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돈 내고 소주 마시면 바보라는 말이 돈다.
지난 9월 10일, 하이트진로에서 새로운 소주를 출시했다. 알코올 도수가 더 낮아진 16.9도의 ‘참이슬’이다. 첫 출시 지역은 부산이다. 이에 맞서는 또 다른 신제품이 6일 뒤에 출시됐다. 부산의 주류 기업 대선주조에서 만든, 16.9도의 ‘C1 블루로즈’다. 수도권의 대표 소주인 참이슬이 지역 소주가 득세하는 부산에서 처음으로 신제품을 출시하는 까닭, 그 도전에 바로 대응하는 향토기업. 이 보기 드문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 좀 긴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요즘 밤마다 부산은 소리 없는 전쟁터가 된다. 국내 내로라하는 굵직한 주류 기업들이 부산 시장을 한꺼번에 정조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 술이 있고, 술이 있는 곳에 주류 영업사원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지금 부산은 ‘난장판’에 가깝다는 것이 영업사원들의 이야기다. 부산 시내 술집에 앉아 있으면, 제품을 알리기 위해 룰렛 게임판을 들고 다니는 판촉 요원들을 적잖이 만난다. ‘한 가게에 판촉은 한 팀만’이라는 불문율도 생겼다. 출시 3개월이 지나면 시음 행사는 법적으로 불가하지만, 부산에 서 제 돈 내고 술 사 먹는 사람은 바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이 전쟁터의 주무기는 저도 위스키와 저도 소주다. 시작은 ‘골든블루’와 ‘순하리 처음처럼’이다. 골든블루는 36.5도의 위스키, 순하리 처음처럼은 유자향을 더한 14도의 소주다. 이들이 부산을 강타한 이후 주류 업계의 판도가 많이 바뀌었다.
골든블루는 주류 회사 ‘수석밀레니엄’에 서 2009년 처음 출시한 36.5도의 위스키다. 주로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양주’라고 불리며 판매되는 국산 위스키다. 수석무역이 경영에 참여한 주류 회사로 2008년 부산의 약주 회사 ‘천년 약속’을 인수해 그 공장에서 골든블루 원액을 병입했다. 당시 수석무역은 J&B, 딤플 등의 위스키를 취급하고 와인 수입도 하고 있었고, 더 큰 종합 주류 회사를 꿈꾸던 중에 야심차게 신제품을 내놓았다. 유흥업소 종사자들을 주주로 참여시키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지만 본격 적으로 영업이 풀리기 시작한 건 2011년 말 즈음이다. 수석무역이 골든블루를 부산 연고 자동차 부품 회사에 매각하면서 골든블루가 부산 지역에 영엽력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골든블루라는 사명으로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당시 자동차 부품 업체의 대표가 부산 지역 유흥 업소를 중심으로 인맥이 상당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유흥업소 종업원들이 도수가 낮은 술을 격하게 환영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내 골든블루의 상한가로 이어졌다. 2011년 말 매출액이 1백46억원, 2년 뒤에는 3배 가까이 올라 4백44억원을 기록했다. 유흥업소를 대상으로 하는 주류 회사의 영업 방식은 보통 유흥 업소 대표(흔히 ‘마담’이라고 부르는)에게 해외 골프 여행을 제공하는 식이었는데, 골든블루는 이런 영업 비용을 절약하면서 인맥으로 상권을 뻥 뚫었다. 그리고 2015년 1분기 매출액 순위로 롯데주류의 ‘스카치블루’를 제치고 3위를 차지 하면서 전통적인 위스키 강자인 디아지오와 페르노리카의 콧털을 건드렸다.
싱글 몰트위스키의 시장이 아무리 커졌다고 한들 하룻밤 새 유흥업소에서 코끼리처럼 소비되는 위스키의 양을 따라잡을 순 없다. 싱글 몰트위스키는 출고량, 점유율 모든 면에서 전체 시장의 5퍼센트에 불과하다. 몰트 바Bar가 아무리 뜨고 있다고 해도, 전체 위스키 시장은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러니 서울 다음으로 큰 주류 소비 시장인 부산에서 골든블루가 50퍼센트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했다는 건 업계에는 비상 사태에 가깝다. 골든블루가 부산 외 다른 지역에선 영업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전체 점유율을 지키려면 부산을 치고 들어가야 한다는 계산이 선다. 롯데주류가 주피터 마일드 블루로, 디아지오가 윈저W아이스로 맞불을 지폈는데, 공략 지점은 ‘35도의 낮은 도수’였다. 부산에서 불붙은 위스키 대기업들의 경쟁에 언론들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주로 ‘부산 저도주 전쟁’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많이 쏟아냈다. 한 주류 회사 마케팅 담당자는 이렇게 말한다. “부산 사람들에게 저도주가 통하기 때문에, 혹은 그들이 특별히 저도주를 선호하기 때문에 부산에서 저도 위스키를 출시하는 건 아니에요. 인과관계가 그렇진 않아요. 골든블루를 잡기 위해서 비슷한 도수로 공략하는 겁니다.” 유흥업소에서 소비되는 위스키 제품군을 차별화하기란 쉽지 않다. 원액을 고급화하거나 맛을 차별화하는 방법으로는 명확한 전달이 힘들다. 눈에 확 드러나는 숫자, 숙성년도나 도수 등이 오히려 쉽다.
부산에서 처음 출시된 ‘순하리 처음처럼’ 은 지역 소주가 강한 부산 시장에 뛰어드는 롯데주류만의 마케팅이었다. 부산 지역 전통 강자 C1 소주가 경남의 소주 회사인 ‘무학’에서 만든 ‘좋은데이’에게 잡히는 사건을 목도한 뒤였다. 2009년만 해도 C1의 부산 시장 소주 점유율이 90퍼센트에 육박했지만, ‘좋은데이’가 70~75퍼센트를 빼앗아가는 데 걸린 기간이 고작 1년이 었다. 철옹성 같을 줄 알았던 향토 주류 회사가 한 순간에 뒤집어지는 것을 봤으니, 전국구 브랜드가 부산을 공략할 틈을 발견한 것이다. 제조 사 입장에서는 시장 규모도 큰 데다 잃을 것이 없는 시장이며, 한 번 터지면 크게 퍼지는 부산을 포기할 리 없다. 그렇게 올해 3월 ‘순하리 처음처럼’이 부산에 처음 출시됐다. 자극적인 음식이 많은 동네에 좀 달콤한 술로 승부수를 띄워보자는 것이었다. 전국구로 출시할 때보다 더 과감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기 때문에 ‘순하리 처음처럼’이 탄생할 수 있었다. ‘순하리’의 성공을 보고 뒤이어 뛰어든 후발 주자의 공략 지점은 ‘낮은 도수’와 ‘과일 맛’이었다. 좋은데이도 블루베리, 석류 등의 과일 맛 소주를 내놨고 서울에 있던 참이슬은 자몽 맛을 출시했다. 희석식 증류주인 소주는 (앞선 위스키 사례와 마찬 가지로) 차별화 방안을 내기가 힘든 술이다. 와인처럼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카치 위스키처럼 역사가 깊은 것도 아니며, 술맛 자체가 풍성하지도 못하니, 눈에 보이는 확실한 변화를 ‘도수’와 ‘칵테일 같은 맛’에서 찾는 게 쉽다. 보해양조가 ‘부라더 #소다’라는 탄산 소다 소주를 출시한 것도 같은 고민의 결과다.
우연히 위스키와 소주 업계가 모두 저도주를 무기로 삼았지만, 주류업계에서 저도주는 늘 시도하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통하지 않았던 적이 별로 없다. 10여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소주 도수가 내려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부산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저도주’가 이슈라기보다 마케팅이 잘 통하는 큰 규모의 시장을 점거하려는 주류 회사들의 전략 베끼기에 가깝다. 여기서 의문 하나 더. 부산은 왜 주류에 민감할까?
업계 관계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먼저 부산 지역 사람들 특유의 성향을 꼽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남이가” 정신, 어울려 마시는 술 문화 때문에 한 브랜드가 빨리 입소문을 탄다고 말했다. 한 주류 업계의 소비자 조사에 따르면 이런 성향은 20~30대 젊은층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니 유행이 더 팽팽 돌수밖에 없다. 이자카야, 가라오케 등이 최초로 국내에 수입된 곳이 부산이라는 배경도 무시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위스키 업계의 한 전문가는 부산 지역의 상권이 밀집돼 있다는 점을 들었다. 서울에 비하면 다운타운의 면적이 넓지 않아 상대적으로 유행이 퍼지기가 쉽다는 점이다. 한 바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진단했다. “연예인이나 유학생처럼 그동안 새로운 문화를 이끌었던 트렌드 리더 집단이 부산에는 상대적으로 덜 형성돼 있다 보니, 오히려 집단 전체가 움직이는 대중적인 유행이 더 빠르게 일어나는 것 같다. 털털하고 대중 친화적인 술 문화는 빠르게 퍼지는 지역이지만, 비대중적이고 복잡한 성격의 고급 주류까지 활성화될지는 미지수다.”
‘주류 업계 테스트베드, 부산’, ‘부산에서 통하면 서울에서도 통한다’. 주류 회사들이 보도자료로 뿌리는 헤드라인이다. 하지만 부산에서 성공한 브랜드가 과연 전국구에서도 통할지에 대해서는 업계 관계자들은 고개를 젓는다. 주류 기업들은 부산 시장을 잡기 위해 기존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마케팅을 시도하고 그 지역 경쟁 상황에 맞는 제품을 출시하는 것뿐이지, 이것이 다른 지역에도 통할지 여부를 고려하거나 확인하진 않는다는 설명이다. 우르르 쏟아진 부산 지역 주류 신제품들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을 앞으로 꽤 많이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 에디터
- 손기은
- 포토그래퍼
- 문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