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배우 칼럼 터너는 축구를 좋아한다. 서른이 되기 전엔 비싼 옷을 사거나 고급 레스토랑에 갈 생각이 없다. 술도 탄산음료도 안 마신다. 뉴욕에선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로 산다. 영화 촬영을 끝내고 런던으로 돌아가면 우선 마크 앤 스펜서 슈퍼마켓에 가서 초콜릿칩 쿠키부터 사 먹을 생각이다.
세개의 층으로 나뉜 브루클린의 어느 집. 초가을 빛이 깊게 들어왔다. 푸른 산호초색 눈동자를 가진 배우 칼럼 터너가 그 집 지하실로 내려왔다. 튼튼하고 다부진 몸. 인공적인 멋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들어서자마자 간단히 인사를 나누곤, 서서 과일과 요구르트를 먹었다. 첫 컷을 찍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칼럼은 다짜고짜 양탄자에 누워 몇마디 대사를 읊었다. 창문 틈으로 청명한 빛이 더욱 환하게 들어왔다. 이 순진하고 건강한 얼굴의 청년은 모델로 시작해 영화배우가 되었고 영국 드라마 <리빙>, <글루>같은 TV 시리즈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렸다. <퀸 앤 컨트리>와 <그린룸>, <빅터 프렝켄슈타인> 같은 영화 개봉도 앞두고 있다.
이런 집에서 촬영해본 적 있어요? 네. 그런데 이 집은 좀 특별하네요. 예술가의 집이라 그런지 그림이 정말 많아요. 미술관처럼 매혹적이에요.
뉴욕에선 어디서 살아요?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에어비앤비로 구했어요. 제 집은 아니지만 예전에 공장이었던 건물이라 넓고 좋아요. 집에 들어서면 두 화살표가 크로스로 겹친 모양의 장식이 보이는데 그게 꽤 멋있어요. 조명도 아늑하고, 살림이 없어서 휑하지만 맘에 들어요.
영화 촬영 때문에 뉴욕에 왔죠? 폴란드계 미국인 역할을 맡았고, 주로 폴란드어를 써요. 그린포인트에 집을 얻은 이유도 이곳에 폴란드 사람이 많이 살기 때문이에요. 덕분에 폴란드 음식과 문화, 사람들을 수월하게 엿볼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단어가 뭔지 들리기 시작했거든요. 지금은 아담 리온 감독의 <트램스>라는 영화를 촬영 중이에요.
뉴욕 어디서요? 주로 뉴욕 업스테이트에서 촬영하고 퀸즈, 맨해튼에서도 해요. 맨해튼과 업스테이트에서의 장면은 완전히 달라요. 파격적으로요. 개인적으로 아담 리온 감독님의 영화가 세상에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김미 더 루트>라는 영화를 아나요? 아담 리온은 정말 자세하고 섬세하게 영화를 만들어요. 촬영 장소와 그 분위기를 그대로 화면에 담는 데 특출나요.
원래 모델이었죠? 네. 어느 날 누가 갑자기 물었어요. 혹시 모델에 관심이 있냐, 괜찮다면 내일 파리에 가지 않겠냐고요. 전 바로 그럽시다,라고 대답했지요.
워낙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다면서요? 엄청난 첼시 FC의 팬이에요. 축구장이 창문에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살았어요. 첼시 팀이 골을 넣은 걸 사람들의 함성을 듣고 알 수 있었죠. 엄마는 한 번도 그 구장 티켓을 사주지 않았어요. 비쌌거든요. 그래서 매주 토요일 첼시가 게임을 하면 창문에 귀를 딱 붙이고 앉아 있었요. 축구선수와 배우는 비슷한 점이 많아요. 아무리 열렬한 환호를 받는 축구선수도 필드 위에서 잘하지 못하면 곤경에 빠지죠.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카메라 앞에서 최대한 발휘해야만 하죠. 그 두 분야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요.
런던 첼시 지역에서 자랐군요. 네. 첼시의 공동주택에 살았어요. 엄마는 싱글맘으로 절 키웠고, 전 외동아들이에요. 이복 동생들이 있긴 하지만 같이 살지 않아서, 그곳 친구들과 더 가족처럼 가까웠어요. 한 스무 명쯤 돼요. 그 친구들과는 맨날 축구하고 놀았어요. 공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죠. 전 진짜로 축구선수가 되려고 했어요.
축구만 하고 살기엔 런던은 여러 면에서 놀 게 너무 많지 않나요? 열 여섯살에 처음 클럽에 가봤어요. 엄마 때문이었죠. 엄마는 1980년대부터 밤 문화에 능통한 분이죠. 클럽에는 엄마 따라 엄청 다녔어요. 그 다음엔 제일 친한 친구랑 둘이서 마치 등교하듯이 드나들었고요. 그래서 금요일 밤이면 항상 가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어요. 그렇게 2~3년을 보냈는데, 더 이상 재미없더라고요.
엄마가 클럽을 데리고 갔다는 게 생소하네요. 엄마는 1980년대 영국에 붐을 이룬 뉴에이지 운동에 참여한 사람 중 한 명이에요. 낭만주의 운동이라고도 부르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집에 유명한 사람이 많이 드나들었어요. 다 엄마의 친구들이었고요. 흥미롭고 격동적인 게 뭔지 그때 알았죠.
우리가 알 만한 사람도 있나요? 비세이지 밴드의 스티브 스트레인지가 우리 집에 잠시 살았어요. 작곡도 많이 하던 사람이고, 보이 조지를 발굴하기도 했고요. 제가 아홉 살인가 그랬는데, 그때 유명세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어요. 유명인으로 사는 삶이 즐거워 보이지만은 않더라고요. 그렇지만 그 맛을 알게 되면 빠르게 중독되는 것도 짐작이 가요.
그렇지만 당신도 배우가 됐잖아요. 누구든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죠. 그럼요. 누군가 먼저 말을 걸고 칭찬을 해주는 건 고마워요. 그런데 어색할 때가 더 많아요. 얼마 전엔 비행기가 연착돼서 꽤 오랜 시간 공항 게이트 앞에 앉아 있었거든요. 그때 어떤 애 두 명이 절 알아보고 다가왔어요. 그제야 제가 누군지 기억이 난 사람들이 제게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다들 용무가 끝나면 홀연히 떠나더라고요. 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고요. 그 기분이 참 이상했어요. 꼭 어렸을 때 학교 버스 안에서 친구들이랑 실컷 장난치며 놀다가 하나 둘씩 자기 집에 내리고, 저만 남아 마지막 정거장까지 가는 기분이었어요.
영국 드라마 <리빙>으로 많은 인지도를 얻었죠? 저도 그 드라마를 봤어요.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여자와 실제로 사랑에 빠질 수 있나요? 물론이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는 여자에겐 빠질 수밖에 없죠. 그렇지만 극중에서 상대역은 결혼한 사람이었어요. 나 좋자고 결혼을 깰 수는 없어요.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래요.
<리빙>은 겨우 세 편밖에 안 되지만, 소재가 파격적이어서 그런지 강하게 기억나요. 한국의 어떤 블로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칼럼 터너는 사진보다 꼭 움직이는 걸 봐야 한다,라고. 왜일까요?
전 그때 데뷔한 지 8개월밖에 안 된 신인이었어요. 제작자들은 큰 모험을 했지요. 게다가 영국 최고의 배우 헬렌 맥크로리의 상대역이었으니까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고, 이 드라마 이후 연기는 제가 하고 싶은 전부가 됐죠. 한국에서도 봤다니 신기해요.
요즘 대한항공 기내에선 당신이 주연한 <퀸 앤 컨트리> 영화도 상영 중이에요. 영화 속에 나왔던 동화 같은 숲은 대체 어디죠? 존 보어맨 감독님이 실제로 자란 셰퍼튼이란 곳이에요. 그 집도 감독님 가족 소유고요. 내부는 바뀌어서 집 안 장면은 루마니아에서 찍었어요. 이 영화는 감독의 실제 이야기예요. 감독님이 젊었을 때 수영을 했던 곳에서 제가 같은 걸 연기한다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존 보어맨 감독님이 생애 마지막으로 연출한 영화라고 밝혔어요. 저에겐 첫 상업 영화였고요. 그런데 <증오>라는 영화 봤어요?
그게 뭐죠? 프랑스 영화인데, 제가 누구에게나 꼭 보라고 권하는 영화죠. 그때 여자친구는 제가 그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제 인생이 점차 변화하는 걸 느꼈다고 할 정도였어요. 마티유 카소비츠가 감독한 영화고, 뱅상 카셀도 나와요. 추상적이지만 현실을 제대로 담은 영화예요. 그게 강한 메시지로 머리에 박혀 있어요. 에팔탑이 보이는 파리 시내 한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며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갑자기 숫자를 세기 시작해요. 3, 2, 1. 조명은 그대로고 배우들은 걸어나가요. 그리고 2초 후에 그 배우들이 보이지 않을 때 조명이 꺼지죠.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화예요. 뜬금없고 아름다운 영화예요.
인스타그램은 해요? 트위터는 해요. 잠들기 전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트위터부터 보죠. 이유는 딱 하나예요. 검색창에 CFC를 치기 위해서요. 첼시 축구단과 관련된 모든 뉴스를 읽어요. 이게 제가 휴대전화를 오래 들고 있는 유일한 시간이에요.
뭔가를 보기만 하는 거네요? 아티스트나 작곡가, 뮤지션 같은 직업은 하고 싶은 거나 하고픈 말을 자유롭게 SNS에 써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배우는 좀 미스터리한 데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전 사람들이 저를 보고 ‘아 어느 어느 영화에 나온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게 좋지, 내가 팔로하고 있는 칼럼 터너라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해 봤자 제가 만든 토스트 사진이나 올릴 게 뻔해요.
쇼핑 좋아하나요? 전 돈을 잘 안 써요. 제가 맡은 역할처럼 평소에 옷 입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플립 플롭이랑 하얀색 양말도 많이 신고 다녀요..
플립플롭에 양말을 신는다고요? 네. 지금 그린 포인트에선 그게 유행이에요. 웬만한 폴란드 애들은 다 그러고 다녀요. 그걸 ‘패셔너블’하다고 하던데.
슬리퍼 아닐까요? 플립플롭은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에 줄을 끼워 넣는 신발이에요. 아, 그러네요. 그럼 슬리퍼네요. 슬리퍼와 흰 양말. 그런 걸 잘 모르겠어요. 런던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일한 적도 있는데 말이에요.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네. 그때 제 친구가 옷은 그 사람의 첫인상을 만드는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을 꼭 기억하고 다니죠. 내가 뭘 입느냐가 내 자신이 되는 거예요. 그 친구는 지금 찰리 캐슬리 헤이포드라는 브랜드를 하고 있어요. 혹시 캐슬리를 알아요?
그럼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는걸요. 그 친구 아빠랑 같이 하는 브랜드 맞죠?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요.
열아홉에 우린 같이 일했어요. 그때 같이 일했던 사람 중엔 지금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와 <히어로> 매거진의 에디터도 있었어요. 신기하죠.
영국에서 그렇게 친구끼리 놀았군요. 지금은 다 맡은 일이 정확하네요. 지금 런던에 가면 뭘 하고 싶어요? 공원에 가야죠. 영국은 공원이에요. 첼시 게임을 보러 가는 것도 좋겠네요. 그리고 마크 앤 스펜서엔 꼭 가야 해요. 거기 화이트 초콜릿칩 쿠키 먹어봤어요?
- 에디터
- 강지영, 김경민
- 포토그래퍼
- 신선혜
- 모델
- Callum Turner
- 헤어 & 메이크업
- Kenshin Asano @ L'Atelier NYC
- 프로듀서
- 박인영 @ Visual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