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도 대담했던 녹색이 골프장의 시든 잔디 색으로 바래기 시작했다. 담장 아래 인공적인 화단은 아직 남은 에너지로 형형하지만, 측백나무의 흰빛은 버터처럼 누르스름해졌다. 풀들은 장난처럼 시야를 깨운다. 진부하고 오래된 질문. 잡초는 왜 인간사에 왕성하게 개입하는 걸까? 그런데 왜 이름이 없을까? 잡초는 자연의 일종일까, 인간이 만든 하찮은 것 일까? 단지 동식물학적인 문제일까, 대단한 문화적 창조물일까? 어찌 됐건 시대의 현자라도 길을 가다 말고 잡초에 대해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잡초는 열어볼 호기심도 안 생기는 스팸 메일 같아서. 하지만 스팸 메일도 어떤 신진 사기꾼에겐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단면이자 현대의 학구적 이론으로 비춰질 것이다. 결국 근본주의 기독교인들만이 설명할 수 없는 침입자들을 제대로 이해할 것이다. 잡초는 여호와가 인간에게 벌로 내린 에덴 동산의 가시니까.
잡초가 예쁜지 아닌지는 관점에 달려 있겠으나, 누가 봐도 못생긴 사람들이 잡초 없는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문명을 탄생시킨 야생풀은 하나도 안 남을 텐데. 키 큰 명아주도, 몸에 좋다는 쇠비름도, 애처로운 제비꽃도 안 보일 텐데. 국화도 씨가 말라 예식장에서 부케 던질 때 뭔가 좀 앙상할 텐데. …뭐, 적어도 세상의 의학 물질 절반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안 그런 척해도 사실 모두의 마음속 정원에는 장미와 글라디올러스를 심는 꿈이 만발한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을, 곤충의 밀원이 되는 브들레아를, 아쉬운 대로 싸먹을 상추를…. 하지만 사람 좋은 곤충학자조차 잡초는 생각도 안 할 것이다. 유충의 먹이가 되는 작물과 서식지를 가린다 하여.
잡초의 실용적 정의는 ‘그 밖의 것’. 제일 흔한 정의는 제자리가 아닌 곳에 자란 식물. 산삼이라 한들 튤립 밭에 있으면 뽑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초대받지 않은 간작 식물은 경계 넘어 종종 지형학적이거나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대부분 지구의 방기된 지역, 화산의 자갈 비탈, 만조의 조석점潮汐點, 강풍으로 망가진 숲에서 진화된 종이기 때문에. 쐐기풀은 축축한 들판으로 움직인다. 덩굴식물은 쉽게 울타리를 오른다. 개망초 무리는 황무지의 거친 돌무더기로 도망간다. 잘 관리된 수목원에 침입한 불량목不良木이 가지마름병으로 죽으면 빈 공간은 곧 다른 불량목으로 채워진다. 잡초는 수수께끼 같은 종착역으로부터 철조망을 넘어온 생존 자이며 영리함, 적응성, 유동성을 무기로 스스로를 경작한 식물인 것이다.
(잡초를 없애 지구를 황량한 갈색 행성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은 먼저 화성에 가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래봤자 첫 번째 승객이 될 돈도 없겠지만.)
지구에 존재하는 일부가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던 종이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솔직히 인간이 제일 그렇다. 그럴 때 이런 보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식물 카테고리가 있다는 게 뭔가 위로가 되고, 암튼 엄청 즐겁다.
- 에디터
- 이충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