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라렌은 더 이상 자동차만 고집스럽게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 자전거, 의료용 센서, 치약을 만드는 데도 그들의 기술이 쓰인다.
2012년 3월, 글락소 스미스클라인(GSK)사의 엔지니어 션 글로버는 맥라렌 테크놀리지 그룹의 본사를 방문했다. 1년 전 맥라렌 CEO이자 설립자 론 데니스와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의 CEO 앤드류 위티가 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회사 내부의 요청이 있었고, 우리가 먼저 나섰어요.” 글로버가 말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치약 공장의 엔지니어링 본부장을 맡고 있다. 그곳에선 센소다인, 아쿠아프레시, 매클린 등 다양한 브랜드의 치약이 연간 4억 개씩 생산된다. “포뮬러1 경주 팀이 우리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실 치약 제조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의아하기도 했고요”
그날, 글로버와 그의 팀은 맥라렌 어플라이드 테크놀로지(MAT)의 조프 맥그래스를 만났다. MAT는 포뮬러1의 작업 방식을 GSK같이 다른 업종의 회사에 적용하기 위해 론 데니스가 2004년에 설립한 회사다. 맥라렌의 본사는 약 5만7천 제곱미터에 달할 만큼 크다. 이름은 맥라렌 테크놀로지 센터. 이 건물은 포뮬러1 경주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성공적인 팀 맥라렌의 기풍을 형상화했다. 전면을 유리로 지은 본관은 건물 옆의 인공 호수와 연결되어 있다. 빗물을 모아 호수를 채우는 배수 시스템을 이용해 지붕을 자동으로 세척한다. 덕분에 실내 온도 역시 일정하다. 맥라렌의 고급 스포츠카를 만드는 생산 센터와도 가깝다. 그곳에서는 가운을 입고 장갑을 낀 기술자들이 조심스럽게 F1 경주용 차량을 조립하고 있었다.
조프 맥그래스는 GSK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맥라렌의 작업 방식을 소개하기 위해, 2008년 모나코 그랑프리의 TV 영상을 보여줬다. 폭우 속에서 열린 경기. 소속 선수였던 루이스 해밀턴은 여섯 바퀴째에서 벽을 들이받고 타이어에 펑크를 냈다. 피트 스톱이 필요한 상황. 모나코 서킷은 어렵기로 악명이 높은 데다 사고까지 겹쳐, 루이스 해밀턴의 경기는 거기서 끝난 듯 보였다. TV 해설가의 목소리는 극적인 상황을 맞아 더욱 요란해졌다.
곧이어 맥그래스는 완전히 똑같은 영상을 틀었다. 이번엔 맥라렌의 내부 음성 통신이 포함된 영상이었다. 당시 팀의 경주 엔지니어는 루이스 해밀턴에게 이렇게 말했다. “루이스, 지금 피트로 들어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발진 스위치를 눌렀는지 확인해. 곧 새로운 타이어를 끼우고 연료를 넣을 거야.” TV 해설과는 대조적인 평온한 목소리. “물 퍼내.” 마지막 피트스톱이니, 피트 요원들이 경주를 마칠 수 있을 정도로 연료를 채웠다. “22번 타이어 세트.” 그리고 미리 정해놓은 젖은 노면용 타이어를 끼웠다. 9초간의 피트 스톱이 끝나고, 루이스 해밀턴은 곧 피트 레인을 벗어났다. 그리고 계속 달렸다.
“경주 시작 전, 우리는 타이어가 생각보다 빠르게 혹은 느리게 마모될 때에 대비해뒀어요.” 맥라렌의 전 경주 엔지니어이자 현재 MAT의 분석학 수석 기술자인 앤디 래덤이 말했다. “예상되는 모든 시나리오를 짜둬요. 여러 번의 경주를 거치면서 그 시나리오는 더욱 세밀해지죠. 물론, 레이스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은 언제나 어려워요.” 루이스 해밀턴이 벽을 들이받는 순간, 맥라렌의 피트 요원 13명은 모두 자신의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맥그래스와 그의 팀은 2011년 11월, GSK의 치약 공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생산 라인에서 병목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환 과정 때문이었다. 전환 과정은 특정 라인에서 생산 중인 제품을 다른 제품으로 바꿀 때의 절차를 말한다. 관을 교체하고 세척한 뒤, 생산 라인의 도구를 다시 배치하는 식이다. 맥그래스는 이 절차가 포뮬러1의 피트 스톱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경주용 자동차의 타이어 4개를 2초 만에 교체할 수 있어요. 치약 공장의 전환 과정이 2시간이나 걸릴 이유가 있을까요?”
맥그래스는 공장 관리자, 현장 근로자들과 함께 논의를 시작했다. 도구는 표준화되었나? 근로자들이 업무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나? 전환 팀은 전문성을 띤 독립적인 집단인가, 혹은 단지 그 시점에 일하고 있는 직원들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맥라렌 팀은 치약 생산 라인과 똑같이 생긴 컴퓨터 모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공정을 시뮬레이션하고 결과를 시각화했다. 이것은 포뮬러1 경주를 준비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했다.
“현장 근로자들에게 뭔가 새롭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보단 단지 맥라렌의 작업복을 입히고, 우리가 준비한 시스템에 어우러지게 만들었죠. 그런 환경이 조성되고 나니, 근로자들이 직접 어떤 부분을 바꿔야 하는지 확인하게 됐어요.” 맥그래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60퍼센트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평균 39분에서 15분. 결국 GSK는 연말까지 2천만 개의 치약을 추가 생산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누리게 됐다. “사람들은 피트 스톱을 차가 멈춰 있는 시간으로 간주하곤 해요. 하지만 맥라렌은 피트 스톱을 경주에서 이길 기회라 생각하죠.”
설립 후 11년이 지난 지금, MAT는 맥라렌 계열사 중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기는 회사다. 2013년, 맥라렌 그룹은 경주 팀의 부진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2억6천8백만 파운드(약 4천9백1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리고 맥그리스는 MAT가 그중 수천만 파운드를 벌어들였다고 밝혔다. MAT는 포뮬러1 원격측정장치를 바탕으로 심장마비 환자와 루 게릭병 환자를 위한 건강 관찰 시스템을 개발했고, 히드로 공항의 비연 지연을 감소시키는 일정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또한 세계 최대의 정유 회사, 제약회사, 데이터 관리 회사, 스포츠 브랜드 등과 협업을 진행했다. 지금의 맥라렌은 포뮬러1 팀을 보유한 거대한 테크놀로지 그룹에 가깝다.
지금 맥라렌 본사엔 두 대의 시뮬레이터가 있다. 장비의 핵심은 포뮬러1 경주 환경을 재현한 장치다. 그 위에 실제 크키의 차대를 올려 시험을 진행한다. 그리고 여러 대의 스크린이 시뮬레이터를 둘러싸고 있다. 시뮬레이터 옆의 거울 뒤는 통제실이다. 5대의 컴퓨터가 실시간으로 집계되는 수백 개의 지표를 분석한다. 휠의 각도, 자동차 바퀴의 회전 속도, 가속 및 엔진의 회전 수 등. 경주 팀과 테스트 드라이버들은 시뮬레이터에서 1년에 약 180일을 보낸다. 실제 경주용 차를 타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 매 경주 전에 모여 테스트를 진행하고 경주 후엔 보고서를 작성한다.
“시뮬레이터엔 경주용 자동차의 모든 요소가 들어 있어요.” 하그로브가 말했다. “물론 실제 자동차와 모형 사이엔 차이가 있겠죠. 하지만 숙련된 드라이버들은 그 차이를 파악해요. 진행 중인 시험에 확신이 없을 때, 드라이버들에게 물어보곤 하죠. 그들이 시뮬레이터가 트랙과 정확히 같은 느낌이라 말할 때, 비로소 우리는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게 되죠.”
일반적으로 한 시즌 동안 맥라렌은 경주용 차량의 기계 부품 중 약 70퍼센트를 교체한다. 예전엔 실제 트랙에서 자동차를 시험하기 전에 부품을 제작했다. 하지만 2007년, 포뮬러1을 관장하는 단체 FIA가 비용 절감을 위해 시즌 중 시험을 금지시켰다. 즉, 시뮬레이터를 갖고 있는 팀이 기술적으로 유리해진 것이다. 맥라렌은 그 시점에 이미 부품을 가상으로 제작 및 시험하는 것은 물론, 시뮬레이터를 통해 개별 부품이 드라이버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분석하고 있었다. 현재 모든 부품은 가상의 형태로 시뮬레이터 테스트를 거친다. “전복 방지 바를 시험하고 싶다고 가정해보죠.” 하그로브가 설명을 이어갔다. “시제품을 도로에서 시험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시뮬레이터를 쓰면 더 효율적이에요. 우리는 이미 부품의 크기, 제원, 다른 부품과의 상호작용 등에 대해 전부 알고 있으니까요.”
경주를 앞둔 몇 주 동안 맥라렌은 경주에 참가하는 모든 차량의 성능을 상세한 컴퓨터 모형으로 만든다. 이 컴퓨터 모형 덕분에 엔지니어들은 실제 경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시나리오를 사전에 그려볼 수 있다. 그리고 수백만 번의 시뮬레이션으로 피트 스톱 시점과 타이어의 종류를 비롯한 모든 변수를 시험한다. 맥라렌은 이 과정을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이라 부른다. 경주 중에도 마찬가지다. 본부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경주용 차량에서 나오는 실시간 정보를 분석한다. “경주용 차량을 사람에 빗댄다면, 정말 지적이라 말할 수 있어요.” 맥그래스는 맥라렌의 경주용 자동차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이 있었다. “제한된 조건 안에서 계속 개선하고, 그 자동차를 타는 드라이버의 특성에 맞게 조절하죠. 차 안엔 원격측정장치가 있고요. 거기서 나온 정보는 지금 차량의 상태를 정확히 알려줘요.” 그 정보야말로 맥그래스에겐 경주용 차량보다 귀중한 것이다.
“MAT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세 명이 전부였죠. 과연 이 사업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계속 같이 고민했어요.” 논의 주제는 간단했다. 맥라렌이 포뮬러1 경주용 차량을 만들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와 함께, 맥그래스에겐 뚜렷한 계획이 있었다. 하그로브의 시뮬레이터와 컴퓨터 모형, 경주용 차량의 원격측정장치를 연결시키는 것. 그리고 맥라렌은 MAT가 연구한 이 효율적인 시스템을 다른 회사에 제안했다. 덕분에 맥라렌과 협업 중인 회사들은 실시간 정보와 함께 움직이고, 단시간에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게 됐다.
스콧 드로워는 GSK 프로젝트 당시 영국 체육회의 연구 및 혁신 부문 대표였다. 그는 맥라렌에 2012년 런던 올림픽 준비를 같이할 수 있는지 물었다. 드로워는 포퓰러1의 팬이었고, 원격측정장치 같은 기술을 다른 엘리트 스포츠에 접목시키기를 원했다. 곧 맥라렌과 영국 체육회는 사이클, 요트, 조정, 카누 등의 훈련에 관한 협업을 시작했다.
“사이클이 특히 성공적이었어요. 모든 올림픽 종목 중 포뮬러1과 가장 비슷하거든요. 사람이 엔진을 대신한다는 점만 다르죠.” 하그로브는 런던 올림픽에서 대표팀이 거둔 성과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당시 맥라렌은 선수의 안장 밑에 부착하는 작은 장치, 데이터라이더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자전거의 각도와 토크를 비롯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데이터라이더엔 속도계, 자이로스코프, 블루투스 전송기가 달려 있다. 기존 사이클팀의 센서는 약 20헤르츠의 주파수로 정보를 전송하지만, 데이터라이더는 무려 200헤르츠의 주파수를 사용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측정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 전부 직접 시험해봤죠. 그러다 크리스 호이(사이클 선수)가 보낸 정보를 보고, 놀라서 전화를 걸었어요. 수치가 너무 높아서 제가 측정을 잘못한 게 분명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오류가 아니라 정말로 호이의 성적이 향상된 거였어요.”
또한 2010년까지 맥라렌은 자전거 설계를 위한 파트너를 물색했다. 그리고 세계 3위 브랜드인 스페셜라이즈드 바이시클 컴포넌츠와 계약을 맺었다. “스페셜라이즈드도 다른 자전거 제조사처럼 일단 무턱대고 디자인부터 했어요. 그 다음이 테스트 드라이버의 시승. 그건 50년 전에 우리가 포뮬러1 경주용 차량을 설계할 때의 방식이에요.” MAT의 고성능 설계 부문 대표 던컨 브래들리가 웃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스페셜라이즈드는 맥라렌에 좀 더 가벼운 자전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가벼우면 더 빠를 거라는 가정에 따른 요청이었다. 하지만 맥라렌은 이 가정 자체에 의문을 가졌다. “자전거는 자기 혼자 굴러가는 게 아니라 사람이 페달을 밟죠. 즉, 장비의 성능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중요했어요.”
맥라렌은 자전거와 사람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 힘과 진동을 측정하기 위해 20개 이상의 센서를 차대에 붙였다. 하그로브의 드라이빙 시뮬레이터에 달린 차대 고정장치 또한 자전거에 맞게 조절했다. 그리고 차대, 타이어, 사람을 각각 시험한 뒤 최종적으로 전체 자전거 운행에 관련된 공식을 개발했다. “우리가 원하는 지표를 모두 얻어냈어요. 그렇게 우리는 기존의 자전거 설계 방식을 완전히 뒤집었죠.” 브래들리가 당당히 말했다. 2011년 발표한 S-워크스+맥라렌 벤지를 설계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 스페셜라이즈드의 기존 제품인 S-워크스보다 20퍼센트 가벼웠지만, 견고함은 그대로였다. 같은 해, 마크 카벤디시는 벤지를 타고 UCI 로드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다. 영국 선수로는 1965년 이후 최초였다. “그때 스페셜라이즈드 측에서 지난 10년보다 이번 6개월간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어요. 비용도 줄었고요.” 맥그래스 또한 당시의 성과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1년, MAT는 GSK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의료 보건 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2년 뒤, 맥라렌은 영국과 미국의 뇌졸중 환자 1백 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에 관찰 센서를 공급했다. 럭비 선수의 몸에 부착해 훈련 정보를 분석하던 장비를 응용한 것이다. “대부분의 부착형 기기들은 얼마나 많이 걷고 뛰었느냐를 집계할 뿐, 얼마나 오래 앉거나 누워 있었는지엔 관심이 없죠. 임상실험엔 그런 정보가 필요해요.” 맥그래스가 말했다. 이전까지 뇌졸중 환자의 상태를 측정하는 방식은 대부분 환자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쪽이었다. “환자한테 10미터쯤 걸어보라고 한 뒤, 걸음 수와 소요시간을 체크하는 식이었죠.” GSK의 프로젝트 수립 및 관리 부사장인 줄리언 젠킨스가 거들었다. “뇌졸중 환자는커녕 나도 내가 평소 10미터를 걷는 데 몇 초가 걸리는지 몰라요. 그 방법은 틀렸어요.” 맥라렌은 환자의 목에 동전 크기의 센서를 붙였다. 이 장치는 걸음의 리듬과 주기 등 약 20개의 지표를 측정했다. “첫 번째 환자의 정보를 봤을 때 많이 놀랐어요.” 젠킨스가 말했다. “단 몇 초 사이에 그 환자가 매우 아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거든요.”
현재 GSK와 맥라렌은 루게릭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더불어 2015년 3월, 맥라렌은 환자 치료 개선과 외과용 시뮬레이터 제작을 위해 옥스퍼드 대학과 또 따른 협약을 체결했다. “인간은 모형화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엔진의 성능과 상태를 측정할 수 있다면, 사람의 건강과 상태를 파악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맥그래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포뮬러1 대회의 경주 출발선에 선 맥라렌의 드라이버들처럼.
- 에디터
- Joao Medeiros(글)
- 포토그래퍼
- Greg White
- 일러스트
- Tomi 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