”라고 단언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애플의 정수는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디자이너 디터 람스가 지향한 단순함, 혁신, 지속 가능성에 기인한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열렬한 애호가를 생산한 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바우하우스의 정신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바우하우스는 개인성과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근대의 성질로부터 탄생했다. 그러고 보면 애플이란 브랜드의 성공의 뿌리는 ‘근대성’이라는 시대정신의 밭에 깊게 박혀 있다. 고객에게 잘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고객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기능을 만들어내고, 오랫동안 존중받는 시대정신을 이어가는 착실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브랜드의 깊이가 이렇듯 깊고 단단하니, 명성의 생명력은 길고 강할 수밖에.

세상 모든 사업이 브랜드가 되지는 않듯, 세상 모든 유명세가 명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성실하게 창업자의 이야기를 제품과 서비스로 엮어 세상에 내보내는 브랜드가 시대의 품 안에서 동의를 얻고 공감을 만들어내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명성’이라는 배지다.

명성은 시대정신과 브랜드가 만나 생성되는 결괏값이다. 이들의 화학반응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려면 잘 여물어가는 브랜드의 필연이 시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시기의 우연과 만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마존은 모든 것을 박스 안에 넣을 자신이 있는 브랜드였고, 우연히 팬데믹을 만나 명성을 더 멀리, 더 빨리 배달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등산 ‘덕후’의 기막힌 기술력을 탑재한 파타고니아는 창업가의 각성을 계기로 반보 빠르게 성장했고, 기후 위기 시대에 여러 브랜드의 북극성이 되었다. 결국 중요한 건, 눈 앞의 시대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손에 잡히는 인기를 반복하며 시대정신에 가까워지는 것. 지나치게 앞선 브랜드의 철학은 궤변이 되고, 흉내 내는 브랜드의 철학은 화려한 별똥별 쇼와 같다.

이미지
게티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