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문을 연 바 중 다섯 군데를 추렸다. 서울의 바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다섯 가지 맛의 공간이다.
10월 18일, 7회에 걸친 ‘크래프트 칵테일 클래스’가 국내 바텐더들의 박수를 받으며 막을 내렸다. 크래프트 칵테일은 칵테일의 기원과 근간을 탐구하고 질 좋은 재료로 한잔을 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포괄한다. 작년엔 ‘칵테일의 업그레이드’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들리던 이 말이 올해, 팔다리가 돋아나듯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진원지는 2007년의 미국이다. 1860년대 이전 고서를 통해 칵테일의 원론을 파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미국 칵테일 르네상스를 이끈 데일 디그로프는 <Imbibe!>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The Idea of old-as-new-again became the cutting edge.” 옛것이 곧 새로운 것이고, 트렌드가 된다는 공표 같은 말이다. ‘크래프트 칵테일 클래스’의 강연자였던 이한별 바텐더는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한국 바는 비슷비슷해’라는 말을 들어온 게 사실입니다. 지식과 정보가 기반이 돼야 각자의 캐릭터로 승부할 수 있습니다.” 올해 바 업계는 뭉쳤다. 공유했다. 공부했다. 쌓았다. 그리고 이제 제각각 터뜨릴 일이 남았다.
앨리스 동굴 속의 작당모의 “지금 우리나라의 바는 호황과 거품 사이에 있는지도 몰라요. 내실을 다지지 않으면 힘들어질지도 모르고요. 한국 바의 개성은 무엇일까? 더 공부할 건 없을까? 요즘 이런 고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올해 문을 연 청담동 앨리스의 김용주 오너바텐더의 말이다. 앨리스는 그래서 올 한 해 부지런히 기고 뛰고 날았다. 기회가 닿는 대로 정보를 흡수하려고 게스트 바텐더를 계속 초대하고, 크래프트 칵테일 클래스에 장소를 제공했다. 지난 7월, 기상천외한 가니시로 유명한 런던의 바 ‘나이트자’의 두 바텐더가 앨리스에서 게스트 바텐딩을 했을 때, 김용주 대표는 아예 바로 옆에 호텔방을 하나 더 잡았다. “그들의 모든 걸 흡수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관찰하면서 스스로 반성도 많이 했죠.” 김용주 바텐더와 앨리스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 바람을 만들고 모래를 날리며 바 문화를 쌓아가고 있다. 그리고 곧 크래프트 칵테일 서적을 뒤져서 발견한 ‘크래프트 칵테일’ 8가지를 새로 선보인다. 186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시대를 나눠서 선보인다. 10분 넘게 셰이킹을 하는 라모스 진피즈도 그대로 재현한다. 문득 도움닫기를 착실하게 하고 있는 이곳의 내일이 궁금하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들어간 동굴 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더 재미있었던 것처럼….
BAR + TREND
출격 준비 완료 미국에서 시작된 크래프트 칵테일 운동의 영향으로 버번 위스키가 돛을 높이 올렸다. 금주법 이전 시대의 칵테일이 복원될수록, 당시 베이스로 많이 쓰인 버번과 라이 위스키에 대한 수요도 커져만 갔다. 당시 칵테일은 버번, 브랜디, 진, 럼 위주였고, 보드카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자연스레 미국의 소규모 공장에서 자신만의 개성으로 버번 위스키를 만드는 곳이 많아졌다. 국내에도 내년 초, 사진 속보다 훨씬 다양한 버번 위스키가 수입될 예정이다. 올 한 해 프리미엄 진이 우르르 수입돼 바를 풍성하게 했다면 버번 위스키가 바통을 이어 받을 예정이다.
찰스의 크리스, 크리스의 찰스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의 개장과 동시에 바 업계의 관심은 지하에 있는 ‘찰스 H’ 바를 향해 내리꽂혔다. 아브로코AvroKO의 세공으로 완성된 인테리어, 걸출한 헤드 바텐더, 기존 서울의 바와는 다른 공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몇 번의 방문 결과, ‘찰스 H’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는 단연 크리스 라우더 헤드 바텐더다. 그는 포시즌스 호텔의 6개 업장에서 판매하는 86가지 오리지널 칵테일을 모두 개발했다. 바텐더의 활기가 바의 혈액을 얼마나 빨리 돌게 하는지 직접 만나 확인했다.
바텐더에게 이 바는 좀 크지 않나? 내가 일했던 노마드 호텔의 바는 이보다 크고 손님도 많았다. 총 7명의 바텐더가 동일한 칵테일과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합을 맞추면 가능하다.
그래선지 바를 빠르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스케이트보드를 탄 것처럼 무척 편해 보였다. 하하.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빠르게 칵테일을 만들고, 친밀하게 손님을 대하고, 충분히 공들이면서도 손님에게 어렵지 않은 맛의 칵테일을 내는 게 나의 바텐딩 스타일이다.
손님들이 당신의 경력을 무척 궁금해한다. 열다섯 살 때부터 레스토랑 가장 밑바닥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동아시아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3년 반을 살았고, 졸업 후 통역가로도 잠시 일했지만 다시 외식업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뉴욕에 있는 ‘아모르 이 아마르고’에서 다시 밑바닥부터 바텐딩을 배웠고, 모모후쿠의 부커앤댁스로 옮겨 분자 요리처럼 정교한 칵테일과 각종 시럽 제조를 배웠다. 이후 노마드 호텔로 옮겼다. 거기서 상도 좀 많이 받았다.
그런데 왜 떠났나? 동아시아가 궁금했고, 내가 짠 바 프로그램으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었다.
찰스 H. 베이커의 여행을 모티브로 삼은 바 프로그램 말인가? 미국 금주법 시대에는 사람들이 몰래 숨어서 술을 만들었다. 이 시대에 번성한 스피크이지 바에 많이 집중하지만, 난 금주법을 피해 해외로 나간 다른 훌륭한 바텐더들의 칵테일이 궁금했다. 찰스 H. 베이커는 당시의 기자인데, 쿠바, 상하이, 카이로를 여행하며 독특한 술을 기록했다. 그 기록을 뒤져 레시피를 얻었고 메뉴에 실었다.
시대별로 각기 다른 스타일의 맨하탄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맨하탄 테이스팅 플라이트’도 눈에 띄었다. 다른 곳엔 잘 없는 메뉴다. 뉴욕에서 일할 때 손님이 서로 다른 걸 시킨 뒤 나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떠올렸다. 누구나 여러 가지를 맛보고 싶어 하지 않나? 다른 칵테일로도 메뉴를 짜볼까 한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들은 칭찬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나? 80세 할머니가 온 적이 있다. 바텐더인 증손주의 추천으로 딸과 함께 난생 처음 칵테일을 마시러 온 것이다. 니커버커 펀치를 만들었는데, 팔십 평생을 통틀어 가장 맛있다고 칭찬했다.
한국어도 배우나? 물론! “진짜 배고파 죽겠어, 치맥, 막걸리 두 병 주세요.” 늘 한 병으론 모자라서….
BAR + BOOK
책바는 둥글다 별별 바가 다 생길수록 바 업계의 기초 체력은 더 좋아진다. 바가 더 깊숙하게 일상으로 들어왔다는 의미고, 그만큼 더 길게 갈 수 있다는 반증이니까. 지난 9월, 연희동에 문을 연 ‘책바’는 스피크이지나 오센틱 바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완전히 다른 공기로 다가오는 공간이다. 기존 바가 바텐더와 손님 사이의 교류가 중요했다면 이곳에선 손님의 ‘고독’을 보장해준다. “북카페는 있는데 북바는 없잖아요. 늘 책 읽으면서 술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했어요.” 정인성 대표는 ‘책’이라는 소재로 바 곳곳을 버무렸다. 목차 형태로 메뉴판을 만들고, 소설이나 에세이 속에 등장하는 칵테일로 메뉴를 꾸렸다. 술과 창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앞으론 손님들의 글쓰기나 드로잉을 더 독려할 생각이다. 싱글 몰트위스키는 20~30종 정도 구비했고, 칵테일은 정 대표가 직접 만든다.
승리의 맛 ‘블라인드 피그’의 임병진 바텐더는 올해 사람들의 어깨를 딛고 올라 하늘 위로 주먹을 힘껏 들어올렸다. ‘2015 월드 클래스 한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 지난 두 번의 도전이 준우승에 머물렀다는 걸 생각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속 시원한 한 방이었다. 지난 8월에 문을 연 ‘스피크이지 몰타르’의 두 번째 바 ‘블라인드 피그’에서도 임병진은 여전히 손님들의 믿음을 딛고 그곳을 지키고 있다.
‘몰타르’는 취재에 응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혹시 아쉬웠나? 오히려 그 안에서 조용히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손님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꾸준히 ‘월드 클래스’ 대회에 출전했는데, 일종의 바깥나들이 같은 것이었을까? 더 절실해서 출전했다기보다는, 정말 신나서 나갔다. 1월부터 6월까지 이어지는 대회인데, 올해는 우승 후 월드 클래스 세계 대회까지 총 9개월을 쏟아부었다.
2011년부터 꾸준히 출전한 시간까지 모두 합하면…. 만 3년을 투자했다. 2011년 첫해 ‘TOP 10’에 들었고 2013년과 2014년에는 운 좋게 2등을 했다. 처음엔 얼떨결에 2등을 했다. ‘설마 내가 또 파이널에 진출하겠어?’ 라는 마음으로 2014년 대회를 끝까지 준비하지 못한 게 아쉽다.
등수가 전부는 아니지만, 두번이나 2등을 한 건 어쩐지 좀 억울했을 것 같다. 사실 내가 독기를 품는 성격이 아니라서 괜찮다. 그냥 이 대회에 출전하면서 바텐더들의 겨루기가 얼마나 재미있고 훌륭한지 알려주고 싶었다. 수준 높은 참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이 대회에서 내가 얻은 것들에 대해 보답하는 길 같았다. 내 이미지가 노력파, 절치부심, 이렇게 비춰지게 된 것 같은데 사실 난 좀 게으른 재능을 가졌다고 보는 쪽이다. 좀 느긋한 편이다. .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월드 클래스 세계 대회는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었을 텐데? 내로라하는 심사위원들을 손님으로 맞이해보는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 ‘레트로, 디스코, 퓨처’라는 챌린지에서 유명 바텐더 개리 리건을 상대로 그의 저서 <더 바텐더스 바이블>에 등장한 칵테일에 해석을 더해 새롭게 만들었는데 그 조에서 1등했다. 기분이 좋았다. 이러다 나 인생 바뀌는 거 아니야? (웃음) 근데 이어지는 챌린지에서 롤러코스터를 좀 탔다.
‘실바크’처럼 요즘은 완전히 새로운 창작 칵테일보다는 복원하는 칵테일에 힘이 실린다. 좋은 방향이다. 역사와 문화를 배경에 두지 않고 창작만 할 땐 맛과 비주얼, 그 외엔 더 이야기할 게 없었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칵테일을 만들면 해당 칵테일의 베이스 술과 재료들이 당위성을 갖는다. 오리지널을 공부하면서 약간의 트위스트를 더해 새롭게 창작하는 것이다. 다만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과적으로 바마다 서로 비슷한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렛’을 나만의 해석으로 조금 다르게 내놓으면, 손님들이 ‘김렛’의 다양성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바의 바텐더들도 손님의 눈치를 보다 서로 비슷해지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 바텐더로서 이 부분을 손님들에게 이해시키고 싶다. 그것도 바텐더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바텐더의 말을 더 세심하게 들어야겠다. 근데 이렇게 목소리가 나긋하고 작은데 바에선 괜찮나? 일할 땐 톤이 더 높아지고 말을 짧게 한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잘하더라”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고, 내가 손님에게 “이 칵테일 마셔봐. 쩔어!” 이런 식으로 말할 때도 있다.(웃음)
BAR + THAI FOOD
빈틈없는 오파스 올해 문을 연 바 중에서 가장 군침이 흐르는 바. 위스키를 사랑해 마지않는 태국 음식점의 대표가 만든 바다. 주방에선 태국인 셰프가 태국에서 유행하는 음식을 연구해 안주를 만들고, 바에선 바텐더가 태국 요리에 밀리지 않는 강렬한 향의 칵테일을 만든다. 술과 태국 음식, 두 가지 모두를 모서리 하나 찌그러뜨리지 않고 한 바구니에 담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중이다. “향신료를 많이 쓰는 음식에는 산뜻한 칵테일이 어울리죠. 쌈셀러리를 넣고 셰이킹한 ‘오파스가든’처럼요.” 조선미 바텐더가 말했다. “견과류만 내는 바와는 다르게 음식이 풍성하니까 강한 칵테일을 추천할 수 있어 바텐더로서는 더 좋죠.” 홍석균 바텐더도 보탠다. 오파스를 방문할 땐 필히 배를 비우고, 술에 대한 갈증은 최고치로 끌어 올리고 가야 한다.
- 에디터
- 손기은
- 포토그래퍼
- 이현석, 정우영
- 도움말
- 이한별 바텐더(연남동 ‘올드패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