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선 데이비드 보위의 블록버스터급 회고전이 열렸다. < David Bowie is > 전이 증명하는 것은 보위의 서사적 위상이 아니라, 지난 50년간 동시대를 넘어유행을 창조해 온 인물, 바로 그것이다.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서 처음 간사이 야마모토의 줄무늬 비닐 보디 수트와 맞닦뜨렸을 때, 데이비드 보위의 연극적 특성이 어떤 식으로 호쾌하게 드러나는지 후려치듯 알게 되었다. 보위는 허리 아래부터 옆으로 항아리처럼 뻗은 그 옷을 1973년 알라딘 세인 투어에서 입었다. 뉴 시어터 옥스퍼드 무대로 향하는 그의 걸음, 갈채와 융합하는 그의 포즈는 필시 그의 역할이 음악에 제한되지 않음을 재확인시켰을 것이다.
그의 옷을 입은 얼굴 없는 마네킹들은 무리를 이루어 전시를 둘러싸고 있다. 마네킹에서 뭔가 생기 없는 공기가 흐를 때, 나는 1972년, 지기 스타더스트 투어 중 무대 의상을 14번이나 갈아입은 그를 다시 떠올린다.
보위의 기이한 300여 개 오브젝트들을 선별한 <David Bowie is> 전은 60벌의 옷, 악기, 앨범 디자인, 일기, 자필 가사, 포스터, 사진, 뮤직비디오, 영화 클립, 세트 디자인을 통해 모든 예술적 결과물마다 아이디어를 이식했던 보위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나는 이제 데이브의 이름을 데이비드 보위로 바꾸었다”고 적은 1967년의 편지부터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로부터 받은 은밀한 엽서, 브라이언 더피가 알라딘 세인 앨범 커버를 촬영했을 때 쓴 밀착 인화지까지, 지치지 않는 ‘사료’의 향연은 초현대적인 꿈으로 바뀐 기록할 만한 과거를 나열한다. 정말이지 보위가 그 무엇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아연실색했다. 담뱃갑 뒤에 남긴 쪽지 하나 버리지 않았다니, 자기가 건드리는 것마다 이슈가 되리라는 예지력 때문이었나? 아니면 고지식할 정도로 말끔해서? 그가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 건 세월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의 음악과 과격한 개인성이 현대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도 면밀하게 드러난다. 거기엔 예술사와 문화사를 대표하는 인물들, 와일드, 디트리히, 앤디 워홀, 에디 세즈윅, 프리츠 랑을 비롯, 모두의 머리에 떠오르는 이들의 면면이 곁들여진다. 그러므로 이 전시는 관습에 도전하고 자유를 취한 록 아이콘이 패션 역사에 어떤 자취를 남겼는지의 경위를 다룬 극히 개인적인 명상록이다.
런던 V&A 앞의 행렬은 다시 가동된 보위의 마니아 층을 웅변한다. 보위의 작업은 순서와 상관없이 배치돼 서로 다른 시간 프레임이 뒤섞인 연속체를 경험하고야 만다. 뷰레티의 푸르스름한 수트는 1971년 ‘Life on Mars’ 비디오 옆에 전시돼 있다. 나타샤 코르닐로프가 디자인한 피에로는 1980년 ‘Ashes to Ashes’ 비디오에 나왔다. 우주시대의 점프수트건, 연미복에 곁들인 연필 같은 투피스건, 전시장은 뷰레티, 코르닐로프, 야마모토의 디자인으로 채운 옷장을 방불한다.
이제 66세가 된 보위의 인터뷰를 최근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알라딘 세인의 메이크업이든, ‘다이아몬드 도그’에서처럼 반은 사람 반은 개의 모습이건, 보위의 유산은 쉼없이 재가공된다. 그는 세대가 요약된 얼굴로 여전히 변형 가능한 현재 를 헤엄치며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누구라도 될 수 있어.” 그에게서 인공적인 것을 배제하기란 불가능하다. 보위 스스로 지기나 알라딘 세인, 신 화이트 듀크 같은 가공인물이니까. 그 자신조차 데이비드 보위에 있어 인공적이니까.
70년대, 보위가 대중문화의 경계를 휘저을 때 폭풍 같은 당시의 반대만큼, 지금 그의 메시지가 얼마나 양극화를 초래했는지에 대한 칭찬이 난무한다. 여행의 핵심은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느냐는 것. 사람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은 단순한 주관. 그게 모든 연막, 교묘한 속임수, 의도적인 막다른 골목이라 해도 그가 스스로에게 무엇이 남았는지 돌아보는 한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 올해 10년 만에 발표한 앨범 <The Next Day>는 수년간 따라다닌 건강 관련 소문을 한 방에 날리는 방법이기도 했다.
새 아이디어를 찾는 에너지. 역설과 자기모순에 탐닉하는 기질. 지금도 평가받는 퍼포먼스. 쓸쓸한 십 대들의 영혼을 이끄는 매력…. 보위가 지구에 떨어진 순간, 그리고 거의 하룻밤만에 팝 문화는 싸그리 바뀌었다. 전시장을 걸어 다니는 동 안 헤드폰에선 마임 아티스트, 가수, 작곡가, 화가 중 뭐가 될지 망설이던 어린 보위의 음성이 흘러나온다.“나는 유명해지고 싶었어. 나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며 거짓말쟁이거든.” 재즈가 멋있다는 이유로 감상하려고 애쓴 일과 고상해 뵈는 문고판을 들고 다닌 이야기도 들린다. 이런 자기 폭로는 그가 문화의 근원이라기보다 동화하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전시는 경의와 혼돈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한편 너무 깊게 파헤치지 않는 쪽을 택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의 음악적 쇠퇴는 최대한 얼버무렸다. 주제에 개입된 대용량의 찬사, 서사적 위상과 순수한 스타덤에 대한 단순한 지지로 냉정함이 무뎌졌달까. 어마어마한 결과물에 당황해 해석이 길을 잃었달까. 하지만, 앨범 발표와 회고전의 병렬구조는 이미지를 조작해온 보위의 또다른 영리한 행동인 것만 같았다.
이미테이터들이 군림하는 시대에 시간의 경과로 봉인되었던 남자의 1970년을 들춰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시간은 전성기의 적. 1972년, 보위는 ‘5년이 우리가 가진 전부’라고 노래했다. ‘다이아몬드 도그’ 사진에서 그레이트 데인을 냉정하게 잡고 앉은 보위의 침착과 흉포의 대조를 볼 때, 세속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으로 조각된 인상, 그렇게 버무려진 동물적 강렬함 앞에서 세월을 뛰어넘는 전율을 느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건 그의 일상이란 걸. 기이함에 대한 감각은 굳은 약속처럼 사라지지 않으리란 걸.
이 전시는 2013년 3월 23일부터 8월 11일까지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서 열린다. 구찌는 데이비드 보위의 창조 과정을 담은 이 전시를 공식 후원했다.
- 에디터
- 이충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