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에르 세라노는 뜨거운 태양을 닮았다.
언젠가 만난 포르투갈 여자는 이십 대의 스페인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말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깊은 눈매, 짙은 눈썹과 반짝이는 흑갈색 곱슬머리는 그렇다 쳐도 주체할 수 없는 혈기와 대책 없는 낙관에는 기꺼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며, 아련함이 묻어나는 회상조의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뱉었다. 그때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해서 흘려 넘겼는데, 몇 달 전 돌체 & 가바나의 광고를 보다 그날의 기억이 돌연 떠올랐다. 과연 그랬다. 카메라가 수많은 모델을 훑고 지나가도 유독 눈에 띄는 단 한 명의 모델이 있었으니까. 그 영상 속에서 스물 두 살의 스페인 출신 모델, 자비에르 세라노의 존재감은 아픈 듯이 빛났다. 그는 한국 땅을 밟자마자 곧장 스튜디오로 왔다. 16시간의 긴 비행을 막 끝낸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옅게 깔려 있었지만, 한편에는 어떤 종류의 어둠으로도 덮이지 않을 광활한 에너지도 꿈틀대고 있었다. 자비에르 세라노는 카탈루냐 평야에서 뜨거운 햇살과 비옥한 토양을 양분 삼아 자라는 해바라기 같았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서는 붉은 흙 냄새가 나는 듯했고, 탄력적으로 움직이는 근육에서는 생생한 생명력이 쏟아져 나왔다. 아프리칸의 야성이나 코캐시언의 섬세함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얼굴 한쪽에 남아 있는 소년의 흔적은 그 매력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서 리처드 아베돈이 찍은 1990년대의 베르사체 광고처럼 농염하고 강렬한 포즈를 취했다.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수컷처럼 당당하게. 핀업 보이 같은 야릇한 표정을 짓고 바지 춤을 내려도, 허리를 꺾으며 골반을 이리저리 틀어도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야하다는 형용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다를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바르셀로나 출신이죠? 아직도 거기 살아요? 네,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좋은 곳이에요. 날씨도 좋고 사람들도 친절하죠. 하지만 다음 달에는 뉴욕으로 옮기려고 해요. 일할 기회는 거기가 훨씬 더 많거든요.
모델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저를 불러 세웠어요. 그러곤 저보고 모델이냐고, 아니라면 모델을 한번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죠. 그 남자가 바로 사이트 모델 에이전시의 디렉터 에두아르도 사야스였어요. 전형적인 길거리 캐스팅이죠. 그게 일 년 반쯤 전이에요.
그전부터 모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나요? 딱히 그렇진 않았어요. 주변 친구들이 해보라고 권한 적은 있지만요. 아베크롬비 앤 피치 매장에서 일할 때 사귄 모델 친구가 몇 명 있거든요. 그래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었죠. 모델이 되기에는 제가 너무 수줍다고 생각했거든요.
에두아르도가 당신을 엄청 잘 설득했나 봐요. 뭐라고 하던가요? 모델을 하면 좋을 얼굴과 몸이라고, 열심히 하면 꼭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사실 그 말을 들었을 때까지도 별 생각 없었는데, 명함을 받고 집에 와서 찾아보니 그곳이 스페인에서 가장 큰 모델 에이전시더라고요. 그래서 ‘까짓 거 한 번 해보지 뭐’ 하고 마음먹게 된 거죠.
이 일을 하기 전엔 어땠어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아직 졸업도 안 했어요.
경제학이라니 의외네요. 그러면 어렸을 적 꿈은 뭐였나요? 배우요. 혹시 <마스크 오브 조로>라는 영화 본 적 있어요? 그 영화를 엄청 좋아했어요. 거기에서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진짜 멋있게 나오거든요. 그를 보고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첫 쇼는 돌체 & 가바나의 2015 S/S 컬렉션이었죠? 어땠어 요? 밀라노 쇼 중에서도 돌체 & 가바나는 좀 특별하잖아요. 규모도 크고, 사람도 많고, 뭐랄까, 옷들이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인데. 정말 짜릿했어요. 가슴이 왠지 뭉클하기도 하고, 벅차오르기도 하고, 아무튼 그랬어요. 처음으로 서는 쇼이기도 했지만, 그때의 테마가 스페인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 기억은 평생 못 잊을 거예요. 그런데 신기한게 뭐였냐면, 그 누구도 저에게 어떻게 걸어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전 제대로 워킹을 배운 적이 없었거든요. 전날 리허설에서 제가 들은 말은 “네가 스페인 사람임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당당하게 걸으면 돼”가 다였어요.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쇼도 마찬가지였죠.
지금 원래부터 잘했다고 잘난 척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녜요. 단지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에 제가 잘 맞았던 거겠죠. 구찌나 프라다였다면 애초에 저를 런웨이에 세우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들이 추구하는 이미지는 아주 다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왜 당신을 <지큐 스타일>의 커버 모델로 선택했을 거라 생각해요? 사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저도 좀 어리둥절했어요. 제가 <지큐 스타일> 커버를 찍을 만큼 한국에서 인기가 많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촬영을 하면서 콘셉트를 보고 알았어요. 이런 거 제가 좀 잘해요. 그리고 1970년대 스타일로 생겼다는 얘기도 좀 들었고요.
사실 인터뷰 오기 전에 인스타그램을 살짝 봤어요. 팔로워가 정말 많더라고요. 유명해지니까 기분이 어때요?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나요? 일 년 전쯤 갑자기 팔로워가 늘었어요. 왜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자주 포스팅을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사진을 올리는 것도 아니거든요. 아마 대부분 모델이나 포토그래퍼들의 계정을 타고 들어오는 것 같아요. 어쨌든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에요. 가끔씩 사람들이 알아보고 같이 사진을 찍자 하기도 해요.
기억에 남는 팬이 있어요? 네. 한 명은 이탈리아에 사는 여자분인데 밀라노에 갈 때마다 공항에서 저를 기다려요. 패션 위크 때는 쇼장 앞에 서 있기도 하고요. 그러곤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죠. 또 한 명은 남자 팬인데 종종 <스타워즈>에 대한 각종 자료나 희귀한 정보 같은 걸 보내와요. 제가 그걸 좋아하는 걸 알고서요. 사실 제가 <스타워즈> 광팬이거든요. 가끔씩 시 구절을 보내주기도 해요. 좀 특이하죠?
그렇네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돼요. 당신의 삶은 멋있어 보이니까. 여행도 많이 다니고 좋은 옷도 많이 입죠. 왠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얘기 같잖아요. 패션 모델이라고 하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해요. 다들 저더러 행운아라고 말하죠.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에요. 잘되지 않은 모델도 많으니까 저는 운이 좋은 편이죠. 하지만 보이는 것처럼 화려하기만 한 직업은 아니에요. 사람들은 일의 이면을 생각하지 않죠. 결국엔 이것도 일이에요. 일을 하려면 항상 뭔가를 포기해야 하니까요.
여자친구는 있어요? 음, 정확히 말하면 여자친구는 아닌데….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뭔가 있기는 하다는 거네요. 종종 만나는 여자는 있어요. 바르셀로나 근교에 있는, 시체스라는 도시에 살아요.
혹시 바람둥이 스타일이에요? 뭐, 조금은요. 아직 젊으니까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바르셀로나에 오래 머무를 수 없고, 그러다 보니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적어요. 그녀도 어느 정도 제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 거예요.
올해 휴가는 다녀왔어요? 얼마 전에 시체스에 잠깐 다녀왔어요. 모델 일을 하다 보면 휴가라는 개념이 좀 애매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예전의 한 인터뷰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도시로 말라가를 꼽았죠? 네, 해변이 아름다운 도시예요. 바르셀로나도 좋은 곳이지만 말라가는 좀 더 작아서 안정감이 느껴져요. 물론 뉴욕이나 밀라노, 런던같이 큰 도시도 좋죠. 하지만 거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안 들어요.
아시아를 여행한 적도 있나요? 터키도 아시아로 봐야 하나요? 아니라면 아시아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내일은 뭘 할 거예요? 한국에 간다니까 엄마가 서울에 대한 자료를 좀 보내줬어요. 절이 있다고 한번 가보라고 하던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어요. 서울에도 절 있는 거 맞죠? 아 참, 독특한 한국 음식도 먹고 싶어요. 매운 건 잘 못 먹지만요. 아니면 뭐 다른 신나는 거 있어요?
촬영은 밤 12시가 다 돼서야 끝났다. 그는 내일 밤에 바르셀로나로 돌아간다며 하루의 시간이 있다고 고백하듯 말했다. 서울에선 무엇을 해야 하냐는 질문에 몇 가지를 추천했는데 어쩐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듯한 눈치였다. 사실 별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주말을 하얗게 연소시킨 이들이 사형수처럼 아침을 기다리는 일요일 밤에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금방 이 고민이 부질 없음을 깨달았다. 피가 들끓는 자비에르 세라노에게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그가 비행기를 탈 즈음에는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지난 하루 동안 뭘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비밀로 남겨두고 싶어서. 며칠 뒤 들어간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명동의 거리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서울에서의 하루를 추측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사진이었다.
- 에디터
- 박나나, 윤웅희
- 포토그래퍼
- 홍장현
- 모델
- 자비에르 세라노 (YC Models)
- 그루밍
- 이소연
- 캐스팅
- 민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