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키워드로 살핀, 2024의 밴드 실리카겔.
GQ 키워드 #1. ‘올해, 오래 남을 순간’.
HJ 저는 왜 좋았던 일보다 꼭 안 좋은 일이 먼저 떠오를까요? 한 지방 공연에서 음향 사고가 나는 바람에 팬분들이 오래 기다리셨던 날이 있어요. 비극적인 상황일 수 있었는데 극복하려고, 임기응변하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니 오랫동안 라이브로 보여드리지 못했던 곡도 하고, 꽤나 뿌듯하더라고요. 우리가 진짜 팀은 팀이구나 싶고.
WH 해외 일정으로 프랑스 한갓진 도시에서 빡세지 않은 시간을 보냈어요. 호텔방에서 술도 마시고 시간도 낭비하고. 아 시간 낭비, 너무 좋아.(웃음)
GJ 저는 오히려 균일하게 보낸 하루들이 기억나요.
CC 최근 대만 공연요. 연초부터 지금까지 업그레이드된 공연과 퍼포먼스를 계속하고 있는데, 각자 고민하고 준비했던 것들을 대만 공연 무대 올라가기 전에 이야기하며 공유했거든요. 올해 가지고 있던 목표 중에서 꽤나 현실화된 하나의 움직임으로 보여진 어떤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계획은 성공적이었고, 끝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확실하게 ‘모였네’.
GQ 키워드 #2. 쏜살, 쏘지 않은 살.
CC 벼르다가 못 한 건 운동. 수영하고 싶었는데.
GJ 벼르다가 한 건 트윈 페달. 십 몇 년 동안 싱글 페달로 치다가 트윈으로 넘어갔어요. 재밌어요. 드럼 처음 칠 때 생각도 나고.
WH 작년 인터뷰에서 “최웅희가 누군지 내년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카뮈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하나도 못 했어요. 메모장에 두 글자 썼네요. ‘일단’. 게을러서 어떡하나, 아이고.
HJ 벼르다가 해낸 것은, 제 파트의 신시사이저, 컴퓨터 등 장비적인 부분들. 큰 공사이고, 돈도 시간도 많이 필요한 일이라 집요하게 연구해서 뿌듯해요. 못 한 것 중에서 대표적인 건, 사이드 프로젝트. 준비만 몇 년째, ‘다음에 하면 되지’ 하고 방구석에 던져버려요. 저는 지구상에서 시간을 제일 현명하지 못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고장 나 있는 것 같아요.
GQ 키워드 #3. ‘한국대중음식상 모던디시 부문’.
HJ 노들섬 근처의 퍼멘츠. 좋아하는 메뉴가 너무 많은데, 대파 후무스와 바게트를 같이 먹으면 굉장히 맛있어요. 와인, 위스키 페어링하면 더 좋죠.
WH 마포옥의 양지 곰탕, 그리고 라면. 보수파라서 신라면을 꼽겠습니다.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레시피대로 먹는 걸 좋아하는데, 달걀은 넣어야죠. 달걀까지는 원작자의 의도예요.
GJ 최근에 집에서 미트볼이랑 리소토를 만들어 먹어봤는데, 재밌더라고요. 식빵을 잘게 부숴서 미트볼을 만들고, 생쌀로 리소토를 했어요. 치킨스톡이 좀 ‘사기’다 싶더라고요.
CC 아내가 연어찜을 했는데 건강식인 데다 너무 맛있었어요. 연어에 레몬, 화이트 와인, 방울토마토, 딜이면 충분해요.
GQ 키워드 #4. ‘냄새나는, 기억하거나 잊고싶은 것’.
CC 무대마다 분위기가 냄새처럼 풍길 때가 있거든요. ‘오늘 쉽지 않겠군’ 느껴지는 무대가 있는가 하면, ‘오늘 되게 좋은 느낌인데!’ 싶은 무대도 있죠. 어느 하나 잊고 싶지 않아요.
HJ 올해 저한테는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났지만, 안 좋은 일도 많았는데 잊고 싶지가 않아요. 오히려 기억해두고 더 나아지기 위한 양분으로 쓰고 싶어요. 똥도 비료로 쓰잖아요. 올해, 제가 스무 살때 같이 밴드 하려고 했던 형이 세상을 떠났어요. 제가 원래 엄청 하드하게 일하는 걸 좋아하는데, 형을 보내고 나서 처음으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내가 음악을 만들어서 계속 내 음악을 발표하고 유통하면서 살고 있지만, 결국 내 주변의 제일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나로 인해 큰 상처를 받지 않아야 할 텐데 까지 생각이 미쳤어요. 내 삶을 잘 간수해야겠다싶었고요. 그 일이 제게는 큰 상처였는데, 상처를 잊지 않고 내 안에 담아두고 숙성시키고 싶어요. 심지어 농담거리로도 써요. 잔혹한 농담이죠. 생전에 했던 말이나 표정, 재미있는 특징까지 다 기억하고 싶어서 사운드 클라우드에 형이 만들었던 노래를 커버해서 올려놨어요.
GJ 저도 이 얘기 할까 말까 했는데, 해야겠네요. 올해 초 아내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일본 분이셔서 제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잘 보내드려야 할 텐데, 라는 마음과 아닌 마음이 공존해서 묘하더라고요. 저는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죽음이 대수롭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일본 장례 문화를 가까이에서 겪으니 제가 차분해지더라고요. 그동안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 것들이 어린 시절의 결함에 대한 반작용이 었나? 그런 복합적인 생각이 들고요.
WH 저도 다른 세 멤버처럼 아픈 기억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올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경험이 딱 하나 있었어요. 이건 내 인생에 쓸모없는 경험이다, 지우는 게 낫다 싶은. 공연하러 호주가는 저가 항공 비즈니스석에서 무언가에 취한 외국인 승객이 장장 10시간 동안 부리는 행패를 견뎌야 했어요. 승무원이 제지를 해도 소용이 없고 하여튼 난리도 아니었어요. 나중에 이코노미석으로 바꿔달라고 해서 ‘여기가 비즈니스석이다’ 하고 쉬면서 갔죠. 이상, 버리고 싶은 ‘개 쩌는’ 냄새나는 순간이었습니다.
SG (건재, 한주, 춘추) 아, 이미 잊고 있었는데!
GQ 키워드 #5. 유한 반복.
GJ 팻보이 슬림의 ‘Praise you’.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조용히 집안일하면서 아껴 들은 곡은 브래드 멜다우의 ‘Massive Attack live Teardrop’.
WH 많이 들은 음악, 아껴 듣고 싶은 음악 모두 호주 사이키델릭 밴드 킹기자드 앤 더 리자드 위자드.
CC 많이 들은 건 포크 싱어송라이터 제시카 프랫. 아껴 들은 건 존 T.A. 반더슬라이스가 2023년에 낸 음반 <Crystals 3.0>. 흥미로운 요소가 많아서 가끔 각 잡고 들어요.
HJ 오랜만에 반복해서 들은 건 제인 리무버의 ‘Magic I Want U’ . ‘Dariacore’ 장르의 개척자라고 할 만한 사람인데, 음악의 전개가 팝 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듯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소리와 파트가 연속적으로 나와요. 그리고 아껴 들은 음악으로 꼽을 수 있는 건 밀란 W. 전자음악적인 부분, 싱어송라이터 스타일을 잘 결합해서 되게 특이한 앨범을 만드는 사람이에요. 되게 진지하고 깊은 맛이 나요. 마치 모수처럼? 그런데 모수 안 가봤어요.(웃음)
GQ 키워드 #6. ‘개봉박두’. 올해 많이 들은 음악을 물은 이유를 이제 개봉해요. 현재 많이 듣는 노래가 다음 앨범에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거든요.
HJ 멤버가 4명이니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필요하겠죠. 어느 정도 진행 중인지는, 비밀입니다.
GQ 키워드 #7. ‘졸업’. 졸업하고 싶은 것은?
WH 이제껏 어머니 아버지 집에 얹혀 살기에서 드디어 졸업하려고 합니다.
HJ 감정 기복으로부터 졸업하고 싶어요. 대체로 행복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할 줄 아는 개발자들이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는 앙케트를 봤는데, 저도 그 말을 믿어요. 음악을 오랫동안 많이 만들고 싶거든요.
GJ 졸업하고 싶다는 마음 졸업하기.
CC ‘그냥 하는 것’로부터 졸업.
GQ 키워드 #8. ‘2024와 2025를 잇는 정류장에 내가 붙인 이름’.
GJ #짚어봄. 결산하기엔 아직 남았고, 시작이란 어느 때든 좋은데, 후회하기엔 좀 이른 시기 아닌가 싶어서요. 앞으로 11월은 짚어보는 한 계절로.
CC #12월32일. 결국 실리카겔의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HJ #응애. 풍만하게 받은 사랑을 생명력 있는 활동으로 보은하고픈 의지와 아직 부족하지만 잠재력이 넘치는 시기이기에···.
WH #용산고속터미널인천공항. 2025년으로 환승해 더 빠르고 거대한 일을 저질러보고 싶어요. 환승할 준비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