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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수 “저는 모든 장르를 멜로라고 여겨요”

2025.03.25김은희

박해수, 그 안의 아이가 자라서.

티셔츠, 벨루티. 벨트, 케이트. 슈즈, 프라다. 안경, 레이벤 by 에실로룩소티카. 레이어드 네크리스, 돌체앤가바나. 시계, 론진. 반지, 넘버링. 팬츠, 양말은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사과부터 전하고 싶어요.
HS 왜애? 왜요?
GQ 벌써 작년이네요. 연극 <벚꽃동산>을 보지 못했어요. 예매까지 해두었다가 일이 생겨 취소하곤 다시 못 했거든요.
HS 아이. 기간도 짧았어요. 한 달밖에 안 돼서.(<벚꽃동산>은 2024년 6월 4일부터 7월 7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열렸다.)
GQ 이게 무대 예술의 매력이구나 싶기도 해요. 지나가면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것. 휘발되지만 관객들에게는 저마다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 거란 점도요.
HS 맞아요. 그 순간성. 관객과 배우가 느낄 수 있는 그 순간, 그 시간, 그 시기. 지나가면 사라지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만큼 파도처럼 사라지는 것도 감동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GQ 박해수로서는 <벚꽃동산>을 돌아보면 어떤 순간이 가장 깊게 남아 있나요?
HS 처음 만났을 때 같아요. 처음 배우들과 만나고 사이먼 스톤이라는 연출가와 일주일 동안 같이 스터디, 그러니까 캐릭터를 만들었던 그 순간. 연출가가 자기 삶에 대한 얘기를 터놓게 했어요. 많은 배우가 사실 이제 막 만나서 어색한 그 순간에도 자기의 과거, 상처, 약한 점, 트라우마, 자랑거리, 자신감, 이런 것들을 슬슬 얘기를 꺼내놓기 시작하면서 배역을 함께 만들어나갔는데 그때가 이상하게 뭔가···, 배우들의 솔직함들이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그러면서 만들어지다 보니까 그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어요.
GQ 그런 자리에서 자신의 얘기를 잘 꺼내는 사람인가요?
HS 이제는 좀 꺼낼 수 있는 것 같고, 예전에는 잘 모르겠어요. 친한 친구들은 제 모든 인생 얘기를 아는데 그 외 인간관계가 넓지는 않거든요. 일을 할 때도 몇 달 지나 인간적으로 친분이 생기면 모르겠는데 첫 대면부터 (연출가가) 살살 화두를 꺼내더니만 서로가 막 꺼내는 경험은 잘. 새로웠죠. 감동적이었고.
GQ 보지는 못했지만 소문은 들었습니다. 곧 앞둔 부산 공연에 이어 세계 투어도 고려되고 있을 정도로 잘 빚은 연극이라고요.
HS 또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좋겠어요.

레더 재킷, 마틴 로즈. 슬리브리스, 지방시. 데님 팬츠, 캘빈클라인. 벨트, 돌체앤가바나.

GQ 그런데 공연 초반 무대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고요.
HS 아유, 저의 큰···.
GQ 꺼내기 좀 까다로운 이야기일까요, 혹시?
HS 아뇨, 전혀요. 전혀. 공연 초반에 제가 대사를 통으로 날려버린 적이 있죠. 사실은 저한테는 정말 감사한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그게 이 배역한테는 가장 중요한 대사였어요. 그 말을 하려고 (그 장면에) 들어왔는데 그 말을 빼먹은 거예요. 제가 맡은 캐릭터가 그 집 기업을 살리려고 찾아가서 회사를 팔아야 된다, “그래야지만 이 집안이 살 수 있습니다” 하고 한 8 줄 정도 되는 대사를 쭉 나열해야 했어요. 사람들은 못 들은 체하고. 그럼 나는 또 이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간절하게 얘기해야 하는데 그 부분을 다 날린 거예요. 퇴장해야 하는 순간에야 기억이 난 거죠. 그때부터 막 쏟아 부었어요. 순서가 틀렸는데.
GQ 대사를 잊은 줄도 모르고 있다가 생각난 거네요.
HS 네.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갔지? 아무도 눈치 못 챘다가. 아, 동료 배우들은 아마 알았겠죠. 그래서 제가 (대사를)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더니 그때 멋있는 일이 일어났어요. 그 많은 아홉 명의 배우가 저를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끝까지 들어주고, 끝까지 다시 만들게 했어요. 실수가 만들어낸 팀워크의 느낌?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정말 와, 동료들에게 너무 감사한 경험이었어요.
GQ 해결도 중요하지만 그 폭풍이 지나간 후의 마음가짐이란 게 또 있죠. 가령 실수를 다시 들추는 게 싫을 수도 있잖아요. 일단 그에 대해 괜찮다 하셨지만.
HS 전혀. 저는 이 작품을 하면서 굉장히 크게 얻은 게,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 같아요. 배우 간의 약속에서 어긋나는 건 주의해야 되지만, 믿을 수 있는 서로가 있다면 사실 실수를 해야 서로가 허점이 드러나거든요. 그랬을 때 그걸 극복하고 얻어낼 수 있는 게 생기는 것 같아요. 너무 완벽하려고, 나 스스로 다치지 않으려고 하지 않아도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GQ 그걸 이번에야 배웠다고 들리네요.
HS 예전에는 두려움도 많았고, 약속이 많은 작품들을 하기도 했고, 한 번이라도 틀리면 스스로 자책을 엄청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렇게까지 제가 즉흥성 있고 돌발적인 상황에 잘 적응하는 편은 아니에요. 이번에는 그렇게 훈련했어요. 실수가 만들어내는 집중이 있다. 배우들을 믿어라. 괜찮다. 그래서 저도 대처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약속대로 다 지켜서 해야 했으면 아마 그냥 넘어갔을 거예요. 제가 다시 바로 하지 않았겠죠? 그랬을 것 같아요.

재킷, 팬츠, 벨트, 슈즈, 모두 맥퀸. 티셔츠, 사카이.

GQ 이번에 맡았던 황두식, 원작에서는 로빠힌이란 캐릭터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면 자수성가한 인물이죠. 박해수식으로 묘사해보자면 어떤 사람인가요?
HS 현실을 말하고 미래를 향해 있지만 정작 그는 과거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 아버지라는 기억,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갇혀 있는 사람.
GQ 그 점이 닮았어요 박해수라는 사람과?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극이지만 이를 중심으로 돌아보는 이유는, 처음에 말씀하셨듯 황두식이라는 캐릭터에 인간 박해수가 많이 투영된 걸로 알아서예요.
HS 제가 진짜 많이 투영됐던 인물이에요. 원래 저는 작품을 할 때 그 캐릭터 안에 있는, 그 배역이 가지고 있는 성향을 많이 좇고 싶어서 그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편이에요. 이번에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꺼내놓는 것부터 시작하다 보니까 이 황두식이라는 역할은 박해수라는 인물처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굉장히 많고 그에 대한 인정 욕구도 많은 친구일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그 안에서 접근했어요. 황두식이란 사람도 저란 사람도, 우리 아버지는 뭐 그렇게까지 무섭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위대함이 있었어요. 그 아버지한테 인정받고 싶어 했죠. 그러면서 느끼는 동기, 힘에서 공감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저와 달리 그에게는 이제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그래서 그는 옛날 아버지의 기억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 좀 있죠. 거기에서 오는 아픔이 있죠. 그런 존재라고 저는 황두식이란 인물을 바라봤어요.

재킷, 팬츠, 모두 버버리.

GQ 박해수라는 인물은 무엇을 인정받고 싶었어요?
HS 아버지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은 결국 거울로 봤을 때 내가 나를 인정하고 싶다는 것과 같은 의미 같아요. 나 스스로에 대한 인정, 자신에 대한 만족이 포함돼 있는 것 같아요. 어릴 때 아버지란 존재 자체가 컸고, 성인으로서 내 일로 외부에서 신뢰받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지 싶어요.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반대하신 것도 없어요. “네 갈 길을 가라” 하셨지.
GQ 지금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떠올려보면 어떤가요?
HS 참 세월이 많이 갔다. 흐허허허. 힘이 빠졌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고,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생각이 좀 들기는 해요. 옛날처럼 좀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지 않은 모습들이 지금은 보여요. 아마 나중에 돌아보면 이 시기가 제게는 자유로워지던 때로 느껴질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번 공연도 그랬고, 가장 소중한 가족이 생겼고, 아이도 생겼고, 그러다 보니까 내가 꽉 잡고 있는다고 그게 잘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조금 내려놓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내 가족을 위해서도 자유로울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이 좀 들어요.
GQ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요? 가족이 생긴 것과 내가 꽉 잡고 있는 것이 만사가 아니라고 느낀 것 사이에.
HS 아, 이 사람 때문에 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아빠로서 진짜 내가 생명을 내놓을 수 있겠구나 싶은 아이와 가족, 진짜 소중한 것이 내 눈앞에 생겨서. 연기도 그만큼 소중하고 허투루 하고 있지 않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 눈앞에 있으니 오히려 가벼워지더라고요. 생각도 시선도 더 열리기도 하고. 저는 두려워서 못 할 것 같고 불안하고 고민이 많아서 꽉 잡고 있었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가장 소중한 것이 생기다 보니까 오히려 더 자유로워지지 않았나 싶어요.

코트, 페라가모. 이너 톱, 로에베. 검지와 중지, 소지의 반지, 모두 톰우드. 약지의 반지, 크롬하츠.
코트, 페라가모. 이너 톱, 로에베. 검지와 중지, 소지의 반지, 모두 톰우드. 약지의 반지, 크롬하츠.

GQ 모든 작품을 멜로라고 생각한다고, 아까 <지큐> 디지털 콘텐츠 촬영 때 그랬죠. 앞으로 공개될 신작들, 가령 <악연>에서는 미스터리한 목격자이고, <대홍수>에서는 지구 재난에 휘말린 인물이고, 여하튼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어 보여도 그것을 대하는 박해수의 태도는 멜로라는 시선이 흥미로워요.
HS 저는 멜로가 굉장히 격정적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가진 감정 중에서 굉장히 파고가 높다고 생각해요. 무슨 캐릭터든 일어나는 시기에는 어떤 사랑의 존재가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를 늘 갖고 있어요. SF든 스릴러든 뭐든. 예를 들어 트라우마라 할지라도 그것에는 어릴 때의 어떤 기억, 사랑의 감정, 존재 이유에 대한 무엇이 담겨 있겠죠. 인간 본성, 가장 기초적인 감정이자 본질은 결국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 같아요. 그래서 저는 모든 장르를 멜로라고 여겨요. 그게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멜로, 로맨스는 아닐지언정.
GQ 사랑이 뭐예요?
HS 다 퍼주는 거죠. 막 그냥 막 퍼주는 것. 산산조각이 나도 퍼주는 것. 내가 그런 사랑을 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산산조각이 난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그렇게 많이 받아왔던 것 같아요, 결국은. 이유 없이 퍼주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저도 그렇게. 사랑은 메마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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