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 사태’로 드러난 대한배드민턴협회의 문제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구태를 이어온 관행과 제도, 조직을 탈피하려면 무엇부터 변화해야 하는가.
글 / 김경무(스포츠 컬럼니스트)
안세영 사태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8월 코펜하겐 2023 세계 배드민턴 선수권대회와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3개의 금메달 쾌거를 이룬 안세영. 그는 지난 1월 대한배드민턴협회에 낼 A4 13장 분량의 ‘안세영 건의서’를 작성했다. 안세영은 자신이 무릎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는데도 협회나 코칭스태프의 대응은 크게 미흡했다고 말한다. 막내로서 국가대표 7년 생활 동안 숱하게 겪은 부조리에 대해서도 함께 폭로했다. 안세영 선수의 부모는 2월 경기도 수원시의 한 카페에서 대한배드민턴협회와 메인 스폰서 관계자들을 만나 ‘안세영 건의서’를 전달했다.
부모가 다른 선수들의 피해를 우려해 공개를 꺼린 그 내용을 보면 매우 충격적이다. Δ선배들의 후배 빨래 시키기, 외출 시 선배들에게 일일이 보고하기 등 진천선수촌의 나쁜 선후배 문화 Δ고졸 선수들에 대한 실업팀들의 연봉 제한 및 차별 Δ금메달이 3개인데도 고작 1천만원 수준인 적은 특별 포상금 등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들과 일반 선수들이 겪고 있는 불합리와 불이익이 낱낱이 담겨 있다. 파리 올림픽이 5개월여 남은 상황에서 안세영 측의 이런 문제 제기가 있자 협회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택규 회장은 파리 올림픽 전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안세영이 국가대표로서 반드시 신어야 하는 협회 메인 스폰서 제작 신발에 문제가 있다며 다른 브랜드의 신발 착용을 원한다고 호소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협회가 그걸 허용하면 메인 스폰서와의 계약 위반이라며 매우 난감해했다. 이런 와중에도 지난 8월 5일 안세영은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배드민턴계의 오랜 숙원을 풀었다. 하지만 그 환희와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안세영이 시상식 뒤 인터뷰에서 대한배드민턴협회가 자신의 무릎 부상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작심 발언을 하며 협회는 전 국민적 비판대에 올랐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결과, 안세영이 제기한 문제는 거의 사실로 드러났다.
배드민턴은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한국은 박주봉, 김문수 등 세계적 선수들의 등장으로 이후 배드민턴 강국으로 군림했다. 한국 배드민턴의 위상을 이렇게 높인 사람은 2022년 3월 작고한 김학석 전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이라는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그를 추종하는 엘리트 선수 출신 세력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한국 배드민턴의 행정을 쥐락펴락해왔다. 그런데 선수들을 보호하기보다는 협회 재정 확보에만 열을 올리는 등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선수들은 불만이 있었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이들이 장기 집권하는 동안 일부 고위 임원의 비리 사실도 몇몇 드러났지만, 이번처럼 크게 여론화되지는 않았다. 결국 협회는 별탈 없는 단체처럼 굴러갔다.
지난 2009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때 배드민턴계엔 매우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당시엔 대교그룹의 강영중 회장이 대한배드민턴협회 수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김학석 부회장 등 실세들과의 여러 현안을 놓고 충돌했고, 이에 분개한 강 회장이 돌연 사퇴하며 파장이 일었다. 2003년 7월부터 협회를 이끌어온 강 회장이었다. 당시 김OO 감독의 국가대표 선수단 훈련 예산 전용 등 비리 의혹이 일자, 김 부회장은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흔들면 안 된다”며 극구 만류했고, 대표팀이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자 김 감독의 징계는 없었던 일이 됐다. 강 회장의 반대에도 ‘최우수지도자상’ 선정 과정에서 김 감독이 추천되자 강 회장은 사퇴를 결심했다. 그는 세계배드민턴연맹(BWF) 회장도 그만두고 이후엔 대교배드민턴단까지 해체하는 수순을 밟는다.
이후 협회는 대학배드민턴연맹 오성기 회장을 새 회장으로 선출했다. 2013년엔 신계륜 의원이 회장이 됐지만 실세들이 장악한 협회의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박기현 한국체대 교수가 이후 바통을 이어받아 2017년부터 4년 동안 협회를 이끌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생활체육인 출신이 수장이 됐다. 협회는 2010년대 중반까지도 국가대표 선수들의 BWF 투어 획득 상금을 70퍼센트나 떼어가는 규정까지 신설해 선수들의 불만을 샀다.(필자가 해당 문제를 기사 화해 이후 개선되기도 했다.)
김택규 회장은 그런 엘리트 출신 실세들과 연합해 새 회장이 되어서인지 처음에는 협회 행정에 크게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임기 중반기가 지나자 실세들을 배제하고 생활체육인 출신들 위주로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구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안세영 등 개혁적 선수들의 요구를 무시해오다 지금의 낭패를 경험하게 됐다.
대한배드민턴협회가 환골탈태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회장부터 제대로 뽑아야 한다. 공정한 국가대표 선발과 투명한 협회 운영으로 파리 올림픽에서 5개의 금메달을 일궈내는 등 대한체육회 가맹경기단체의 모범 사례가 되고 있는 대한 양궁협회(회장 정의선)는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대한탁구협회의 경우, 한진그룹 회장이던 조양호 회장 시절에는 10억원 이상의 후원금을 내며 협회를 지원해왔다. 그가 작고한 뒤에는 회장 경선을 통해 유승민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선수위원(최근 임기 만료)이 당선됐고, 그는 자신의 인지도를 활용해 활발한 메인 스폰서 영입 활동으로 훌륭한 역할을 보여줬다.
또 배드민턴협회는 무엇보다 메인 스폰서(과거 빅터, 현재 요넥스 등 배드민턴 용품 업체)에만 의존하던 협회 재정을 탄탄히 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용품 업체와 기존 메인 스폰서 계약을 유지하더라도, 선수들 경기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라켓과 신발은 선수들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하게 해줘야 한다. 언제까지 과거의 관행에만 매달릴 수 없고, 안세영 같은 세계 최고 스타를 메인 스폰서에만 묶어놓을 수 없다.
탁구는 월드테이블테니스(WTT) 투어 대회 출전 비용(항공료 체재비 등)을 선수들의 소속팀이 부담하고 있다. 선수들은 올림픽 출전에 필수적인 랭킹 포인트를 따기 위해 소속팀이나 개인 스폰서의 지원을 받는다. 대한탁구협회가 지원하는 경우는 세계대회나 아시안게임, 올림픽 같은 경우에 한한다. 배드민턴도 그렇게 하면 된다. 국가대표가 아닌 선수들의 세계배드민턴연맹 투어 대회 출전 제한도 완전 철폐해야 한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국가대표가 아닌 배드민턴 선수”는 국가대표 활동 기간 5년을 충족하고, 일정 연령(남자 28세, 여자 27세) 이상인 경우에만 세계배드민턴연맹 승인 국제대회(국가별 참가 인원 제한 없는 대회) 출전이 가능하다. 2016년 신설된 규정인데, 스타급 선수들의 국가대표 이탈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 성격이 있지만, 이는 선수의 직업 행사 자유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지적된다. 이사회도 경기인들 위주로 꾸리는 대신 각계의 능력 있는 사람들을 영입해 다각도로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 생활체육인을 포함해 경기인들의 나눠먹기 식 구성은 지양해야 한다.
안세영의 지난 2월 건의문에 이은 파리에서의 작심 발언은 전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대한배드민턴협회의 낡은 관행, 잘못된 규정과 제도는 도마 위에 올랐다. 배드민턴 여왕은 금메달에 만족하지 않았다. 후배 등 선수 보호를 위해 기꺼이 개혁의 화두를 맨 먼저 던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지역이나 중앙을 막론하고 대한체육회 가맹 경기 단체가 개념 없는 중소 사업가들의 개인 영달과 신분 세탁(스포츠 워싱)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근본적인 것부터 해결하지 않고는 요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 스포츠계 개혁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