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뜨거운 물을 끼얹는다. 김처럼 진한 흥분이 솟아오른다.
집에 들어가면 보일러를 켠다. 까치발로 욕실에 들어가 물을 받고 밖으로 나와 옷을 벗는다. 다시 욕실로 돌아가면 물은 적당한 온도로 데워져 있다. 둘이 들어가도 남는 넉넉한 크기의 욕조까진 아니더라도, 커튼이든 유리문이든 (이를테면 화장실과 구분되는) 확실한 구획이 나뉘어 있는 독립된 공간. 거기서 매일 적으면 한 번, 많으면 두 번 몸을 씻는다.
욕실이 깨끗해야 하는 건 꼭 나만의 청결을 위한 일은 아니다. 그곳은 또 다른 은밀한 침대이자, 모두의 흔적이 남는 곳이기도 하니까. 나에겐 결코 없는 길고 밝은 색 머리카락, (여자가) 세면대 옆에 풀어뒀다 까먹은 머리끈, 아침까지도 축축하게 젖어 있는 샤워 볼, (내가) 미리 숨기려다 실패한 몇 개의 칫솔, 방문객이 왔을 때만 꺼내주는 크고 깨끗한 수건. 혼자 씻는 일이라면 여름이 훨씬 빈번하지만, 그곳에 둘이 같이 들어가는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겨울이 잦다. 더운 날 찬물에 첨벙 뛰어드는 쾌감이 계절 별미 같다면, 영하의 날씨에 뜨거운 물을 오랫동안 양껏 끼얹는 호사는 매일같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무엇보다 욕실 안에서 우리는 부드럽다. 겨울은 더군다나 내 몸 하나 간수하기에도 거칠거칠한 계절. 외출 후엔 제아무리 둘이 꼭 붙어 다녔다 해도 서로의 몸에 한기가 남아 있다. 피부도 근육도 뻣뻣한 터에 자칫 거칠게 돌진했다간 어디 한 곳 베거나 삐끗할 것만 같다. 침대에서 사이좋게 오일을 끼얹는 방법도 있겠으나, 시트 세탁 걱정이 앞선다. 초콜릿은 기념일에 좀 더 어울린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가뭄에 빗물 같은 온수가 콸콸 쏟아질 때의, 그 물길을 따라서 탄탄히 연결된 관절까지 느슨하게 이완되는 기분.
비 오는 날 젖은 머리나 흰 셔츠 정도가 아닌, 온 몸이 젖은 채로 음탕한 일을 벌인다. 물뿐이라도 할 일이 많은 한편, 거기에 뭘 더하고 듬뿍 바르고 덧칠해도 싹싹 씻어내면 그만이니 실험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그러다 물을 가득 채우고 풍덩 욕조로 뛰어들기도 한다. 아마도 1인용으로 만들어 좁은 만큼 둘의 몸은 부쩍 가깝다. 말끔히 깨끗해진 서로의 온몸이니, 그중 (입이든 손이든) 어느 곳으로 향할 때도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집 문을 따고 들어가자마자 몰아치는 섹스도 급속 가동시킨 보일러 못지않은 폭발력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제나 잘 씻고 침대로 뛰어드는 섹스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찰나도 망설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 상대가 씻는 동안 이미 펄펄 끓은 내 몸이 식고야 마는 문제만큼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 같았지만….
또한 욕실은 거슬리는 소리조차 없는 밀폐된 공간.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욕조 속 물결이 움직이는 소리, 그 물결을 쓸면서 내게 다가오는 소리,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 그러다 살결이 가볍게 맞닿는 소리. 동굴처럼 사방으로 울려 퍼진 뒤 다시 매끈한 타일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그 몽롱한 소리. 몸은 더욱 포개지고 겹치고 뒤집어지는 가운데, 후끈해진 공기에 땀과 물이 골고루 맺힌 얼굴이 비로소 꽤 벌겋게 달아오르고야 마는 순간. 반대편엔 그런 상기된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거울이 있다. 김 서린 유리에 사랑의 글씨를 쓰는 낭만보다는 침대 위 후배위에선 잊어야 했던 서로의 얼굴, 여성상위 중 꼿꼿한 척추의 움직임을 똑똑히 볼 수 있다는 흥분이 불쑥 생긴다.
섹스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새로운 섹스에 대한 준비가 끝나는 점 역시 욕실에서만 가능한 일 아닐까? 하고 싶은 게 더 남았지만 일단 엉거주춤 주섬주섬 티슈든 뭐든 챙기러 가는 ‘일시정지’ 대신, 여러 발 동시 장전시켜놓고 쉴 틈 없이 격발하듯. 그리고 그 젖은 몸 그대로 침대로 향하면 또 어떤가. 건조한 방, 젖은 시트는 금세 바싹 마를 테고 젖은 몸은 오래 기억에 남을 테니. 물론 추운 겨울밤은 그 계절만큼 길고, 두 번을 씻어도(그리고 또 다른 일을 그곳에서 벌여도) 모자람이 없다.
누군가 다녀간 다음 날은 다시 혼자가 되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고 오래도록 기다리지만, 이것은 어쩌면 물 한번 간단히 끼얹으면 맥없이 모두 씻겨 내려가고 마는 일. 욕실에 남은 축축한 밤을 거센 물줄기로 지우며, 새해의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 에디터
- 유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