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이제훈, 나는 심심하지 않아

2016.04.28GQ

맑은 날 한강 둔치에서 이제훈을 만났다. 하고 싶은 게 부쩍 많아지고, 혼자서도 심심할 틈이 없다며 그는 내내 웃었다.

니트 슬리브리스 톱은 루이 비통

“전에는 인터뷰에서도 영화 얘기만 하고 싶었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면 작품에 영향을 줄까 봐, 온전히 캐릭터로만 비춰지고 싶었다. 요즘은 확실히 유연해졌다.”

< 파수꾼 >과 < 고지전 > 후 쉬지 않고 온 것 같다. 스스로 몰아세우는 타입인가? 작품을 할 때는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군대 가기 전에는 더했다. 제대하고 나서는 좀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이 일을 평생 하려면 스스로 잘 다져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년에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 촬영 마치고 유럽도 가보고 미국 동부에도 다녀왔다.

여행지에선 무작정 걷는다고 들었다. 최근엔 어디 갔었나? 가족과 후쿠오카에 다녀왔다. 화보 촬영 때문에 한 번 갔던 기억이 되게 좋았다. 벌써 네다섯 번째 다녀와 익숙한 도시가 됐다.

그래도 쉴 때는 푹 쉬는 편인가? 그냥 멍하니, 가만히 있는다. 그런 고요를 되게 즐긴다. CD를 사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the 1975라는 밴드의 앨범을 샀다. 요즘 그런 음악을 많이 듣는다. M83도. 검정치마의 새 앨범은 왜 안 나오는지.

취향이 의외로 경쾌하다. 늘 진지해 보여서 클래식 음반이나 영화 OST를 얘기할 줄 알았다. 이제훈이라는 배우를 보면서 생각한 두 단어는 피로와 불안이었다. 작품을 할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드는데 끝나고 나서 그 다음이 확실하지 않으면 불안하기도 하다. 누군가가 나를 찾지 않으면 나는 연기를 계속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럼 나는 그만둬야 하나? 그러기에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아직도 연기할 땐 재밌고 신나고 그런가? 해답을 못 찾은 채로 현장에 가면 굉장히 긴장된다. 하면서 풀릴 때도 있지만 점점 더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어떻게 빠져나오나? 많이 묻는다. 감독님, 조명 감독이나 스크립터 등 모든 스태프에게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 수 있는지 무조건 묻는다. 그럴 땐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 것 같다.

니트 슬리브리스 톱은 루이 비통

이제훈의 자존심이란 뭘까? 연기 경력이 길진 않지만 그래도 한 10년 정도가 됐다. 작품을 대하는 자세, 자존심의 기준은 작품 속에 있다. 어렸을 때부터 스크린에서 빛나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내 작품이 오랜 시간 살아남는 마스터피스로 남길 바란다. 신중할 수밖에 없다.

이제훈의 연기는 동물적이라기보다 생각이 많고 움직임과 톤을 보면서 이해하고 싶은 느낌이다. 그냥 본능적으로 움직여버리는 배우가 부럽지는 않나? 그런 점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송강호 선배다. 나도 그렇게 계산하지 않은 채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작품마다 그런 식으로 연기하면 내가 온전히 똑같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내가 바라는 건 캐릭터가 이야기 속에서 튀지 않고 관객에게 내가 본 시나리오의 느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원래 그랬나? 원래 그랬던 것 같다. 작품의 도구가 되고 싶은 거다. 감독님들이 원하는 것에 응답을 해주는 타입이다. 그래서 한 작품에서 보여준 연기는 다음 작품에서 일부러 배제하기도 한다.

작품마다 새로운 도구를 쓰고 싶은 건가? 그 연기는 작품에서만 온전히 남겨지게 하고 싶다. 그렇다 보니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런데 아직은 그렇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 장단점은 스스로도 알고 있다.

그 장단점이 뭔가? 전혀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펼쳐질 때, 반응의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게 장점 같다. 왠지 대중이 원하는 지점에 대해서는 자꾸 반대로 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것에 기꺼이 맞춰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대중이 원하는 어떤 모습이 작품 속에 있다면 그 안에 기꺼이 들어가려고 하는 거다.

지금은 진지하고 무거웠던 이제훈이 점점 유연해지는 과정인가? 그게 성공하든 실패하든 두려워하지 말자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잘하고 멋져 보이는 모습을 과연 언제까지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렇게 젊은 모습일 때 펼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텐데, 지금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흰색 라운드 티셔츠는 티 바이 알렉산더 왕 by 10꼬르소꼬모

< 시그널 >의 그 연기 톤은 의도한 건가? 초반엔 좀 과장됐다고 느꼈다. 과거에 복잡한 아픔이 있었던 캐릭터라는 걸 알고 나서는 이해했지만. 맞다. 그냥 프로파일러 캐릭터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한테는 과거 장면이 첫 촬영이었다.

그럼 캐릭터 입장에서는 시간 순서대로 성장한 건가? 김원석 감독님이 굉장히 억눌리고 내제돼 있는 게 깊은 인물로 표현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람들하고도 섞이지 못하고 계속 부딪히는 인물. 그래서 초반에는 굉장히 힘이 들어갔다. 기술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인물이 그렇게 살아온 결과이기도 했다. 범인을 잡겠다는 경찰로서의 사명감만이 아니라 자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고군분투였으니까. 시청자 입장에서는 캐릭터의 히스토리가 없는 상태이니 왜 저렇게 과한가, 저 연기는 뭔가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나한테는 또 시행착오였던 것 같다.

시행착오? 하지만 그게 이제훈의 연기를 볼 때 드는 묘한 감정이다. 저 연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정말 그런가? 감독님하고는 너무 좋아서 했지만.

< 시그널 >은 에너지가 또렷한 드라마였다. 배우도 주연, 조연을 막론하고 힘이 있었다. 연기하면서도 정말 기뻤다. 그 사람을 통해 연기하는 경험을 했다. 상대에 집중하면 내 연기도 달라졌다. 상대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거다. 김혜수 선배도 에너지가 굉장했다. 평소에는 소녀 같았다. 너무 좋았다.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 현장은 어땠나? < 파수꾼 > 때 같이 작업한 촬영감독, 조명감독과 같이 하게 됐다. 그때 이후로 영화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촬영할 때 정말 돈도 안 받고 한번 잘 만들어보자고 모였던 사람들이 이렇게 큰 작품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조성희 감독도 그때 영화 아카데미라는 곳에서 < 짐승의 끝 >을 같이 만들고 있었다. 그때 인사만 나눈 사이였는데 이렇게 작품에서 만났다. 드라마를 마무리하고 체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바로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을 찍었는데 현장이 너무 편안해서 좋았다. 게다가 감독의 영화관이 뚜렷하니까 믿고,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캐릭터에서 잘 빠져나오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배우가 작품을 한다는 말의 감정적인 기간은 촬영과 관계없이 엄청나게 긴 것 같다. 맞다. 예전에는 내가 맡은 연기만 잘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씩 책임감이 커졌다. 이제는 영화 속에서 프로덕션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졌다. ‘나는 내 할 일 다했으니까 이제 쉬어야지’ 생각할 수가 없게 됐다.

니트 슬리브리스 톱은 루이 비통

성격상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결국 연기가 좋아서 그러는 거다. 극장에서 영화 볼 때 가장 행복하다. 쉬기도 하고 자극도 받고 각성도 된다. 배우로서 어떤 자세로 배우의 인생을 걸어야 할지 생각한다. 배우가 좋은 작품을 하려면 나한테 좋은 글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지금은 그걸 스스로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내가 정말 만족하는 작품이 없다면 마냥 쉬어야 되는 건가? 걱정도 된다. 그렇다고 여러 선택지 중 그래도 가장 나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데. 그래서 스스로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어떤 아이템, 아이디어가 있다면 스스로 기록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뭔가 쓰고 있나? 시나리오를 습작처럼 쓰기도 한다. 점점 역량을 키워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모범생이라고 생각하나? 그냥 재미없는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왜 이렇게 심심하지, 왜 이렇게 재미없지, 생각한 적은 없다.

늦기 전에 일탈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20대 초중반에 이미 했던 것 같다. 이 일을 하면서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나를 내던지고 즐기는 것에 조심스러워졌다.

요즘 같은 날씨에는 어떤가? 봄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도 한다. 일 시작하고 조금 폐쇄적인 부분이 생긴 것 같다. 요즘은 확실히 유연해졌다. 전에는 온전히 캐릭터로만 비춰지고 싶었다. 인터뷰에서도 영화 얘기만 하고 싶었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면 혹시 작품에 영향을 줄까 봐.

전에 < 무한도전 >에 출연하고 싶다고 얘기한 적 있는데, 이제 할 수 있겠나? 너무 갇혀 있을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가 작품 밖에서 하는 부분은 그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이 생긴 것 같다. 작품에도 도움이 된다면 더 유연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 GQ >에서는 묘하게 더 진지해진다. 내가 자주 봐서 그런가? 하하. 나 시답잖은 얘기도 많이 할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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