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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술 한 병이 떠내려온다면?

2024.08.06전희란

술과 여행에 취한 애호가들에게 물었다. 무인도에 떠내려왔으면 하는 단 한 병의 술, 그리고 갇히고 싶은 섬.

포춘 백, 메종 마르지엘라. 카프스킨 샌들, 에르메스. 배니티 박스, 모이나.

① 발베니 12년 더블우드
최지욱(아티스트)
몇 주 전 캠핑에서 발베니 12년 더블우드를 맛있게 마셔서인지, 무인도에 갇힌다면 발베니 생각부터 날 것 같아요. 너무 사치인가요? 제주에 형제섬이라는 스노클링하기 좋은 섬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왕 갇힌다면 형제섬에서 좋아하는 바다 수영이나 실컷 하고 싶어요.

② 조니워커 그린 레이블
이민규(바텐더, 연남마실 대표)
무인도에서 술이라. 왠지 쓸쓸하면서도 묘한 해방감이 동시에 느껴지네요. 거기에 영화처럼 바다에서 떠내려온 술 한 병이라면 바닷가와 어울리는 위스키, 조니워커 그린 레이블이 좋겠어요. 바다 내음을 머금은 몰트와 고소한 몰트가 적당한 시간 동안 잘 익은, 무엇보다 바다와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마시면 가장 잘 어울릴 블렌디드 몰트위스키. 우리 땅의 동쪽 끝, 아무나 쉽게 갈 수 없는 거친 돌로 이루어진 독도 땅을 밟고 바다를 보며 굳이 누군가에게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다만, ‘단 며칠만’요.

③ 올드 그랜드 대드 114
황욱(영화 <매쉬빌> 감독)
지중해 섬에 갇혀 즐기는 망중한. 지중해와 버번이 자칫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만. 버번 보틀의 디자인을 보면 단번에 <대부(god father)>가 절로 떠올라요. 이렇게 타격감이 좋고, 자기 주장이 강한 고도수 버번을 맛보면 입담이 화려한 시칠리아 사람들과 밤새 술에 취해 수다를 떠는 기분이 들걸요?

④ 몽키47
임승준(볼보 마케터)
진의 참맛을 알게 해준 몽키47. 유니크하고 매력적인 향 덕분에 토닉과 섞어 마시면 여름철에 제맛이죠. 이 술과 함께 어딘가에 갇힌다면 미국 남부 섬 키 웨스트 Key West였으면 해요. 대학 시절에 미국 대륙 횡단 중 캠핑카로 방문했던 곳인데, <미션임파서블> 촬영지로도 유명하죠. 그때 다짐했어요. 노후는 반드시 이곳에서 보내리라. 멀지 않았네요.(웃음

⑤ 카발란 증류소 DIY
장경진(<그래서 저는 내추럴 와인이 재미있습니다> 저자)
혁오 & 선셋 롤러코스터의 ‘Young Man’에 이런 가사가 나와요. “슬픔은 늘 떼로 온다 / 기쁨은 늘 스쳐 간다”. 스쳐 가는 기쁨으로 슬픔을 견디어내잖아요. 이 위스키는 잠깐이지만 큰 기쁨이었어요. 2019년에 카발란 위스키를 만드는 증류소를 찾아간 적이 있어요. 카발란을 사랑해서 대만에 갔고, 좋은 대만 친구도 만났죠. 카발란 증류소에서 원액을 직접 블렌딩해서 DIY 위스키도 만들었어요. 이 위스키가 우연히 떠내려온다면 스쳐 간 기쁨처럼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될 거 같아요. 그 무대가 판텔레리아섬이길 바라요. 시칠리아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북아프리카와 더 가까운, 독특한 와인 ‘세라기아 Serragghia’가 나는 섬. 멋진 와인의 향기가 폴폴 나는 외딴섬이라면 갇혀도 행복할 것 같거든요.

⑥ 진맥소주 53도
서다희(여행 칼럼니스트)
낙동강의 윤슬 사이를 유랑하다 떠내려온 밀로 빚은 진맥 소주 53도. “이게 웬 횡재?” 하고 잔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데, 이곳이 진맥 소주를 빚는 ‘치유의 섬’ 맹개마을이었다는, 이런 제 상상 너무 엉뚱한가요? 갇힌다면 그곳은 독일 프라우엔인젤이었으면! 마침 독일에도 밀 증류주가 있는데 밀술 맛을 아는 독일인과 함께 진맥 한잔하면 좋을 것 같아요. 게다가 호수 빛깔이 술맛 나게 너무 아름다워요.

실버 수트 케이스, 리모와. 블랙 헤드폰, 몽블랑. 펜디 × 드비알레 마니아 스피커, 펜디. 블루 LV 크랩 백 참, 루이 비통.

① 미미사워
안진석, 김도연 부부(플레이버다이닝)
사이다로 바다를 만든 것처럼 청량하고 투명하고 반짝이는 지중해 몰타.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몰타의 블루 라군에 갇힌다면 라벨 컬러마저 바다 빛을 연상시키는 미미사워 맥주를 마시고 싶어요. 홉과 쌀로 만든, 청량감과 산미가 예술인 사워 맥주죠. 상큼한 청포도 향이 사워 맥주에 거부감을 지닌 사람까지 넉넉히 품어요. 뜨거운 햇살에 이만한 술이 또 있을까요?

② 샤토 디켐 2002 at 에노테카 코리아
정지현(딩고 부사장)
덥지 않은 방향으로 배를 몰다가 멈춘 곳이 하필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된 노르웨이 베가 Vega 제도의 ‘Igerøya’섬. 낮고 짙은 하늘 아래 조용하고 검소한 섬, 단단한 바위 언덕 위로 잿빛 오두막이 하나 보이고, 배에서 내려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한 귀퉁이에 파도에 휩쓸려온 듯한 나무 상자가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열어보니 깨진 병들 사이로 겨우 살아남은 짙은 빛깔의 샤토 디켐! 오두막엔 여행자를 위한 셸터인 듯 작은 통조림들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LP 턴테이블이 있어요. 비틀스의 ‘Norwegian Wood’ 음악을 틀고, 가사 속 상대가 건네준 와인은 더 쌉쌀한 와인이 아니었을까 상상하며 달콤하고 산뜻한 디켐을 아껴 마시는 거예요. 여기까지, 슈퍼 ‘N’인 제 상상 어때요?

③ 카로니 네이비 럼 엑스트라 스트롱
손석호(바텐더)
무인도에서 무턱대고 배나 비행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뭐라도 하면서 지낼 것 같아요. 아마도 섬을 빠져나오기 위한 배를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을지? 그때 이 카로니 네이비 럼 한 병만 있으면 배 한 척 뚝딱 만들어서 바로 항해를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바베이도스 Barbados에 표류된 뒤, 배를 만들어서 토바고 Tobago섬까지 가는 거죠!

④ 하쿠슈 18년
이한나(여행, 호텔 홍보)
무인도에 떠내려오는 게 술이라면 하쿠슈, 그 중에서도 피티드 몰트였으면 좋겠어요. 또 그곳이 마침 몰디브의 이름 모를 섬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W몰디브에서 보트로 10분 거리에 W몰디브가 소유한 파티 용도의 섬이 있어요.밤에는 별빛을 안주삼고 낮에는 해수면에 파도가 부서지는 반짝이는 바다를 안주삼을 수 있는 곳. 하쿠슈는 특유의 미네랄 뉘앙스가 먼저 떠오르지만 청량함과 스파이시하면서 가벼운 스모키함이 몰디브 바다와도 닮았어요.

⑤ 피에르 비즈 사브니에르, 로셰 오 몽
이선민(푸드 저널리스트)
루아르 슈냉 블랑_짜릿한 산미와 은은히 올라오는 복숭아 향, 돌에서 나는 광물의 느낌까지 복합적으로 느껴지는 와인이에요. 햇살 내리쬐는 날, 은은한 달달함 한 스푼을 더해주죠. 한 병 쥐고 갇히고 싶은 곳은 화려하지 않고 일상의 바다를 경험할 수 있는, 이를테면 이탈리아 사르데냐 같은 곳이면 좋겠어요. 바다 향이 묻어나는 타일이 가득한 이탈리아 시골집에서 아침에 근처 시장에서 사온 신선한 해산물과 레몬을 가득 올린 한 끼를 먹으며 조금은 투박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섬.

GG 수프림 캔버스 캐빈 트롤리, 구찌. 보틀 홀더, 모이나. 생-루이 타미 컬렉션 샴페인 글라스, 에르메스. LV 팔라스 슬리퍼, 루이 비통.

① 루이 로드레 크리스탈 2008 at 에노테카 코리아
이정윤(푸드 칼럼니스트)
어차피 죽을 텐데, 하룻밤이라도 삶의 축제, 산다는 것의 행복을 다시 느껴보았으면. 샴페인 루이 로드레 크리스탈 2008은 그 자체로 축제 같은 술이라 어디에서 마셔도 입 안에 축제가 벌어질 거예요. 그래도 이왕이면 인도양의 어느 무인도라면 더 좋겠어요. 갇힌다면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우리가 상상하는 바로 그 ‘무인도의 이데아’ 같은 이미지의 섬이면 더 영화적일 테니까요.

② 클라세 아줄 골드
오준탁(셰프)
울릉도에 갇혀서 도화 새우와 약소를 잡아서 먹고 있다가 ‘이것만 먹기에는 아쉽다’ 하는 와중에 클라세 아줄 골드가 떠내려온다면? 적어도 술을 다 마실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갇힌 게 아니라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고 싶지 않은 지상 낙원이 될 것 같아요. 클라세 아줄 골드가 지닌 아가베 시럽, 청사과, 오렌지, 무화과, 건포도, 아몬드와 호두 아로마에 반짝이는 금빛을 품은 부드러운 황색은 마치 섬의 석양처럼 아름답죠. 이 술과 함께 저무는 삶이라면, 얼마나 낭만적일지.

③ 야마자키 18년
전희란(에디터)
야마자키를 비롯해 산토리 위스키를 총괄하는 치프 블렌더 신지 후쿠요는 인터뷰 중 이렇게 말했죠. “좋은 위스키란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위스키다.” 야마자키 18년을 마신 뒤 이 술이 18년이란 세월을 얼마나 값지게 보냈는지, 경탄할 수밖에 없었어요. 실은 미즈나라 캐스크 캐릭터가 또렷한 야마자키 18년 100주년 에디션이라면 더 좋겠지만 이미 품절된 그 술이 떠내려오는 것보다 무인도에서 구출되는 게 더 빠르겠죠? 나오시마에서 이 술을 열고, 일본의 오래된 가옥에서 느껴지는 쿰쿰
한 정겨움, 그럼에도 신선하고 스파이시한 다채로운 팔레트로 밀물처럼 입안을 적시면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내 편이 될 것 같아요.

실버 브리프 케이스, 리모와. 레미 샴페인 플루트, 랄프 로렌 홈. 생-루이 타미 컬렉션 컵, 블루 보틀 홀더, 모두 에르메스.

① 와일드 터키 101 12년
이규성(바 로스트앤파운드 대표)
더 귀하고 맛있는 버번 위스키도 많지만 더 바랄 것 없이 꽉 찬 12년의 와일드 터키 버번 같은 친구와 함께하고 싶네요. 갇히고 싶은 섬···. 그래도 미국 술인 버번인데 하와이에서 갇혀 보겠습니다.

② 키노비 교토 드라이 진
김정아(헝그리 투어리스트 한국 대표)
일본의 고도 교토에서 소량 제조하는 키노비진은 부드러워서 스트레이트로도, 진토닉으로도, 007 제임스 본드가 즐겨 마신 마티니로도 맛있어요. 이 진을 만들 때 주니퍼 베리, 녹차, 시소, 산초와 같은 11개의 재료를 6개 맛으로 분류해 맛의 밸런스를 맞춰요. 키노비와 어울릴 섬이라면, 유타칸 반도 근처 섬. 에메랄드빛 물에 잔잔하며 유타칸 반도의 지리적 특징으로 세노테 cenote가 형성된 파란 바다, 이곳에서 진을 마시며 떨어지는 노을을 보고 있다면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네요.

③ 이와5
강정태(건축 디자이너)
마크 뉴슨이 병을 디자인하고 레이블에 서예가 기노시타 마리코의 필체가 담긴 니혼슈 이와5. 아무리 무인도에 갇혔대도 미적 탐닉과 욕망은 놓치고 싶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이 술을 마신다면 시칠리아. 갇힌다고 해도 섬 전체가 제 소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곳 ‘터키인의 계단 Stair of the Turks’ 때문에 무리한 욕심을 내어봅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건축물인 터키인의 계단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스케치를 하는 호사스러움을 기대해봅니다.

④ 뵈브 클리코 라 그랑 담 2015
정리나(푸드 디렉터)
위대한 여성이라는 뜻의 ‘라 그랑 담’은 열심히 살아온 내 자신을 위한 달콤하고 뿌듯한 보상이 될 것 같아요. 특히 가장 최근 빈티지 라 그랑 담 2015를 위해 이탈리아 디자이너 파올라 파로네토 Paola Paronetto가 만든 색조 팔레트 패키지를 보고 있으면 시각적 따분함도 줄어들 것 같고요. 지중해성 기후의 풍부한 해산물, 에트나 화산의 영양으로 미네랄 가득한 토양에서 자란 독특한 풍미의 포도, 올리브를 비롯해 먹거리가 진진한 시칠리아에 이 술과 함께 갇히고 싶네요.

⑤ 파 니엔테 나파밸리 샤도네이
모미지(한화 프리미엄 마케터)
포지타노로 가는 길, 비행기가 추락해 소렌토에 불시착.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과 안전한 카프리섬으로 가기 위한 배를 예약하고, 카프리섬에 도착하기 전 폭풍우를 만나 배가 전복되고,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카프리섬에 나혼자 남은 겁니다. 두려웠지만 아침이 되니 멋진 경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요. 저기 보이는 푸른 동굴, 해안 절벽과 지중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생각합니다. 파 니엔테 나파밸리 샤도네이(파 니엔테는 ‘근심 걱정 없다’는 뜻을 지녔다) 한잔?

⑥ 레이지댄싱서클
양유미(한국술 양조자)
태초의 술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순수한 즐거움이 담긴 술이에요. 시름을 잊게 하는 경쾌한 탄산과 야생의 산미, 엷은 단맛까지 한 입 먹으면 키야 소리가 절로 나와요. 효모가 살아 있으니, 반은 남겨 무인도에 있는 과일에 부어 또 술을 만들어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겠죠. 이 술과 오키나와 고우리섬에 갇히면 좋겠어요. 무인도는 아니지만, 관광지인 오키나와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섬이죠. 고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술과 좋은 합을 낼 것 같아요.

    포토그래퍼
    김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