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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현실판 삼순이, 파티셰 3인과의 인터뷰

2024.11.17김은희

<내 이름은 김삼순> 리마스터링을 열쇠 삼아 지난 디저트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고루 호평 받은 파티셰 3인의 문을 두드렸다. 서른 살, 혼기 한참 지남, 미지의 파티셰라는 꿈을 좇는 여자. 19년 전 삼순이에 겹쳐보는 2024년 삼순이들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김민정
1979년생해피해피케이크 오너 파티셰

“파티셰란 제과사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제과제빵사라고도 하고요. 애초에 발전하기를 제빵사는 식사를 제공하는 사람이고, 제과사는 디저트를 제공하는 사람이에요. 제빵사가 매일매일의 기본을 만든다면 제과사는 조금 특별한 이벤트를 선사하죠”

GQ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이 방영될 당시 기억하세요?
MJ 그럼요. 제가 2003년 스물다섯에 입사했으니까 사회 초년생일 때예요. 그 드라마 다 보지 않았나요? 다들 재밌게 봤죠. 저는 원래 LG전자에서 휴대 전화를 디자인했어요.
GQ 그런데 지금은 디저트를 디자인하시네요.
MJ 삼순이가 르 코르동 블루 출신이죠. 드라마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그때 그 학교 인기가 굉장히 많았어요.(서울 캠퍼스인 르 코르동 블루 숙명 아카데미는 2002년 설립됐다.) 나중에 제가 직원들 면접 볼 때 보면 ‘삼순이’ 보고 파티셰가 되기로 결심했다던 친구들이 꽤 있었어요. 저만 해도 삼순이를 통해 디저트를 전문으로 하는 학교가 있고 파티셰라는 멋진 직업도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더 어린 친구들은 <꿈빛 파티시엘>이라는 만화 보고 시작했다고도 하고. 원래 저는 회사 다니면서 주말에 베이킹하고, 일하다 스트레스 받으면 디저트 가게 가서 사 먹으면서 취미로 디저트를 즐기는 정도였어요. 그렇게 2011년까지는 계속 디자이너로서 일했죠.
GQ 퇴사를 결심한 이유는요?
MJ 제품 디자이너로서 한계를 좀 느꼈어요. 전자제품은 기획부터 완성까지 저 혼자 힘으로는 안 돼요. 여러 영향을 받고, 그래서 중간에 드롭되는 경우도 많죠. 케이크는 내가 기획하고 내가 만들어서 내가 손님한테 내는 그 과정이 빠르게 잘 진행된다는 점에서 재미를 느꼈어요. 케이크에 디자인하듯 접근하다 본업이 된 거죠. 그래서 서른네다섯 살쯤에 이 숍을 오픈했어요. 그게 시작이에요.
GQ 퇴사 결정이 불안하지는 않았나요?
MJ 사실 그때가 아이를 낳은 때이기도 해요. 제가 결혼을 스물다섯 살에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일찍 한 편이잖아요. 당시에도 일찍 결혼한다는 얘기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크게 어색한 사회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어쨌든 저는 원래 크리스마스이브에 밤새 일해도 뿌듯해할 만큼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모성애가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기를 낳고 보니까 ‘월화수목금금금’ 야근하는 생활이 아이한테도 미안하고 남편한테도 미안하고 엄마한테도 미안하더라고요. 주변에 미안해지는 느낌이 싫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 가운데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닿게 된 선택이기도 해요. 여러 가지 연유였어요.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리고 그때 한창 블로그가 유행했는데 제가 취미 생활 겸 기록한 베이킹 이야기가 많은 사람에게 관심받고 칭찬받으니까 이 길이 맞나 보다 싶기도 했고.
GQ 파티셰로 일하는 지금은 어떠세요?
MJ 좋죠. 너무너무 좋아요. 요새 경기가 안 좋아서 좀 힘들기도 하고 고민도 있는데, 그런데 고민은 늘 있는 것 같고, 이 일을 선택한 건 좋아요. 잘 선택했어요.

GQ 혹시 <지큐>에서 진행한 백화점 디저트 블라인드 테스트 보셨어요?
MJ 봤죠. 아는 분이 저한테 “나름 선방했어”라고 보내주시더라고요.(웃음) 셰프들끼리 다 돌려봤어요.
GQ 가게 이름을 가려도 애호가들은 다 알아보시네요.
MJ 그럼요. 남의 가게도 다 알아보고. 서로 다 알아보죠.
GQ 멋쩍지만 요즘 디저트 신을 훑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MJ 실제로 한 2~3년 전에는 조금 더 정교한 디저트가 인기 있다가 점점 쉽고 투박한 것들, 비주얼적으로 도파민을 먼저 터뜨리는 게 인기가 많아졌어요. 어떻게 보면 전문적으로 디저트를 하고 싶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현재 좋은 시장은 아니에요.
GQ 이런 시류 속에서 그럼 어떻게 보내고 계세요?
MJ 그러니까 어렵죠. 예를 들면 저희는 쁘띠 갸또류를 매일매일 선보이는 가게였는데 요즘은 그게 인기가 조금 없어지고 베이글, 빵에 여러 가지 맛의 크림을 넣은 종류가 인기 많잖아요. 그럼 그 사이에서 고민이 된단 말이죠. 그런데 트렌드는 계속 바뀌기 마련이고 결국에는 쫓아가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걸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해요. 제가 레시피 알려드리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강조하는 게, 이것을 토로 자기 방식으로 변형하거나 다른 콘셉트를 시도해보라는 거예요. 그게 경쟁력 같아요. 최근 두바이 초콜릿이 한창 유행할 때, 이걸 따라 만들면 잘 나갈 건 알겠는데 우리 브랜드와 색깔이 어울리지 않아서 이걸 만드는 게 맞나 고민을 했어요. 그때 아우치라는 아이스크림 디저트 숍에서 자신들의 아이스크림에 두바이 초콜릿을 끼워서 아주 잘 어울리게 조합을 하셨더라고요. 이런 게 나의 브랜드 색을 잃지 않으면서 트렌드를 접목시키는 방향이지 않을까 싶어서 감동적이었어요. 거기 셰프께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드렸어요. 저희는 일단, 이곳 매장은 우리의 쁘띠 갸또를 계속 선보이는 대신 매일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 팝업으로 열어서 운영 시간을 압축시키고, 백화점 매장은 선물하기 좋은 구성과 패키지로 타깃팅하고 있어요. 팝업은 지금까지 아홉 번 열었는데 아홉 번 다 오신 분이 꽤 계세요. 그렇게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결국에는 사랑받는 디저트를 하고 싶어요.
GQ 삼순이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빌려 인생을 초콜릿 상자에 비유했죠. 직업인으로서 혹은 한 발자국 먼저 사회생활을 해본 경험자로서 얻은 통찰을 디저트에 비유해본다면요?
MJ 저희가 만드는 디저트에는 아주 많은 레이어가 있어 그 레이어를 각각 먹으면 맛이 이게 맞나 싶을 수도 있어요. 레이어를 다 같이 먹을 때 온전히 맛있게 즐길 수 있거든요. 인생도 그때그때는 잘 모르지만, 쌓아온 그 모든 게 하나로 연결돼서 내가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예를 들면 산미가 있는 잼과 부드러운 초콜릿 무스가 있을 때, 초콜릿 무스만 먹으면 되게 밋밋하고 신 잼은 또 걔만 먹으면 너무 자극적이지만, 두 개를 같이 먹으면 아주 조화롭거든요. 그래서 손님한테 디저트를 낼 때 꼭 말씀드려요. 모든 파트를 한 번에 같이 떠서 맛있게 드시라고.

권혜빈
1995년생에낭 오너 파티셰

“고군분투하던 20대의 저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직 난 별로 보여준 게 없으니까. 서른 살밖에 안 됐잖아요”

GQ 파티셰란 무엇인지 주관적으로 정의해본다면 어떠한가요?
HB 스스로 생각하기에 저는 그냥 빵 만드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파티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파티셰가 무엇인지 알긴 알지만 제가 그만큼 전문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모르겠어요.
GQ 그럼 어떤 연유로 빵 만드는 사람을 꿈꿨어요?
HB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어서. 그때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었거든요. 돈도 벌어야 하고 부모님한테도 무언가 보여드려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게 그래서, 이제는 진짜 물러날 데가 없다 싶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빵이었어요.
GQ 혹시 ‘삼순이’를 보신 적 있나요?
HB 비빔밥. 현빈과 한라산 가고. 그 내용밖에 몰라요.(웃음) 그때 어려서.
GQ 19년 전 삼순이가 극 중 서른 살이었는데 그19년 그때 서른에 비하면 지금은 어떨지 궁금했어요. 당사자로서는 스물일곱에도 이미 물러날 데가 없다는 생각이 때 들었군요. 그게 3년 전이죠?
HB 그때는 많은 나이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주변 친구들은 이미 대부분 취업해서 회사 다니고 각자 밥벌이를 하는데 저는 번번이 실패하는 기분이었거든요. 코로나19와 맞물리면서 준비하던 항공사 입사, 제가 울산 사람이라 지역의 중공업 회사 입사도 준비했는데 그 취업도 어려워지고, 항상 역경 앞에 놓인 것 같았어요. 사회적으로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커졌고 저도 당연히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은 나이라고 느끼지만, 졸업 후 사회로 나왔을 때 드는 불안함은 시대 불문 같아요.
GQ 그 불안함에 어떻게 대처했어요?
HB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본 거예요. 빵이었어요. 그것도 크게 ‘와구’ 먹는. 에그타르트는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맛있어 보이는 집이 있길래 찾아가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는 거예요. 그게 스물여섯 살 때였어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돌아봤을 때 그때가 생각나면서 ‘이거다’ 싶었어요. 그때부터 에그타르트를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에그타르트는 포르투갈식과 홍콩식이 있는데, 포르투갈식은 페이스트리 베이스라서 바삭바삭해요. 그건 눅눅해지기 전에,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어요. 홍콩식은 타르트 반죽을 사용해서 파이지가 쿠키 같아요. 식었을 때 먹어도 촉촉하고 부드러워요. 저는 홍콩식을 좋아하는데, 대신 ‘와구’ 먹는 걸 좋아하니까 보다겉지(파이지)를 높이고 크기를 크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어요.

GQ 그게 비법인가요?
HB 네, 비밀이에요.(웃음) 최소 6개월 동안 토할 정도로 먹었어요. 마지막 풍미 하나를 찾기 위해서.
GQ 비법은 비법인가 보네요. 처음 창업한 2021년과 2024년 사이 본점에서 나아가 11개 매장으로 늘었어요.
HB 빠른가요? 제가 보기에는 아니에요. 런던베이글만 봐도.(웃음) 더 안정화하는 게 목표예요. 매장 수를 늘려서 팽창한다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더 성장하는 게 목표예요. 목표···? 아니, 목표라고 할 것까지도 없고, 맛있는 걸 만들어 손님들한테 맛있다는 얘기 듣는 거, 그거 하나만 봐요. 제가 저희 동네 울산의 후미진 골목, ‘거리 뷰’도 없고 간판도 잘 찾을 수 없는 그런 작은 데서 했거든요. 처음에는 하나도 안 팔릴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매일매일, 그냥 조그마한 가게에서 내가 좋아하는 거 만들어서 판다는 생각으로 하다 보니까 처음 오신 분이 또 오고, 더 많은 분이 오고, 그러면서 6개월 만에 갑자기 줄을 서는 가게가 된 거예요. 2년 정도 수량과 퀄리티를 잘 관리하는 연습을 하고, 이번에는 더 큰 도시로 가보자 해서 선택한 데가 서울이에요. 잠실 ‘송리단길’에 한번 가봤는데 많은 먹거리가 있어도 제 스타일의 에그타르트는 없더라고요. 여기서도 해보고 싶다,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GQ 어땠어요, 도전해보니?
HB 혹독하죠. 혹독하지만, 매출은 나지 않더라도 그날 오시는 손님이 있잖아요. 말이라도 한번 더 건네고, 서비스 하나씩 드리고(웃음), 손님이 없어도 맛있는 걸 만들어서 오신 손님을 단골로 만들자고 생각했더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예전에는 치킨가게나 피자가게처럼 호불호가 드문 업체가 살아남았다면, 이제는 무엇보다 ‘호’를 바늘로 찌르는 자영업자가 살아남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GQ 말씀대로 어느 시대든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에그타르트에 메시지 카드를 꽂아 건넨다면 어떤 말을 적고 싶어요?
HB 겁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안에서 하고 싶은 걸 해봤으면 좋겠어요. 제 첫 가게는 월세가 30 얼마였어요. 좀 많이 후미진 곳이라 저렴했어요. 그럼 나는 하루에 에그타르트 8개만 팔아도 월세는 낼 수 있겠다, 그 계산을 하고 시작한 거예요. 현실적으로 내가 감내할 수 있는 선은 정해두고, 그래야 혹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 안에서 겁내지 않고 끝까지 해봤으면 좋겠어요.
GQ 앞으로의 새 계획은 무엇인가요?
HB 신제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어요. 곧 옥수수타르트, 크림치즈타르트, 감자타르트 등 새로운 타르트도 선보일 예정이거든요. 책 <포지셔닝>에 보면 “시장 상황 에서 살아남으려면 최고 혹은 최초가 되어라”라고 해요. 그런데 정말 많은 디저트가 나와 있는 이 상황에서 최초가 있을까 싶어요. 제가 미처 경험하지 못했지만 어딘가에는 이미 옥수수타르트, 크림치즈타르트, 감자타르트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저는 최초가 아니라 최고를 바라봐야겠죠.

이예란
1988년생코운코운 오너 파티셰

“10여 년 전 베이커리 업계에서 일할 때 이런 소리 듣는 걸 정말 싫어했어요. 여자는 힘 못 쓴다. 밀가루 포대 못 든다. 저는 단지 키가 작아서 오븐에서 제품 빼야할 때, 높은 데 청소해야 할 때 사다리 타고 올라가야 했을 뿐, 못한다는 건 없어요”

GQ ‘삼순이’를 보셨나요?
YR 저희 어머니가 그때 그 드라마를 보고 제게 제과제빵 배워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어요. 그때가 2005년이니까,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워낙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해서 엄마가 ‘삼순이’를 보시곤 제과제빵 해보라고 말씀하셨는데, 빵 좋아하니까 그래, 빵을 해야겠다 해서 그때부터 배우고 스무 살 때부터 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GQ 드라마와 같거나 다른 현실이 있던가요?
YR 스무 살쯤, 20대 초에 제과점에서 일하게 됐는데 하루에 거의 16시간씩 일했어요. 월급도 60인가 70만원 받고, 쉬는 날도 한 달에 한 번인가 두 번이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당시 셰프이자 사장님이 철없던 이 애를 어떻게 그렇게 교육시키셨을까,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실수인데 그런 실수를 해도 다 용인하고 끌어주셨을까, 나는 그런 직원 있으면 못 데리고 갔을 텐데 싶어요. 마늘 버터를 만들 때 버터를 풀어야 하는데 냉동 상태로 넣어서 망친다든지, 발효를 잘못 시켜서 그걸 숨긴다고 비닐에 넣어 뒤에 몰래 숨겨놨더니 비닐이 이따만큼 부풀어오른다든지 그런 일이 많았어요. 그러면 항상 셰프님이 이 철없는 애를 2시간씩 붙잡고 교육시키고 상담하시고 그러셨어요. 그러면 아, 절대 실수하지 말아야겠다 하죠. 말씀을 많이 하시니까.(웃음) 처음에 이렇게 제대로 배운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 같긴 해요. 아직도 기억나는 게, 삼순이가 약혼식 케이크로 크로캉부슈를 만들거든요? 서른 살 때 레스토랑 전속 파티셰에, 그런 디저트를 만든다는 건 진짜 능력이 대단한 거라고 생각해요. 연출이지만 지금 봐도 그건 대단한 스킬이고 대단한 이력이에요. 삼순이가 그런 파티셰가 되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GQ 파티셰님이 만든 시오 바닐라 시폰산도를 두고 다른 파티셰와 미식 평론가가 “균형과 대조가 공존하는 맛의 설계”라고 평해주셨어요.
YR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시폰 자체가 가볍다보니까, 그런데 여기에 뜬금없이 너무 무거운 맛이 들어가면 밸런스가 맞지 않으니까 바닐라와 크림의 식감에 재밌게 씹는 맛을 넣으면 어떨까 해서 만들었어요. 2014년쯤에 그 전까지 아티제나 투썸플레이스 등 회사에 다니던 길에서 벗어나 개인 공방을 열고, 그때 처음으로 해외여행으로 일본에 갔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당시 구움과자가 많을 때여서 좀 다르고 신선한 게 없을까 싶던 차였는데 시폰을 접했죠. 물론 그때 국내에도 시폰은 있었어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색다르게 맛보일 수 있을지가 늘 과제 같아요.

GQ 지금 주방에서 여러 직원이 각자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풍경이 보이네요.
YR 처음에 저와 함께 일한 직원은 1명이었는데 2명, 3명 늘다 지금은 12명이에요. 어깨에 짐이 많아요. 셰프로서, 사업가로서, 성장하고 있는 과정 같아요. 저는 셰프이고 싶은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여러 직원과 이 브랜드를 운영해 나가려면 사업가로서의 현실, 돈을 무시할 수 없죠. 몇 날 며칠 테스트하고 남기는 코스트를 줄이고 재료비 높게 측정해서 좋은 재료 써서 만들었는데, 보편적으로는 비싸다, 맛있다 혹은 맛없다로 단칼에 갈리면 ‘현타’가 오기도 하는데, 원래 올라가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올라가더라고요. 만약 저 혼자 있었으면 무너졌을 것 같아요. 그만뒀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직원들이 있다 보니까 서로 으쌰 으쌰하는 게 있어요. 그게 원동력이에요. 그러면 또, 가을에 이 맛을 냈으니 겨울에는 우리 무슨 맛을 만들까 서로 머리를 맞대고.
GQ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기 위해 이건 꼭 지켜야 한다고 동료 파티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면요?
YR 기본이죠, 기본. 레시피를 잘 보고 계량을 잘하는 게 기본이거든요. 누구나 레시피 보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짤주머니를 짠다거나 주걱질을 한다거나 그럴 때도 아주 디테일한 기본이 있거든요. 위생과 청소는 기본이고, 손짓 하나에도 거칠게 하느냐 빨리 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요. 그 기본을 잘 지켜야 해요. 그리고 저는 만약 직원들이 테스트하려는 레시피에서 이렇게 하면 잘 안 될 것 같은데 싶어도, 혹은 테스트하다 시행착오를 겪어도 직관적으로 알려주지 않아요. 일단 겪어보라고 해요. 실패를 해봐야지 알아요. 실패를 해봐야 성공을 맛봤을 때 그게 탄탄해지고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친구들도 우여곡절을 겪어나가겠죠.
GQ 파티셰라는 직업을 떠나 하루 더 살아본 사람으로서는 어떠한가요? 과거를 지나온 자기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 수도 있고요.
YR 더 놀아라.(웃음) 저의 서른 살을 돌아보면 그때가 딱 팬데믹 오기 전이었거든요. 저는 여행하면서 이국의 디저트를 맛보는 게 낙인데 그 여행길이 끊기니까 아쉽더라고요. 한 살이라도 젊은 나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저 스스로에게도 그럴 거예요. 젊은 세월 지나가는 것은 찾을 수 없으니까 더 놀아라. 더 열심히 일하고, 더 혹사시켜서, 더 놀러 다녀라. 그래야 시야도 넓어지고 새로운 맛을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