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리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GQ 오늘은 무슨 향을 뿌렸을까, 만나면 후각에 집중해보려고 했어요.
GR 오, 맞아요. 매일 다른 향을 뿌려요. 오늘은 ‘테싯 Tacit’을 왕창 뿌렸어요.
GQ 나무 향이 나는.
GR 네. 오늘 화보 시안을 보니까 멋쟁이 소녀 같은 느낌이어서. 으하하하.
GQ 멋쟁이 소녀 향을 입었군요. <플레이어2> 보는데 프로 드라이버 역할로서 핸들을 확 꺾어 드리프트하는 모습이 시원하긴 했어요.
GR 아, 사실 그건 위험해서 대역이 해주셨어요. 가만히 세워진 차에서 (핸들을 거칠게 흔드는 듯, 후진하듯 돌아보며) 막 이렇게 하는 척이 늘면 늘었지.
GQ 사실 저도 가늠은 했어요. 첫 대본 리딩 가는 길에 직접 카니발을 몰아보는 도전기를 봤거든요. 두 손으로 꼭 쥔 핸들, 앞만 보는 눈.
GR 흐하하하. 신기한 게 <치얼업> 촬영 끝나고 휴식기 때 운전을 마스터하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마침 <플레이어2>를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일석이조라고 생각하고 친오빠를 옆에 태우고 운전을 했죠. 일주일에 두세 번씩. 면허를 딴 지는 꽤 됐어요. 처음 운전대를 잡은 건 2020년이니까 한 4년 됐죠. 원래 겁이 좀 있었어요, 운전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데 그때가 아이돌 활동할 때였는데, 비활동기가 좀 길어지니 뭐라도 막 하고 싶은 거예요. 뭐든 다 하고 싶어서 운전도 배우고, 사랑니도 빼고, 할 수 있는 건 몰아서 다 했어요.
GQ 하고 싶은 바를 이뤘을 때 규리 씨는 기쁨을 어떻게 표출하는 편이에요?
GR 표출이요? 허···. 기쁜 일···. 저는 무언가 성취해도 좀 덤덤한 편인 것 같아요.
GQ 그러게요. 그걸 언제 느꼈냐면 <치얼업>으로 2022 SBS 연기대상에서 신인상을 받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라이브 방송했잖아요. 그 순간에도 참 덤덤한 거예요. 다르지 않은 하루를 끝내고 돌아가는 것처럼.
GR 으하하하하.
GQ 평생 딱 한 번 받을 수 있는 상이라고 의미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서는 무척 담담해서 그 감정의 기저가 궁금했어요.
GR 안으로는 많이 왔다 갔다 하고 긴장도 하는데 겉으로 표가 덜 나는 편 같아요. 신인상 수상은 당연히 너무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모든 일에 크게 기뻐하지도 크게 힘들어하지도 않는 편인 게, 그렇게 해야 모든 일에 좀 초연해지는 것 같아요. 기쁜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힘든 일도···, 그러니까 ‘프듀’(<프로듀스 48>)’ 때라든지 탈퇴(프로미스나인)하면서 이런저런 말이 많은 때도 있었죠. 그리고 저는 모든 일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운명론자이기도 해서 그냥 ‘나한테 일어날 일이었나 보다’, ‘감사하다’, 이러고 마는 것 같아요. “흐아악! 기뻐!” 이런 스타일은 아니에요.
GQ <프로듀스48>과 탈퇴 얘기는 금기어이려나 싶었는데.
GR 아뇨, 전혀. 멤버들 때문에 조심스러운 거지 저는 뭐. 아이돌 때의 커리어가 저는 정말 자랑스럽거든요. <아이돌 학교>도, ‘프듀’도,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프듀’ 때 제가 프로미스나인 대표로 나가게 되면서 많은 부담을 느꼈어요. 거기다 제가 큰 실수를 하고 돌아와서···.
GQ 큰 실수가 뭐였죠?
GR 음이탈을 엄청 크게 냈어요. 그날 돌아와서 진짜 펑펑 울었어요. 그때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고, 마음이 찢어질 것 같고 그랬는데, 지나고 나니 사람들은 금방 잊고 아무 일도 아닌 거예요. 저는 그걸 통해 더 발전한 부분도 있고 성장한 부분도 있어서, 어떤 일이 이렇게 일어나면 다 ‘무언가 배우게 하려고 일어나는 일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넘기게 됐어요.
GQ 그런데 내 삶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는 비관주의로 기울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표정을 보니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군요.(웃음)
GR 흐하하하하. 물론 열심히 살지 않을 때도 있어요.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런 때가 오면 또 그렇게 생각하죠. ‘지금 내게 이런 시기는 왜 온 것일까?’ 그리고 제 생각에 연기를 한다는 건 사람에 관한 행위이기 때문에 제가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늘어져 있는 순간도 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GQ 규리 씨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GR 우와. 어? 시집이에요? 저 진짜 좋아해요.
GQ “집 앞의 진짜 좋아하는 서점에서 시집 읽는 걸 좋아한다”고 들어서요.
GR 맞아요! 저 어제도 갔는데. 일반적인 서점이랑 들여다 놓은 책들이 달라요. 제 예상인데 그냥 사장님 취향대로 갖다 놓으시는 것 같아요. 그 취향이 저랑 너무 잘 맞고, 그런데 좀 서운했던 게 공간이 바뀌었어요. 책만 가득 있고 의자는 없고, 그래서 그냥 바닥에 앉아서 보는 곳이었는데 술책방으로 바뀌었어요. 이상하게 저는 제가 좋아하는 공간이 바뀌면 무언가 서운하더라고요. 그냥 그대로 남아줬으면 하는 마음? 아쉽네, 그랬죠.
GQ 오늘 이 시집으로 서운함을 좀 달래기를 바랍니다.
GR 감사합니다. 시는 제 멋대로 해석하기에 제일 좋은 문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 정서에 따라 매번 다르게 읽히잖아요. 같은 문장도 내 상태가 어떻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느껴지는 게 좋아요.
GQ 그래서 말인데, 여기 네 권의 시집 중 제목만으로 책을 골라주세요.
GR 하나만요? 저 이렇게 두 권이요.
GQ 그 책들을 후루룩 넘기면서 눈에 걸리는 문장을 읽어준다면요?
GR (3분이 넘어서도록 한참을 들여다본다.) 이거요. “엄마,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다시 한참 본다.) 얘기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요즘은 말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이 말이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고. 그런데 어릴 때부터 말수는 적어야 한다는 교육을 좀 받았어요.
GQ 아버지는 대령으로 예편하셨고 어머니는 음악 교사라고 하셨죠?
GR 네. 늘 “필요 없는 말은 굳이 하지 말아라” 하셨어요. 그거에 항상 반항하던 아이였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GQ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에 반대의 의미로 미국 유학을 보내신 부모님께 말 대신 1등한 성적표로 승낙을 받아낸 것도 반항의 일부였나요?
GR 하하하하. 약간 과장된 부분인데, 크게 반대하셨다기보다 엄마가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넓은 세상에서 이것저것 경험해보면서 진지하게 고민해봐라” 말씀하셔서 가게 된 유학이거든요. 그 말이 크게 반대한다기보다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보라는 의미로 느껴져서, 그래서 가서 생각해봤는데도 연기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엄마 아빠한테 말씀드렸죠. 나 진짜 연기가 하고 싶은 것 같다. 공부도 열심히 할 테니까 시켜달라. 공부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다. 성적은 선생님들도 배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수업시간 동안 전자사전 보면서 해석할 수 있게 해주시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수업 내용을 통째로 녹음해서 집에 가서 하루 종일 들으면서 해석하기도 했고. 그때 제 성적표 보면 처음에는 다 C, C+ 이래요. 그러다 점점 귀가 트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공부했던 것 같아요. 그냥, 뭐 하나 이뤄가야 하는 게 있으면 미친 듯이 그것만 보고 하는 스타일이기는 해요.
GQ 소극장에서 본 연극이 규리 씨 마음을 동하게 했다는 건 알아요.
GR <러브 액추얼리>라고 영화와 제목만 같고 완전히 다른 내용의 연극이었어요. 정말 이 테이블만 한 작은 무대였어요. 연극을 보고 소감을 써야 하는 과제 때문에 우연히 본 거였는데, 제게는 연기가 사람을 끝없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알면 알수록 어렵고, 정답도 없는 일 같았어요.
GQ 요즘 스스로에게서 발견한 지점, 관찰한 내용이 있나요?
GR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생각. 겁이 없는 것 같다가도 엄청 많고, 단순한 것 같다가도 복잡하고, 변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가도 청개구리 같기도 하고. 흐흥. 내가 나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해요. 내가 나를 잘 모르겠다.
GQ 그럼 다음 책도 넘겨볼까요?
GR (역시 3분이 넘도록 한참 들여다본다.) 이거. “다정한 척 가볍게”.
GQ 지금 장규리는 왜 그 문장이 좋았을까.
GR 음···.
GQ 말 안 해도 돼요.
GR 안 할래요.(웃음)
GQ 좋아요. 지난주 첫 방송은 규리 씨도 ‘본방사수’ 했어요?
GR 네. 집에서 엄마랑 같이 봤어요. 가족과 저의 연기를 같이 보는 건 되게 어려운 일 같아요.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저 나올 때마다 으아아아악 이러면서 봤어요. 엄마 뒤에 숨고. 앞으로도 웬만하면 같이 보려고요.
GQ 같이 안 본다는 게 아니라요? 발가벗겨진 기분이라면서요?
GR 제일 가까운 사람이랑 보는 걸 견뎌내야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누군가에게 저를 보여주는 게 저의 직업인데 그게 아직까지 어색하다는 건···, 익숙해져야 하는 거니까요.
GQ 견뎌낸다는 말이 좋네요. 참, 고른 시집 제목 좀 읽어주세요. 옮겨 적을게요.
GR (씩 웃는다.)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