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구치 켄타로 그리고, 사랑.
GQ <남은 인생 10년>, <너와 100번째 사랑>, 이번 <사랑 후에 오는 것들>까지 모두 ‘시간’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인 것 같아요. 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
SK 시간은 가끔 잔혹하고, 가끔 행복을 가져오는 것 같아요. <남은 인생 10년>에서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성을 사랑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남은 여생이 정해져 있다면 하루하루 소중히 살아야 한다고, 작품은 말하죠. 저도 물론 그에 동의하지만, 사실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아, 오늘은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라고 할 만한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100퍼센트를 살 수는 없잖아요. 시간은 유한하지만, 끝이 정해져 있는 마지막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건, 얼마나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무의미할수록 좋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 안에 반짝이는 순간이 한번은 찾아올 테니까요. 연기를 대하는 제 자세도 비슷해요. 연기하는 순간 외엔 힘을 쭉 빼고, 릴랙스하는 시간을 중시해요. 갭이 크죠. 그렇게 함으로써 저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슬레이트를 치는 순간 진심으로 임할 수 있어요. 무의미한 시간을 잘 보내기 때문에 스위치를 켤 수 있는 거죠.
GQ 무의미한 시간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요?
SK 자주 질문을 받아요. “사카구치 상의 꿈은 무엇인가요? 목표가 있나요?” 저는 아주 넓은 범위의 목표만 두고, 결정적인 것은 만들지 않으려고 해요. 10년 후의 나를 그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골대가 있으면 골대를 향해 가게 되니까 멋진 일일 테지만, 10년 후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목표 지점이 넓으면 어디로 갈지 갈팡질팡하면서 여기저기 들르며 길을 돌아가게 되겠죠. 그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비록 무의미한 일일지라도 그 당시의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걸어온 10년을 뒤돌아볼 때 빙빙 둘러 걸어온 그 길은 직선 하나가 아니라 넓은 길이겠죠. 그렇지만 그 방법이 제게는 더 맞아요. 둘러 가는 시간, 둘러 가는 저를 좋아할 수 있다면 멋진 일이죠. 저는 자기애가 강한 것 같아요. 저를 너무 좋아해요.(웃음) 바쁜 현대 사회를 살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좋아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GQ 자기애가 강하다는 건 어떨 때 느껴요?
SK 친구나 선배들에게 자주 들어요. “켄타로는 스스로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실은 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진짜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남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를 좋아하고 애정이 흘러넘쳐야 그것을 본인이 아닌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신을 좋아하지 못하면, 채워지지 않으면 타인에게 나눠주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요. 아무래도 먼저 자신의 빈 공간을 채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만약 자신의 ‘Capacity’가 애초에 텅 비어 있다면, 자신을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싫어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좀 아까 제가 저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저는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줄 수 있는 능력도 꽤 높다고 느껴요. 이것이 제게 잘 맞고 제가 편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GQ 지금의 사카구치 켄타로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SK (긴 침묵) ‘사랑’에 대한 생각은 의외로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물건, 사람, 애인, 가족, 친구 등 여러 대상을 위해 나를 깎아낼 수 있는가, 희생할 수 있는가. 좋아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 그래서 받는 게 더 많은 것 같고,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GQ 좋아한다(스키다 好きだ)와 사랑한다(아이시테루愛している)를 확실히 구분하네요.
SK 대본을 예로 든다면, ‘사랑한다(아이시테루愛している)’는 표현이 나오면 힘이 들어가고, 힘이 있는 대사라고 느껴요. 연인 역할의 상대 배우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한다(스키데스 好きです)’고 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사랑한다 (아이시테루愛している)’란 말에는 무언가 책임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서도 완성 전 받은 대본에는 ‘사랑해’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았어요. 아마 직역해서 그렇겠죠? “사랑해”라고 너무 많이 내뱉으면 그 의미가 가벼워지거나 애정이 옅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은 줄여도 될지 감독님께 여쭈었어요. 일본에서 “사랑해”는 굉장한 힘을 지닌 단어라서요.
GQ 나쓰메 소세키는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라는 식으로 번역한 적이 있어요. 영화 <러브레터>에서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오겡키데스카(잘 지내요?)”로 표현한 게 한국 관객들에게 아주 큰 울림을 주었고요. 감춤으로써 표현하는 일본식 사랑 표현과 한국식 표현은 분명 다름이 있다고 느껴요. 그 다름을 사카구치 켄타로는 어떻게 받아들였어요?
SK 한국과 일본의 차이라기보다는, 이번 작품에서는 준고(사카구치 켄타로)와 홍(이세영)의 차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어린 홍과 준고는 자기 희생이 아니라 에고가 강했어요.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이렇게까지 희생한다, 그러니 너도 돌려달라는 건데,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기보다 에고였던 것 같아요. 둘 사이에 에고가 있어서 이별하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요. 사실 준고도 일방통행이었죠. 그것이 5년 후, 처음에 홍은 이미 식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지만 서서히, 얼어붙었던 것이 점점 조금씩 녹아내리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고, 준고가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사랑해, 미안해”라는 말을 했을 때 홍의 마음에도 어떤 변화가 생겼을 테고요. 준고와 홍에게도 5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기에 둘 사이 애정의 형태와 색깔이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GQ “그건 사랑이었네”라는 말처럼, 순간의 감정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랑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릴 때가 있죠. 마음에서 머리로 도착하는 시간, 그러니까 사랑과 시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어요?
SK ‘좋아해’와 ‘사랑해’라는 감정은 현재와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 같아요. 추억이란 절대적으로 미화되기 마련이죠. 부정적인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상처를 입혀서 사람의 뇌는 그런 기억을 조금씩 지운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다투고 미워하는 감정을 시간은 조금씩 미화시키고, 부정적인 감정을 풍화시키는 거죠. 이건 ‘좋아해’에는 없는 감정인 것 같아요. 일본에 애증(사랑 애愛, 미울 증憎)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사랑과 증오는 극단적으로 반대편에 있고 모순되는 단어지만 미움은 사랑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흔히 ‘좋아해’의 반대말은 ‘싫어해’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잖아요. 밉다는 감정은 역시 애정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이번 작품에서도 5년이 지났지만 둘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죠. 한번 만나 연결고리가 생기면 인연은 떼어낼 수 없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떼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GQ 떼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이유는요?
SK 제가 지금 서른세 살이니까, 서른셋의 역할을 맡았다고 가정해 볼게요. 저는 캐릭터를 구축할 때 100퍼센트 그 인물이 되려고 하지는 않아요. 어딘가에 저를 10퍼센트든, 20퍼센트든 남겨두려고 해요. 그렇게 어딘가에 저를 남겨두면 그것이 110퍼센트, 120퍼센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역할을 맡든 제가 33년 간 살아온 역사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깎아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대로 대본을 읽고, 제 생각을 바탕으로 현장에 서고, 감독님, 상대 배우들과 대화하며 그 밀도가 더 진해지면 좋겠다고 소망해요. 제가 살아온 역사를 지우고 싶지 않으니 어딘가에 저만의 감각을 역할 속에 남겨두고 싶어요. 그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제 인생 역사에 DNA가 있다면, 그 DNA 안에는 한 번이라도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을 거예요. 이제는 연결고리가 없다고 해도, 단 일주일이나 한 달의 인연이었대도, 지금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딘가에서는 이어져 있을 거라고 믿고,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인연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니까요. 나의 지금을 사랑하니까 나의 지금을 바꾸고 싶지 않다, 부정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또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예요. 저는 순간순간의 제게 애정을 가지고 대하고 싶어요. 아름다운 이별이 아니었던 인연, 다퉜던 상대와도 연결고리는 사라지지 않으니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GQ 이번 작품이 사카구치 켄타로 안에 어떤 울림을 주고 무엇을 남긴 것 같아요?
SK 적지 않은 울림, 발자국이 있었던 것 같아요. 준고라는 캐릭터를 처음 만났을 때, 5년이란 시간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서도 계속 생각하는 점에서 존경의 감정까지 느꼈어요.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준고는 마음속의 ‘홍’을 모델로 책도 썼죠. 일본에 “계속하는 것은 힘이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계속하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해요. 과연 제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준고의 사랑을 ‘강한 사랑’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싶어요. 강한 사랑은 순간적으로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준고의 사랑은 버드나무처럼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어요. 흔들리기는 해도 결코 꺾이지 않았죠. 그런 준고의 단단함이 아름답게 보였어요. 어떤 말을 하고 싶지만 꺼내지 못하고 한두 걸음 뒤에서 표현이 막혀버리는 모습은 굉장히 제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GQ 배우는 고독한 직업이라고 했던 적이 있죠? 지금은 어때요?
SK 고독하다고 느끼던 시기가 있었어요.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업이구나, 라고 당시엔 결론을 내렸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영화에 출연하면 가장 스포트라이트 받는 자리에 서서 책임을 져야 할 때도 있고, 역할을 준비하기 위해 대본을 읽으며 고독에 파묻혀 생각에 잠기는 혼자만의 시간이 길죠. 그런데 스스로가 고독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좋은 작품을 만들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깨달았어요. 대본을 읽고 ‘이런 감정이구나, 상대 배우는 어떤 느낌으로 연기할까?’라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시간이 이젠 아까워요. 저의 상상과 100퍼센트 일치한 적은 100퍼센트 없거든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연기를 원한다고 상상하면 할수록 자아가 커져요. 비로소 캐릭터가 완성되는 건 고독의 시간이 아닌, 현장의 카메라 앞에서 상대 배우들과 대사를 맞추고 조명을 비추어보는 시간들을 통해서인 것 같아요.
GQ 출연 작품 중 유독 슬픈 결말이 많다는 걸, 최근에 (전형적 한국 아주머니인) 제 어머니와 사카구치 상의 지난 작품을 다시 보면서 깨달았어요. “결말이 왜 하나같이 슬프니”라고 하셨거든요. 슬픈 결말을 오히려 선호하는 걸까요?
SK 일본에서도 자주 듣는 말이에요. 사랑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마지막에 죽거나 쓰러지는 역할이 많죠. 좋아하는 사람이 사라지거나, 만지면 사라지는 역할을 한 적도 있고, 1화에서 부인이 죽거나 부모 형제 모두 죽어서 천애 고독한 역할도 했네요.(웃음) 일본 드라마 신에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결론을 정해놓고 찍지는 않아요. 그런데도 저는 불행하게 끝나는 캐릭터를 정말 많이 맡았어요. 저도 왜 그런지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어떤 프로듀서가 말씀하시기를 저를 불행한 역할, 불행한 엔딩으로 만들고 싶대요. 자신도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가 슬픔과 고통을 끌어안은 모습이 보고 싶다고, 저를 두고 새드엔딩을 그려보고 싶다고.
GQ 그 이유에 대해 더듬어본 적 있어요?
SK 불행하고 슬픈 얼굴이 어울리는 거라고 저 나름대로 해석을 해봤어요.(웃음) 사실 그 말을 듣고 기뻤어요. 삶에서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야 그것이 드라마가 되잖아요. 삶이 드라마틱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역할은 물론 연기할 때 힘들어요. 힘든데, 불행을 짊어진 제가 싫지 않은 마음도 있어요.(웃음)
GQ 사카구치 켄타로가 생각하는 해피엔딩은 뭐예요?
SK (오랜 고민) 뭘까요···. 드라마는 인생과 달라서 1화가 있으면 최종화가 있죠. 1화에서, 2화에서, 3화에서 일어난 일 등을 최종적으로 거둘 수 있으면 충분히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요. 드라마의 스토리가 완결된 순간. 한번은 제가 경찰 캐릭터로 나와서 총에 맞아 죽은 적이 있었는데, 비록 저는 죽었지만 드라마 스토리는 완결성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건 제가 생각하는 해피엔딩이에요. 대단한 러브스토리라도 이야기가 잘 이어지지 않고 어색하게 끝나면 해피엔딩이 아니고요. 그런 면에서 이번 <사랑 후에 오는 것들>도 이야기 속에서 할 일은 잘 끝냈으니, 해피엔딩이라고 봐요.
GQ 이 인터뷰도 엔딩에 임박했는데, 이왕이면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사카구치 켄타로가 배우가 된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SK 우연이죠. 타이밍이 좋았어요. 저는 ‘타이밍론’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어릴 때 일주일에 몇 권이나 읽을 정도로 책을 많이 읽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읽지 않아요. 운이 좋게도 저는 고등학생, 대학생 때 당시의 저에게 영향을 주는 좋은 책과 자주 만난 것 같아요. 서른셋이 된 지금, 같은 책을 읽으면 그때의 감동을 느낄 수는 없을 거예요. 타이밍이 좋았던 거죠. 일도 비슷해요. 처음에는 오디션도 많이 보고, 떨어진 적도 많았어요. 그럼에도 좌절하거나 패배감을 느끼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나의 타이밍이 아니다, 나보다 좋은 타이밍을 만난 배우가 있었을 거다, 생각해서 힘들지 않았어요. 배역을 따내지 못했다고 해서 배우로서 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인생은 순간순간 선택의 축적이라고 하잖아요. 좀 아까 배우가 된 건 우연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어쩌면 우연히 좋은 운명과 마주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게 온 타이밍을 순순히 받아 들였기 때문에 그동안 평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GQ 그래서, 지금은 평안하신가요?
SK 네, 평안한 것 같아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