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빛은 여전히 남아.
전사의 후예들의 교실이데아
김지원(스타일리스트)
서태지와 H.O.T.
다섯 살 차이 나는 당시 사춘기였던 친언니 따라 서태지를 좋아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부터 은퇴 후 2000년 ‘ㅅ’자 구찌 옷을 입고 돌아온 이후 발매한 솔로 앨범까지 모두 발매 당일 아침 레코드 가게에 가서 구입했다. 왠지 번화가 대형 레코드점에 가야만 음반 판매에 제대로 집계될 것 같아서. 당시 CD는 1만원대라 비싸서 한 장씩 겨우 샀고, 카세트테이프는 몇천 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것까지 해봤다 첫 ‘띵’ 소리만 들어도 어떤 노래인지 알 정도로 매일 끼고 살았다. 지금도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공기, 교복의 촉감, 모든 게 생생하다. 서태지를 좋아하던 때는 너무 어려서 실제로 보기 위해 해볼 수 있는 게 없어 한이 됐는데, H.O.T.를 좋아하던 때는 보다 자유로워서 신나게 쫓아다녔다. 얼마 전 SNS에서 우연히 ‘2001년 문희준 생일’이라며 몇백 명의 팬이 모여 생일 파티를 하는 영상을 봤는데, “저기 나 있었음”이라고 포스팅하자마자 DM이 쏟아졌다. 본인도 있었다고. 퇴색하지 않은 기쁨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았던 꼬꼬마 시절부터 서태지 노래를 듣고 자라다 보니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그대로 흡수했다. ‘시대유감’, ‘교실이데아’를 들으며 옳지 못한 것을 보면 참지 못했다. 오늘날 나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모서리가 둥글어진 조약돌처럼 살고 있던 듯하다. 몇 주 전 오랜만에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듣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는 과연 그때 내가 꿈꾸던 멋진 어른인가? 그날 이후 가끔 스스로를 검열한다. 서태지는 여전히 나를 멋진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 존재인가 보다. 그 시절 내게 돌아가 해주고 싶은 말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 시름시름 앓고 있는 지원이에게. 지원아, 태지 오빠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사랑도 하고, 뭐 너보다 훨씬 자유롭게 잘 살고 계셨더라. 지금 다시 비디오로 돌려보고 싶은 장면 <1993 마지막 축제>라는 콘서트 실황 비디오 속 ‘우리들만의 추억’을 부르는 장면. 커다란 화이트 맨투맨 티셔츠에 헐렁한 면바지, 찰랑거리는 헤어, 은테 안경, 하얀 피부의 태지 오빠도 아름답지만, “소리쳐주던 예쁘게 웃었던 아름다운 너희들의 모습이 좋았어”를 크게 따라 부르는 10대 소녀들의 모습이 너무 아련하다. 그때는 그 자리에 있던 소녀들을 어찌나 부러워했던지. 지금 그 소녀들은 멋진 어른이 되었을까?
음악과 음악 사이
박미리새(페이지터너·서울숲재즈페스티벌 기획총괄)
파나소닉 미니 콤포넌트 분리형 오디오
19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나의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 테이프, CD, 라디오 기능 등이 있는 콤포넌트 오디오다. 구매 시기 막상 구매한 것은 2015년. 사무실 근처 회전율 좋은 고물상에서 약 2만원을 주고 샀는데 특히 MD 플레이어도 갖춘 모습에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테이프와 CD 사이엔가, CD와 MP3 사이엔가 잠시 MD(Mini Disc, 미니 디스크. 1992년에 소니가 카세트테이프를 대체하고자 만든 음원 저장 매체)라는 것이 나왔고, 음질은 CD만큼 좋고 크기는 보다 작아서 휴대하기 좋았지만 MP3 플레이어 출시와 함께 사라진 추억이었다. 이 콤포넌트 오디오에는 MD 플레이어도 있어 굉장히 반가웠다. 퇴색하지 않은 기쁨 이 오디오를 운영하던 서점에 두고 많이 알려지지 못한 국내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들려준 일도, 우리가 제작한 음반을 듣던 때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110볼트라 변압기가 필요하고, 최근에는 이사하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고장도 났지만 다시 고치려고 한다. 아무리 스트리밍 시대라고 하지만 아날로그가 주는 힘이 있으니까. 요즘 사람들은 음원 사이트에서 음악을 들어 앨범 하나를 온전히 듣기보다 타이틀만 접하기 마련인데, 아이유를 좋아하는 딸아이가 오디오에 CD를 넣고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들었다. 아티스트가 음반을 출시할 때 곡 하나하나도 중요하지만 그 음반 안에는 내러티브가 있다. 마치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을 읽는 것처럼. 아마 아이도 앨범 전체를 들으면서 그런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오디오와 함께하던 1990년대의 내게 돌아가 해주고 싶은 말 그냥 같이 음악을 들어보지 않을까 싶다. 윤상, 공일오비, 어린애치고 음악 취향 이 조숙한 편이라 장필순, 조동진 등 ‘하나음악’에서 나온 음악들을 사랑하던 그 시절의 나와.
잘 지내십니까?
민용준(영화 칼럼니스트)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 감독과 두 차례 대면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지난 2015년경 <립반윙클의 신부>라는 영화로 내한했을 당시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두 번째 만남은 바로 작년 11월 5일에 신작 영화 <키리에의 노래> 국내 개봉을 앞두고 내한했을 때 관객과의 대화 진행 모더레이터로였다. 그때 내가 가진 이와이 슌지와 관련된 소장품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가 사인을 받았다.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 등 이와이 슌지의 영화 OST LP와 CD가 대부분이었다. <러브레터>를 처음 본 건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그 무렵에는 딱히 영화에 대단한 관심은 없었으나 영화를 좋아했던 친구 덕분에 이와이 슌지와 <러브레터>라는 고유명사를 알게 됐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영화인데 한국어 자막이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어렵게 구했다고 했다. 마치 야동 비디오라도 구했다는 듯 음침하면서도 의기양양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 영화는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될 수 없던 시절이라 <러브레터>를 본다는 건 사실상 불법 행위였다. 그리고 설익은 테스토스테론이 충만하던 남자애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수완 좋은 친구가 험한 것을 구해왔을 경우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호기심은 왕성한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친구와 단둘이 듣게 된 인생 첫 “오겡키데스카?”는 어쩌다 본 야동보다 1백 배는 더 강렬했다. 친구와 단둘이 어렵게 구해온 <러브레터> 비디오테이프를 방구석에서 시청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 지금 돌아봐도 생소하다. 이것이 1990년대다. ‘젠Z’가 이 맛을 어찌 알겠는가? 하하···. 갑자기 왜 눈에서 땀이 날 것 같지? 경로 이탈에서 돌아와 본론으로 재주행해보자. 영화감독을 만나는 직업이라는 걸 꿈꿔본 적도 없던 10대 시절에 이와이 슌지와 <러브레터>가 내 인생에 들어왔다는 건 이제 와 새삼 흥미로운 추억이다. 이와이 슌지와 만난 순간마다 그 시절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보다 흥미로운 저 너머의 삶도 존재하리라 새삼 믿게 됐다. 지난 19년간 수많은 명사를 인터뷰하고 대화를 나눴지만, 애초에 그런 일을 하게 될 것이라 기대한 적도 없던 시절부터 익히 잘 알고 있던 이름과 조우할 때마다 업의 의미를 초월해 허구의 문턱을 넘어선 듯한 감각이 삶에 깃든다. 덕분에 <러브레터> LP 커버에 서명한 이와이 슌지의 반짝이는 이름을 볼 때마다 신비로운 징표를 획득한 기분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모험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벨트 같은 것이랄까? 그래서 책장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두고 매일 올려본다. 저 멀리 어딘가 혹은 저 너머 어디에 있거나 있을지도 모를 기억을 향해 안부를 묻듯이, 매일 돌아보고, 매일 나아간다. “오겡키데쓰카?”, “오겡키데쓰네.”
저항군들의 시대
김도훈(문화 칼럼니스트)
필름과 디지털카메라
엑스세대는 정말 귀찮은 게 많은 세대였다. 밀레니얼도 젠Z도 귀찮은 게 많을 것이다. 아니다. 당신들은 엑스세대만큼 귀찮은 걸 많이 겪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음악이 그렇다. LP판으로 음악을 듣다 카세트테이프 시대를 겪었다. 그걸로 끝난 줄 알았더니 CD가 등장했다. 그걸로 끝난 줄 알았더니 MD가 등장했다. 나는 소니 MD 플레이어를 손에 넣고 가소롭게 웃었다. 이것보다 더 나은 포맷으로 음악을 듣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어럽쇼. 스트리밍 시대가 열렸다. 도대체 음악 하나 듣겠다고 반세기 동안 몇 개의 포맷을 거친 것인가. 엑스세대는 피곤하다. 다만 사진에 대해서라면 나는 끝까지 저항군의 위치에 서 있었다. 대학 시절에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했다. 나는 그게 마뜩잖았다. 일단 화소가 너무 적은 탓에 마음에 썩 드는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나 같은 엑스세대들은 ‘필름룩’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다. 민희진이 뉴진스 뮤직비디오에서 지속적으로 그놈의 ‘필름룩’을 구현하려 애쓰는 이유도 그가 엑스세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2000년대 초반은 나 같은 저항군들의 시대였다. 모두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녀도 끝내 필름을 지키고 싶어 했다. 나는 라이카 미니룩스와 미놀타 TC-1을 구입했다. 당대 최고의 포인트 앤 슛 카메라였다. 네이버에는 작은 필름 카메라 애호가들을 위한 카페를 만들었다. 거기 모인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필름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절대 디지털이 재현할 수 없을 거라 자신했다. 슬프게도 나는 굴복했다. 필름 카메라만 만들던 콘탁스가 2005년 내놓은 I4R을 구매한 순간이었다. 배신의 순간이었다. 겨우 150장을 찍으면 배터리가 ‘쫑’이 나지만 희한하게 아름다운 사진을 내놓는 그 물건을 손에 넣은 뒤, 나는 어쩌면 필름 카메라 시대가 끝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도 필름을 버리기 시작했다. 2010년대가 오자 박찬욱도 봉준호도, 심지어 이창동도 필름을 버렸다. 디지털카메라로도 충분히 ‘필름룩’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기술은 지나치게 빨리 진화한다.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자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쿠엔틴 타란티노만 남았다. 필름은 이제 돈 많고 고집 센 자들의 유물이 됐다. 나도 돈 많고 고집 센 자가 되고 싶었다. 3천원짜리 필름이 1만원대가 됐다. 현상소는 몇 군데 남지 않았다. 현상비도 스캔비도 치솟았다. 나는 고집이 세지만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가 놀란이 될 수는 없다. 타란티노가 될 수도 없다. 내 라이카와 미놀타와 콘탁스는 아이폰에 굴복하고야 만 것이다. 뭐 괜찮다. 엑스세대는 굴복의 세대라 굴복에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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