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여전히 돈다. 그러나 2024년 여름, 세계는 ‘파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파리는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거리는 나뒹구는 바나나 껍질 하나 없이 깨끗했고, 도시의 타투 같던 그라피티는 흔적을 지웠다. 꼬리를 문 차의 행렬과 끈적한 교통 체증은 올림픽으로 잔뜩 상기된 파리의 얼굴이었다. 이번 맨즈 위크는 프랑스 선거, 페트 드라 뮈지크, 보그 월드 등 각종 행사가 겹쳐 다층적 긴장감이 혼재되었던 터. LV 쇼가 열리는 날도 꼭 그랬다. 하늘엔 몰려오는 먹구름과 저물기를 거부하는 해가 공존했다. 거세지는 바람만큼 휘날리는 국기, 북적이는 세계 시민들, 고조되는 기대감···. 증가하는 엔트로피 속 부동을 유지하는 건 중앙의 거대한 금속 지구본이 유일했다. 퐁네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트라이움푸스 코스모’의 멜로디가 질서를 회복하는 신호탄으로 울려 퍼졌다. 드론 카메라의 궤적보다 훨씬 커다란 볼륨으로!
퍼렐의 지난 쇼들은 미국적인 재미가 다분했다. 그는 하와이안 항해라든가 웨스턴 카우보이 같이 로컬한 요소를 팬시한 환상으로 펼쳐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2025 S/S 쇼에서 꺼내든 건 욕망을 부추기는 색색의 만화경이 아닌 초고배율 망원경이었다. 무중력의 고요 속에서 바라본 행성. 그 경건한 풍경의 아름다움을 그린 쇼. 멀리서 본 인류와 가까이 확대한 생태계의 조화로운 창의성을 탐구, 아니 탐사하는 여정. 지극히 보편적이나 지금만큼 보장된 시기가 없는 주제, 지구. 아마도 우주에서 보냈을 초대장은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로 GPS 좌표를 안내했다.
다시 쇼장. 컬렉션은 과장되지 않은 실루엣과 팔레트에 세밀한 장식을 수놓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조종사, 항해사, 외교관, 탐험가의 기능적이면서 댄디한 룩. 대륙과 바다와 전 인류의 피부색에서 추출한 컬러. 핀이 달린 항공 모자, 에이전트 베레모, 나침반과 휘장 브로치, 외계인과 행성 키링, 러기지 태그 같은 액세서리는 스코프를 우주로 넓힌 여행 정신을 보여준다. 그래픽은 진화했다. 크리스털로 반짝이는 다모플라주, 뱀피의 스네이크-오-플라주, 세계 지도를 변형한 맵-오-플라주가 등장했다. 축구공 클러치부터 플렉시글라스 쿠리에 로진까지 백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는 즐거움도 쏠쏠한 쇼였다. 패션계가 준비한 성화 봉송은 이 땅에 존재하는 다양성과 활기를 웅장하게 노래했다. LE MONDE EST À VOUS, 세상은 당신의 것. 세계의 발길이 파리로 향하는 현 시각, 퍼렐은 가장 시의적절한 예고편을 우리에게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