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메스칼은 <글래디에이터 2>에서 눈물 대신 피를 흘린다.
런던 빅토리아 파크. 한여름 날의 초저녁,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마지막으로 햇살을 뿌려대는 시간. 공원에는 에메랄드빛 잔디가 지평선까지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도심의 푸른 오아시스에 경탄하려는 찰나 비가 오고야 말았다.
그러나 폴 메스칼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인도에 따라 건장한 나무 아래로 피신한 우리는 지붕처럼 드리운 나뭇잎들 아래에서 갈수록 거세지는 비를 피했고, 바짝 마른 땅에 빗물이 스며들어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감성이 깃든 거친 야수 계열의 많은 남자 배우 중에서도 메스칼은 단연 현존하는 제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그런 그가 나무 아래 잔디밭에 편안한 자세로 가만히 앉은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인상주의 회화와도 같았다.
그 순간, 나를 해치워서라도 메스칼의 옆자리를 차지하고자 나설 사람이 꽤 많을 수도 있겠다는 명확하고도 굉장히 드문 깨달음이 들었다.
우리는 리젠트 캐널을 따라 공원까지 걸어온 참이었다. 이 길은 아일랜드 출신인 메스칼이 런던에 정착한 이후 가장 좋아하게 된 러닝 코스라고 한다. 운하 가장자리로 줄지어 정박한 하우스보트 갑판 위에서는 사람들이 바비큐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공놀이에 열중한 래브라도리트리버가 물에 첨벙 뛰어들기도 했다. 그 모든 광경이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싶을 정도로 귀엽고 아름다웠다.
2024년은 메스칼 때문에 세계적으로 짧은 반바지가 유행했다. 마치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듯 반바지 기장이 상승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인터뷰를 위해 나타난 그는 긴바지와 새먼색 파타고니아 긴 소매 셔츠 차림으로 검은색 아디다스 삼바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멀릿 스타일이었고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했으며 푸른 두 눈을 덮은 눈꺼풀은 무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의 코는 토가를 두른 채 거리의 쓰레기를 나 몰라라 하는 고대 로마인의 코 그 자체였다. 늘 그래왔듯 한쪽 귀에 작은 귀고리를 한 모습의 그는 인터뷰로부터 며칠 후면 클로이 자오 감독의 신작, 2020년 베스트셀러였던 동명 소설을 각색한 <햄닛> 촬영을 시작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메스칼에게 주어진 배역은 역사적 인물이자 메스칼처럼 귀고리를 하고 다닌 것으로 알려진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원래 저는 오른쪽 귀에만 피어싱을 했어요. 그런데 초상화를 보면 셰익스피어는 왼쪽 귀에 피어싱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쪽 귀마저 뚫게 된 거죠”라고 설명하는 그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나름 항의를 해보았지만 끝내 설정에 굴복하고 말았다고 한다.
올해 스물여덟 살인 메스칼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그의 세대를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배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를 보면 연기를 가장 자연스럽게 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메스칼이 지닌 남성성은 굉장히 드물고 독특한 편인데, 강인함과 연약함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강인함의 비결 중 하나는 오랫동안 아일랜드 전통 축구인 게일릭 풋볼을 했기 때문일 테고, 그는 정말이지 아름답게 눈물을 흘리는 법을 안다.
여기서 아름답게 눈물을 흘린다는 말은 사실 정반대의 뜻이다. 큼지막하고 못난, 자기를 놓아버리는 그런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다. 메스칼이 맡은 배역들은 대부분 음울하거나 울고 있었으며, 때로는 음울하게 울고 있기도 했다. 그를 하루아침에 벼락스타로 만들어준 <노멀 피플>에서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운동선수 코넬을 연기했고, 판타지 드라마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에서는 파티를 즐기는 외로운 동성애자를 그렸으며, 우울증을 앓는 젊은 아버지로 등장한 <애프터썬>에서 보인 놀라운 연기 변신 덕에 지난해에는 불과 스물일곱 살에 오스카상 후보로 지명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무언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럴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라 대답한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그런 캐릭터들을 두고 “슬프면서도 섹시하다”고 표현한다. 비를 피하기 위해 찾은 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그 표현을 두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애프터썬>에서 그가 연기한, 너무나도 많은 상처 속에서 엄청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캘럼 같은 인물을 보고 섹시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여기는 듯도 하다. “그런 사람들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그는 농담을 던진다.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면, 메스칼은 지금껏 대본에 “슬픈 얼굴”이라고 캐릭터가 묘사된 오디션을 두 번 치러봤고, 두 번 모두 배역을 따냈다. <애프터썬>에서 열한 살짜리 딸을 둔 아버지를 완벽하게 그려낸 것처럼 그는 나이대가 있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는 편이며, 실제 생활에서도 행동이나 말이 어른스러워 또래 배우인 티모시 샬라메보다 어리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 어쩌면 유전자의 차이 때문일 수도, 혹은 그저 본인이 피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그는 추측한다. 메스칼은 이를테면 우리 주변의 가장 잘생긴 친구처럼 잘생겼다. 그만큼 연기자로서 설득력을 지닌다는 말이며,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속임수에 가까운 허례허식이 판치는 21세기에 메스칼은 반대로 우리에게 인간성을 되찾아주는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노멀 피플>에서 메스칼과 함께 주연을 맡은 데이지 에드거존스는 실제로도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로 “폴은 항상 굉장히 놀랍고 멋진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곤 해요”라고 말한다.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를 제작한 앤드류 하이 감독 또한 메스칼의 타고난 편안함에 대해 비슷한 평가를 내린다. “그는 항상 더 깊이 탐구하고 파고들며 장면마다 깃든 진실을 찾으려 했고, 그 모든 걸 정말 쉽게 해냈어요”라고 설명한 하이 감독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어떤 배우들은 그런 과정을 괴로워하는 경우도 있지만 메스칼은 달랐어요. 고통스럽게 뭔가를 조사한다기보다는 일종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접근하더군요.”
과거 수많은 젊은 배우를 인터뷰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해본다면, 아마 메스칼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것보다는 어떤 사람이 아닌지에 대해 말하는 편이 더 용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인기나 명성에 짓눌려 고뇌하지 않는 배우이고 유명인으로서 져야 하는 책임을 귀찮아하지도 않는 듯하다.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 증명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 느끼하게 매력을 뽐내려 들지도 않는다. 메스칼은 거만하지도 않고 겸손함을 연기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그는 쿨하다. 같이 어울리기 좋은 사람이란 의미다.
마지막으로 메스칼과 대화를 나눈 건 팬데믹이 극성을 부리던 2020년이었다. 감정과 섹스, 또한 감정적인 섹스를 꾸밈없이 진솔하게 그려낸 <노멀 피플> 덕에 그는 문자 그대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시국 탓에 어쩔 수 없이 화상으로 대화를 나눠야 했고, 당시 장장 수개월에 걸쳐 기자회견을 하며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와 일하는 건 어땠나요?” 같은 질문 수백 개에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스물네 살이었던 메스칼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다시피 얻은 인기에 날이 선 모습이었다. 그는 삶에서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 시기인 20대를, 그 시기에 따라오기 마련인 성장과 상실을 남들과 똑같이, 그러나 더욱 큰 규모로 겪으며 보냈다. “돌아보면 스물네 살의 저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었어요. 모든 걸 그저 이상적으로만 생각했고 냉소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어요. 지금보다 행복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저 삶이 장밋빛 몽타주들의 연결 같았던 거죠. 물론 모든 걸 낙관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았어요. 저는 제가 연기한 캐릭터들의 심리를 이해해요. 그런데 그건 단순히 대본만 읽어서는 알 수 없거든요. 내면에 그런 뭔가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노멀 피플> 이후 꾸준히 그리고 신중하게 작품을 해온 메스칼이 작품을 고르는 방식은 본인의 취향을 따르는 것이다. “저는 묘하게도 제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을 즐겨요. 그렇기 때문에 휴식을 취할 때보다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더 제대로 기능하는 것 같아요.” (직업 윤리에 관한 얘기가 나온 김에 그는 자신이 금요일 재택근무의 효과를 믿지 않으며 어쩌면 그게 본인의 “유해한 사고방식”일 수도 있다고 밝힌다. 그리고 나는 스타 배우인 폴 메스칼에게 금요일마다 재택으로 일하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점을 점잖게 지적해주었다.)
“제 에이전트는 제가 일에 관해서는 사이코패스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닐 정도예요”라고 그는 빅토리아 파크의 잔디와 자신의 머리칼을 번갈아 잡아당기며 설명한다. “제가 누리는 것들을 영원히 붙잡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있어요”라고 털어놓는 그가 말하는 영원히 붙잡고 싶은 것들이란 기회와 성공, 그리고 예술적 자유를 말한다. “그것들이 절대 없어지지 않기를 원하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통제하려 드는 일종의 신경증이 딸려오는 거죠.”
그런 메스칼에게 적어도 지금 그의 모습이 몇 년 전 인터뷰를 했을 때보다는 더 편안해 보인다고 말해주자 눈에 띄게 기뻐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기운을 차린 모습으로 “제가 편안해 보이나요?”라고 물어본 그는 “정말 다행이네요. <GQ>가 저를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고 인정해준 거잖아요. 이제 인터뷰 끝내도 될 것 같은데요”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제 막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들어서려는 메스칼을 두고 여기에서 인터뷰를 마칠 수는 없다. 그는 그의 인생에서 어느 때보다 많은 관객 앞에서 자신의 연기를 선보이려 하고 있다. 메스칼의 첫 블록버스터 작품으로 리들리 스콧이 감독하고 메스칼이 주연을 맡은 <글래디에이터 2>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별한 조짐은 길에서 메스칼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행인들의 말과 동작에서 벌써부터 감지되고 있다. “젊은 남자들이 저한테 와서 ‘글래디에이터 엄청 기대돼요’라고 말을 걸고, 점잖은 악수가 아닌 진한 악수를 엄청 해주더라고요”라고 설명하는 그는 전 세계 젊은 남자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진한 악수, 즉 한 손으로는 악수하고 다른 손으로는 어깨를 끌어안는 동작을 흉내 내더니 자신도 이제는 “명예 형제”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
오리지널 <글래디에이터>는 특정 나이대의 남자들에게 시금석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리들리 스콧이 연출하고 러셀 크로우가 검투사 막시무스로 등장한 <글래디에이터>는 아득히 먼 시절, 명예와 의무를 중요하게 여기던 서기 180년을 배경으로 명예와 의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대하 영화였다. “우리가 살면서 하는 일이 영원히 메아리치던” 그런 시대의 이야기였다. 영화의 메시지가 언제나 의도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겠고, 그건 <소프라노스>에 등장하는 미친 인물로 <글래디에이터> 대사 인용에 집착하는 랄프 시퍼레토만 봐도 명백해지지만, 그래도 남자들이 굽은 자세로 사무용 의자에 파묻혀 엑셀 시트나 채우는 대신 정말로 남자다웠던 어떤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건 사실이고, 그와 동시에 할리우드에서 수백만 달러를 들여 초대형 역사 영화를 만들고 객석을 가득 채울 수 있었던 비교적 가까운 시대인 서기 2000년에 대한 그리움도 자극한다.
메스칼은 열세 살 정도일 때 아버지와 함께 <글래디에이터>를 처음 봤다고 한다. 아버지의 이름도 똑같이 폴 메스칼인데, 적절한 나이에 딱 좋은 사람과 함께 영화를 관람한 셈이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제작자 루시 피셔와 더글러스 윅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메스칼을 아침 식사에 초대했고, 후속작에 그를 캐스팅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제 남은 건 여든여섯 살에도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리들리 스콧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둘의 첫 만남에서 메스칼은 본인이 게일릭 풋볼팀의 주장 출신으로 충분한 신체 조건을 갖췄음을 설득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하지만 스콧은 이미 <노 멀 피플>을 본 상태였고 메스칼의 연기에 좋은 인상을 품고 있었다. 캐스팅할 때 신체 조건을 중시하는 편인 리들리 스콧이 보기에 메스칼은 고대 로마의 데나리우스 은화에 그려졌다 해도 자연스러울 얼굴은 가진 데 더해 오리지널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연기한 리처드 해리스와 닮은꼴이기도 했다.
“좋은 사람이고 성격도 스윗하고 아주 솔직하다”고 메스칼을 설명하는 스콧은 “헛소리를 하지 않는 면이 마음에 들었다”며 캐스팅 이유를 밝힌다. <글래디 에이터>에서 루실라(코니 닐슨)의 열두 살 아들로 등장해 검투 경기를 구경하던 루시우스를 맡을 배우가 드디어 정해진 것이다.
리들리 스콧은 대규모 작품 경험 없이 비교적 신인인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한다. “저는 항상 그렇게 해요. 브래드 피트도 (<델마 와 루이스> 이전에는) 경험이 거의 없었고 시고니 위버도 (<에일리언>을 하기 전까지는) 무명이나 마찬가지였죠. 저는 그런 식으로 모험을 하는 편이에요”라고 스콧은 설명한다. 루시우스로서 메스칼은 투기장에 던져져 다른 검투사들과 시합을 벌이는 한편, 전설적인 배우이자 극 중 검투사를 여럿 거느린 부유한 무기상으로 출연하는 덴젤 워싱턴과도 연기력을 겨루게 되었다.
<글래디에이터 2>는 메스칼이 이제껏 참여한 어떤 작품과도 달랐다. <애프터썬>을 예로 들자면, 대부분 부녀간의 섬세한 교류를 묘사하는 장면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스턴트 배우를 쓸 일도 없었다. 검투사로 변신하기 위해 그는 정석적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트레이너와 함께 몸을 만들고 고구마와 다진 소고기를 지겨울 정도로 꾸역꾸역 섭취하며 근육을 8킬로크램 정도나 키웠다. 메스칼에게 본인은 남자로서 로마 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인터뷰를 위해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낮게 신음하며 “학교에서 배웠어요”라고 입을 뗀다. 그 이후로는 딱히 제국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 없었다고 한다.(로마보다는 내전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아일랜드의 역사에 더 관심이 많다는 메스칼은 켄 로치가 감독하고 킬리언 머피가 주연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같은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 <글래디에이터 2>의 초반 장면 일부는 지난해 여름 모로코에서 촬영했고 나머지는 오리지널과 똑같이 몰타에서 마무리했다.
리들리 스콧은 촬영 세트를 거대하게 짓는 감독이고, 메스칼은 콜로세움 세트장에 발을 들이며 그 규모에 경외심을 느꼈다. “세트장에 방문한 첫날 메스칼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을 거예요. 그 정도로 클 줄은 몰랐던 거겠죠”라고 스콧은 말한다.
촬영 시작 전에 스콧이 다가와 입에 시가를 문 채 메스칼의 등짝을 두드리며 조언을 하나 건넸는데, “네가 긴장하면 나한테 도움이 안 된다”라는 말이었다. 첫날 촬영이 끝나갈 무렵 메스칼이 깨달은 사실은 개인적인 감정을 다룬 독립영화든 덴젤 워싱턴과 함께 찍는 2억 5천만 달러짜리 블록버스터든 “연기를 한다는 행위는 똑같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발목을 잡는 버릇도 물리쳐야 했다. “저를 위축시키는 생각들을 혼자서 만들어내고 있었거든요. ‘오늘은 덴젤이 촬영장에 오겠지’ 같은 생각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이거 너무 멍청한 짓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라고 깨닫게 되었죠.”
워싱턴은 그런 메스칼에 대해 “본인이 뭘 하는지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요. 상대역으로 정말 좋은 배우죠. 제가 반응할 뭔가를 던져주기 때문이에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차분한 품위와 강인함, 그리고 지능이 두드러져요”라고 그가 받은 느낌을 설명한다.
영화의 팬으로서 개인적인 감상을 남겨본다면, <글래디에이터 2>는 오리지널보다 스케일이 훨씬 커졌고, 날것의 느낌은 강해졌으며, 액션도 더욱 과격해졌다. 뒤엉켜 싸우는 전투 장면도 그렇지만 일대일로 벌어지는 마구잡이 싸움도 상당히 잔인한 편이다. 아마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시간을 찡그린 얼굴로 보낼지도 모른다. “감독님은 한여름 촬영을 강하게 고집하셨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영원히 원망스러울 거예요. 아일랜드 출신으로 창백하고 병약해 보이는 인간인 저에게 갑옷을 두르고 피부는 갈색으로 분장한 채 무더위 속에서 땀 흘리며 굴러다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요”라고 메스칼은 고백하며 전투 장면들의 액션 강도가 상당했다고 덧붙인다. 메스칼이 부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연설을 하는 장면도 자주 등장한다. 영화를 본다면 알겠지만, 게일릭 풋볼팀 주장으로 팀원들의 기세를 끌어올리기 위해 로커룸에서 연설을 해본 경험이 유용하게 쓰였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한 가지 간과하기 쉬운 건 바로 오리지널 <글래디에이터>가 관객의 감정을 굉장히 성공적으로 자극하는 영화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20년 정도가 지나 오랜만에 다시 보기까지 나부터도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한스 짐머와 리사 제라드가 만든 가슴 저미는 주제가만 들어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후세계를 분위기 있게 그린 연출은 어떠하며, 최후에 막시무스가 숨을 거두는 장면은 또 어떠한가?(한 남자 동료는 자신이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 건 극장에서 <글래디에이터>를 본 날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메스칼은 미소를 지으며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원작에 대해 말한다.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느낌을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액션 드라마이기 때문에 통하는 영화인 거죠. 페이소스가 진하게 담겼고 영화에서 그려지는 모든 폭력은 사실 사랑과 배신감에서 기인한다는 거예요”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 보니 젊은 남성이 느끼는 감정과 고통을 우리가 이해하게끔 들려주는 최고의 통역사인 메스칼에게 <글래디에이터 2>에서 그런 역할이 주어진 것도 수긍이 간다. 시합을 마친 뒤 뚝뚝 흐르는 피를 잔뜩 뒤집어쓴 루시우스는 로마 제국의 시인이자 전사였던 버질의 시를 인용하기도 한다. 메스칼의 말을 빌리자면 루시우스는 “불편함 속에서 편안한” 인물이다. 그는 루시우스가 “특권의식이 아예 없는 인물”이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밝히며, “그는 세상 무엇에 대해서도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저 싸워나갈 뿐이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인물이고, 그런 점이 연기하기에 굉장히 재미있었어요”라고 말을 잇는다.
메스칼은 오리지널과 후속 편을 연결하는 비밀에 대해서도 귀띔한다. 바로 루시우스가 막시무스의 아들이라는 설정이다. <글래디에이터>는 희망적인 느낌을 주며 엔딩을 맞이했지만, <글래디에이터 2>를 보면 로마는 여전히 극도로 부패했고 사치스런 쌍둥이 황제의 폭정 아래 곤경을 겪는 것으로 묘사된다. “루시우스는 명백히 로마를 혐오하고 로마에 맞서려 하는데 그 이유는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있어요. 본인의 핏줄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 영화 시작부터 루시우스는 로마에 증오심을 품고 있죠. 하지만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오히려 그는 혼란이 심해져 가는 로마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차리게 돼요”라고 메스칼은 대략적으로 설명한다.
메스칼로서 로셀 크로우와 비교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일 테지만, 그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듯하며 크로우와 연락조차 한 적이 없다. “연락이 된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라는 게 그 이유다. 메스칼은 본인의 연기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글래디에이터 2>로 자신의 연기 인생이 결정되는 건 딱히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사람들이 저를 두고 ‘이건 원래 러셀 거였어’라고 말하는 것도 약간 어폐가 있는 것 같아요. 러셀은 <글래디에이터> 이전에도 이후에도 수없이 반복해서 자기 자신을 증명해왔고, 그가 배우로서 일군 어마어마한 업적은 단순히 <글래디에이터> 한 편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거든요”라고 메스칼은 자신의 생각을 풀어낸다.
오리지널에 이어 후속 편에도 루시우스의 모친 루실라로 등장하는 코니 닐슨은 메스칼에게서 러셀 크로우와 (오리지널에서 콤모두스 황제로 출연한) 호아킨 피닉스가 겹쳐 보였다고 말한다. “호아킨은 다른 무엇보다도 상대로 하여금 자세를 바르게 하고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아무런 가식 없이 세상을 마주하고자 하는 의지를 바탕으로 어떤 고유한 본질을 만들어내죠. 그가 지닌 본질이란 연약한 모습을 기꺼이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예요”라고 닐슨은 부연하며, “러셀 크로우는 당당하게 밀고 들어와 장면과 카메라, 그리고 캐릭터를 지배해버리는 질풍노도 같은 배우였고요”라고 둘을 비교한다.
후속 편에서 달라진 점을 하나 더 꼽자면, 메스칼과 (마르쿠스 아카시우스 장군을 연기한) 페드로 파스칼이 허벅지를 드러낸 채 엉겨 붙어 뒹구는 결투 장면을 두고 여성 팬들이 극도의 기대감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감독에게 들려주자 “러셀은 섹시함이 부족했다는 말인가요?”라며 교활하게 응수한 스콧은 “러셀은 메스칼과 상당히 다르고 메스칼도 마찬가지로 러셀과 다르죠. 딱 부러지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폴에게는 러셀에게 없는 종류의 연약함이 있어요”라고 설명한다.
런던에서의 인터뷰가 있기 몇 주 전, 메스칼은 홀로 스크리닝 룸에서 <글래디에이터 2>를 관람했다. 꽤 긴장한 상태로 관람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예산이 2억 5천만 달러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이유가 충분한 듯하다.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위해 만든 영화예요. 많은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이 이번 작품의 목표인 거죠. 말을 돌리거나 치장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면에서 저와 제작사는 똑같은 목표를 갖고 있어요. 모두가 찾고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라고 그는 밝힌다.
스크리닝이 시작되고 나서는 2분도 안 되어 마음이 편안해졌다는데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화면으로 보여지는 자신의 연기가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다는 것이 메스칼의 설명이다.
비가 줄어들어 우리는 운하를 따라 되돌아 걸었다. 아직까지 길에서 메스칼을 알아본 이는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어쩌면 너무나도 많은 젊은 남자들이 그의 패션과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면서 전 세계에 메스칼 도플갱어가 넘쳐나게 된 탓에, 장본인이 눈앞에 지나가도 알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건 아닐까 짐작해본다. 어딜 가더라도 메스칼 스타일을 마주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사는 뉴욕도 그를 흉내 낸 사람들이 점령하다시피 했고, 지난해 가을 마드리드의 토르티야 음식점에서는 한 무리 전체가 폴 메스칼처럼 꾸미고 들어서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이번 인터뷰를 위해 히스로 공항에 도착해서도 입국장에서 곧바로 가짜 폴을 찾아냈을 정도다. 그는 여자친구를 위해 꽃을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메스칼 특유의 후줄근하면서 친근한 스타일은 많은 남자에게 영향을 끼쳤고, 특히 반바지에 관해서는 대담하게 허벅지를 드러낼 용기를 주었다.
메스칼은 싱어송라이터인 여동생 넬로부터 받은 음성 메시지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오빠 때문에 반바지가 유행이야. 고환을 드러내고 다니는 사람이 런던에 너무 많아”라고 놀리는 내용이었다.
그는 최근 <글래디에이터 2>를 비롯한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핏줄과 운명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 폴은 여동생 넬과 남동생 도나차와 함께 아일랜드의 메이누스라는 인구가 약 1만7천 명인 도시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경찰관이었고 아버지는 교사였으며, 메스칼은 원래 법대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연기를 해보기로 결심하고 트리니티 칼리지의 리르 아카데미에 지원했다.(게일릭 풋볼은 대학에 가서도 계속했지만 3학년 진급 직전에 턱뼈가 부러져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연기를 하겠다는 그의 결정을 부모님은 적극적으로 받아주었다. “두 분 모두 제 결정을 완전히 지지해주셨어요. 그리고 정말 다행인 건 제가 아일랜드 출신이었다는 점이죠”라고 메스칼은 말한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아일랜드 정부의 고등교육 지원금 덕분에 대학에서 연기 교육을 받는 데 1만 달러밖에 안 들었다는 것이다. 미국이었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랐으리라. “가령 학자금 대출을 20만 달러 정도 받은 상태에서 시작해 예술가로서 진정성을 지켜가며 커리어를 가꿔나가는 게 가능하긴 할까요? 만약 누군가 정말로 안 좋은 작업을 제안하는 대신 대출금을 갚을 수 있는 금액을 제시한다면 그때는 어떡해요?”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메스칼은 아카데미 졸업 이후 더블린에서 연극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가 참여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위대한 개츠비>가 있었고, 그 덕에 결국 <노멀 피플>의 주연을 따내기도 했다. 그리고 앞서 얘기한 것처럼 메스칼은 학자금 대출 등에 쫓기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예술가로서 진정성을 지키며 <애프터썬> 같은 영화를 할 수 있었다. <애프터썬>은 그에게 정말로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격스러운 작품이었다. 2022년 칸 영화제에서 관람을 마친 후 커튼 뒤에 숨어 “3분인가 4분 동안 쉬지 않고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연기를 시작한 이유가 바로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영화배우로서의 커리어가 점차 쌓여가기 시작한 그해에 메스칼은 연극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스탠리 코왈스키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메스칼의 부친 또한 아일랜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었다. 교직을 맡은 이후로는 무대에 전념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연기로 상도 몇 번이나 탔다고 한다. “말로 풀어내기 어려운데, 일단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연극에 대한 얘기를 딱히 나누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어느 순간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되자 아버지는 바로 이해해주셨죠”라고 메스칼은 설명한다.(이제는 교직에서 은퇴한 메스칼의 부친은 지난여름에 무대로 복귀했다.)
지난 4년을 돌아보며 폴은 가족 사이의 유대가 더욱 깊어진 것 같다며, 큰 계기 중 하나가 모친인 더블라의 다발성골수종 진단이었다고 밝힌다. 혈액암의 일종으로 주로 골수에서 증식하는 다발성골수종 소식을 들은 직후 메스칼은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촬영 현장에서 공황을 겪기도 했다. 모친의 병은 현재 완화 단계에 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늘 끈끈했어요.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열 배는 더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라고 그는 말한다.
운하를 따라 걷던 중 어느 순간 갑자기 폴의 정체가 들통나버렸다. 폴을 알아보고 수줍게 손을 흔든 뒤 “안녕, 폴!”이라며 작은 소리로 인사를 건넨 젊은 여성을 시작으로, 러닝을 하는 사람 한 명은 조금 더 대담하게 조금 더 큰 소리로“맙소사! 폴 메스칼이잖아!”라고 외치며 지나갔다.
러닝을 하던 또 다른 사람 하나는 멈춰서더니 “이런 부탁 진짜 별로인 거 알지만, 같이 사진 하나만 찍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메스칼의 작품들을 일일이 열거하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흥분했는지 운하 아래로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렇게 길에서 사귀게 된 우리의 새 친구가 떠나간 후 메스칼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종류의 만남이에요. 좋은 친구였어요. 정말이지 너무 좋은 녀석이에요”라고 말한다. 뒤에서 다가와 우리 옆을 지나쳐 달리는 사람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메스칼이 “걸어 다니는 동안 주위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구경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고 한다. 정체를 숨기는 건 일찌감치 무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라임 전기자전거 대여소에서 헤어졌다. 메스칼은 요즘 공유 전기자전거로 이동하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는 그를 행인들이 알아볼 수도 있고 어쩌면 비슷하게 생긴 많은 사람 중 하나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테다.
이튿날 저녁, 나는 노매드 호텔의 라이브러리 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호가니로 꾸민 우아한 공간의 한 테이블에는 20대들이 모여 소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국인 여성이 핫도그 의상을 한 남자와 만나 가까워졌는데 알고 보니 본인이 그 남자의 불륜 상대였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며 일행에게 웃음을 주고 있었다.
약간 지각한 메스칼은 허둥대며 바에 나타났고, 그가 들어서자 누가 조용히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실내에 진짜로 침묵이 깃들며 핫도그 의상을 걸친 남자의 불륜 얘기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메스칼은 호텔 앞에 라임 자전거를 주차할 곳이 없어서 한 바퀴 돌아야 했는데 길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사진 촬영을 요청하는 바람에 늦었다고 한다.
한숨 돌린 후 정신을 차린 그는 웨이터에게 달달하고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은 음료를 부탁했고, 웨이터는 그에게 파인애플 맛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잔에 장식된 야자나무 잎은 통째로 뜯어온 것처럼 컸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음료였지만 어째선지 메스칼이 그걸 마시는 모습은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서둘러 잔을 비운 그는 결국 같은 음료를 두 잔이나 추가 주문했고, 세 잔째에 이르러서는 나도 한 잔 주문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단한 스낵이 나오자 메스칼은 견과류를 부지런히 집어먹으면서도 작은 접시에 담긴 올리브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올리브는 못 먹어요. 실수로 블랙 올리브 타프나드를 먹은 적이 있는데요···.”라고 그가 말을 꺼낸다. 나는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어요. 스물네 살에서 스물여덟 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예전보다 시니컬해진 건가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실수로 타프나드를 먹었기 때문이지요”라고 응수한 그는 곧장 “아뇨, 그건 아니에요. 특정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그저 다양한 인생 경험이 축적되면서 그때까지 형성기라 할 수 있는 어린 시절 겪은 세상이 알고 보니 생각만큼 편안하지 않다는 사실을 한순간 깨닫게 된 거죠. 나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기도 하는 거예요”라는 대답을 한다.
현재 메스칼은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위태로울 정도로 유명세를 치르는 중이다. 집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서면 그곳이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든 클럽 안이든 언제라도 사진에 찍힐 가능성이 있고, 아마 실제로도 언제든 사진에 찍힐 것이 분명하다. 그의 연애사에 대해서는 무수하고도 광적인 추측이 난무한다. 나는 그가 걸치고 나온 검정 바탕에 흰 말이 그려진 스웨터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최근 그가 뮤지션 그레이시 에이브럼스와 함께 쇼핑에 나선 모습을 찍은 파파라치 사진을 본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다. 지난 5월에는 갓 이혼한 나탈리 포트만과 함께 웃으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사진에 찍혀 인터넷을 완전히 달궈놓기도 했다. 게다가 뮤지션 피비 브리저스를 향한 공개적인 구애와 이후의 열애, 그리고 이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이 메스칼의 생활 방식, 즉 그가 세운 경계 혹은 선에 영향을 끼쳤다.
“저 자신을 위해, 제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제가 하는 일들을 위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선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개인적인 영역을 보호하는 확고한 경계를 설정해두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저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관객이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아침 식사 메뉴 같은 정보를 갖고 화면 속 제 캐릭터를 멋대로 상상해버릴 수가 있거든요”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얘기를 들으며 4년 전 인터뷰 때와 달라진 점을 하나 더 발견했다. 당시 그는 갓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며 유명인이 된 이후에 뒤따르는 온갖 불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티가 났었다. 물론 지금이라고 그런 것들이 좋아진 건 아닐테고 실제로도 전혀 좋아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럼에도 표면적으로는 자신감 있게 대처하는 방법을 익힌 듯하다. “누군가 저에 대해 무심한 것보다는 차라리 맞든 틀리든 어떤 견해를 가져주는 편이 낫죠. 저의 진짜 모습을 저는 알고 있고, 그 모습은 꼭 지켜야 하는 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라고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메스칼은 친구들과 가깝게 지낸다. 그중 다수는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이거나 데이지 에드거존스 혹은 시어셔 로넌처럼 작품을 하며 알게 된 이들이다. (인터뷰 도중 조시 오코너와 앤드류 스콧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각각 다른 작품에서 메스칼의 동성 애인으로 출연한 적 있는 둘이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메스칼이 공개적으로 SNS 계정을 운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가 소셜 미디어를 안 보는 건 아니다. 지난해 겨울, 메스칼이 원나잇 스탠드를 하고 다음날 상대와 함께 공원을 산책한 뒤 새나 나무를 가리켜 주의를 돌린 다음 반대 방향으로 달려서 도망가곤 한다는 루머가 틱톡에서 시작되어 돈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잠시 있던 그는 얼굴이 빨개져라 폭소를 터뜨리며 “미친 얘기죠!”라고 외친다.
문제의 틱톡 영상들이 처음 올라오기 시작할 때 메스칼은 동생들과 함께 연휴를 보내는 중이었다. “동생들과 함께 보면서 엄청 웃었어요. 전혀 사실이 아닌 얘기들이었고, 우리는 진짜로 계속해서 웃었어요”라고 말을 시작한 그는 “한 가지 불쾌한 것은, 제가 그때 부엌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틱톡 영상들을 보시더니 속상해하시더라고요. 최악이지 않나요? 저와 제 동생들에게는 그게 얼마나 웃긴 건지 어머니에게 설명해야 했죠. 우리는 인터넷이란 곳이 원래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진짜 웃겼어요. 만약 그 내용이 사실이었다면 상황이 아주 나빴겠지만, 루머로서는 재미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다 문득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런 일이 생기면 나서서 ‘내 아들은 그럴 리가 없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몇 차례 더 웃음을 터뜨린 뒤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로 했지만 결국 그 주제로 되돌아가고야 말았다. 그런 얘기가 나왔다는 것 자체에, 그리고 그가 보인 반응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 대해 메스칼이 불안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걱정을 내려놓고 바의 책장에 꽂힌 서적을 뒤적거리다 <런던의 숨겨 진 산책로> 시리즈를 집어 들었다. 책을 들고선 “세 권이나 있네요”라고 하더니 참지 못하고 농담을 던진다. “데이트하다 말고 도망칠 코스를 짜기 위해서 이 책들을 참고해야겠어요.”
과거에 이어 다시 한번 어떤 변곡점에 놓인 메스칼과의 재회를 앞두고 그의 커리어를 곰곰이 살펴보았다. 어린 시절 하이틴 쇼에 출연한 과거로 괴로워할 일도 없고 연기력으로 부끄러워할 일도 없었다.(데니 소시지 광고에 출연한 적은 있다지만 “출연료로 월세를 5개월이나 낼 수 있었으니 데니를 비방하는 말 같은 건 듣지 않겠습니다”라고 입장을 밝힌다.) 이미 그는 수많은 가능성을 누리고 있고 앞으로 더더욱 풍성한 커리어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
간단히 말하면 2020년에 폴 메스칼은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고 그건 지금에 와서도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나아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제가 지금껏 해온 작품들 중 <글래디에이터 2>가 대중적인 측면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영화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제가 배우로서 목표하는 바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의 기반은 스스로 갖췄다고 생각하기도 해요”라는 그는 “결국 이번 작품이 제 인생에서 모든 걸 압도할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라는 얘기예요”라고 말한다.
메스칼은 차기작으로 더 큰 영화는 물론이고 더 작은 영화들에도 출연할 예정이며 연극 무대에도 다시 오를 것이라고 한다. 같이 일해보고 싶은 영화감독은 충분히 있고 다시 작업해보고 싶은 감독들도 있으며, <애프터썬>의 샬롯 웰스 감독과는 “드 니로-스콜세지” 같은 관계를 키워나가기를 꿈꾼다. 폴 매카트니 역으로 메스칼이 출연한다는 루머가 돌았던 비틀스 전기영화에 대해서는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굉장히 크지만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어요”라고 한다.
앞으로 출연이 정해진 영화 중에는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메스칼의 지난 인생을 단계별로 기록할 <메릴리 위 롤 어롱>이 있다. 12년에 걸쳐 <보이후드>를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장장 20년을 들여 제작하기로 발표한 이번 영화는 스티븐 손드하임의 동명 뮤지컬을 원작으로 삼아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펼쳐지는 세 친구의 삶을 그린다. 메스칼에게는 카리스마 넘치는 작곡가이자 친구와 가족을 잃는 대신 성공을 손에 넣은 프랭클린 셰퍼드 역이 주어졌다.
뮤지컬 영화로 잔뼈가 굵은 비니 펠드스타인과 벤 플랫이 메스칼과 함께 캐스팅 되었으며, 배우들은 몇 년마다 한 번씩 모여 영화의 일부를 촬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스토리가 역순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메스칼이 현재 촬영하는 분량은 영화 맨 마지막에 사용된다. 촬영은 2042년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가 되면 메스칼은 이미 40대일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프랭클린 같은 사람은 정말이지 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정착해서 결혼하고 아이들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메스칼은 말하지만, 그렇게나 먼 미래를 상상하거나 계획하는 건 그에게 아직 어렵다. 그는 젊고 눈앞의 현재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가 먼 미래에 대한 생각을 피하려 하는 이유를 한 가지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저는 제가 오래 살 수 없을 거라고 늘 믿어왔어요”라고 털어놓는 그에게서 아무런 두려움이나 괴로움이 엿보이지 않는다. 그저 하늘이 파랗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담담하다. 그리고 그런 말에 대해 나는 어렵지 않게 예상 가능한 뻔한 반응을 보였다.
“저도 알아요. 다들 비슷하게 반응하곤 하는데, 제가 어떤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직감으로 아는 거예요. 어쩌면 제가 여든 살이 된 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 원인일 수도 있겠어요”라고 해명한다.
오래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예감을 얘기하면서도 묘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한데요?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기도 해요. 그러니 예를 들어 제가 쉰다섯 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아흔 살에 죽는 것과 똑같이 두려워할 거예요.”
하지만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건 어느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그렇죠. 그래서 저는 ‘죽을 준비가 되었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아무도 믿지 않아요. ‘웃기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죠.”
일찍 죽을 거라는 예감은 어떻게 품게 되었나요? “제 머릿속에 늘 있었어요. 일찍 가정을 꾸려야겠다고,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생각했죠. 제 예감이 틀리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마도 틀렸을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어쨌든 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믿었어요.”
뼛속까지 게일릭 풋볼 선수인 메스칼은 지금 그가 누리는 순간을 퍼플 패치에 비유한다. 즉, 예외적으로 일이 잘 풀리는 기간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 그를 괴롭히는 신경증적 불안은 이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메스칼은 지금이 자신의 전성기이고 대중이 자신을 원하지만, 이런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예상되기에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이 너무나 좋기에 이것들이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메스칼이 느끼는 이런 감정들을 가장 단순하게 정리해보자면, 행복하고 일이 잘 풀린다 해도 인생이 영원히 그렇게 좋게만 흘러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기저에 어떤 우울감이 흐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던 메스칼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깃들었다. 그는 조금 들뜬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직업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좋은 것들이 영원할 수도 있죠. 이상하게도 그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정말 드물긴 하지만···, 그렇죠”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그렇게 되기를 정말 간절하게 원해요”라고 털어놓는다. 그의 이 한마디는 진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