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관한 비평이 아니다.
하나마나한 말은 집어치우고 그냥 본론부터 시작하겠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다가 두 번 깜짝 놀랐다. 첫 번째는 갑자기 슈베르트의 현악 오중주 2악장이 흘러나와서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다지오라니, 그건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홍상수는 언제나 당당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했다. 그래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몇 번이고 선택했다. 그중에서도 7번을 들려주고 싶어 했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에는 알레그레토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금 단순히 영화의 리듬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홍상수 영화에서 베토벤이 나올 때마다 그건 하나의 태도와 같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구태여 들린다, 라고 쓰지 않고 보인다, 라고 말했다. 영화 속의 인물이 그때마다 마치 난 이 음악처럼 살아갈 테야, 라고 다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슈베르트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 속의 누구도 그 음악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영희도 그 음악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다지오 악장은 이 선율이 들리지 않으시나요, 라고 묻기라도 하듯 몇 번이고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곁에서 중얼거리는 것만 같은 두 대의 첼로로 이루어진 무겁고 가녀린 선율. 아니, 차라리 영화가 영희에게 그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서 지금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도 영희는 그 음악을 듣지 못하고 종종 그 장소를 떠나갔다. 화면에서 문을 열고 저편으로 사라진 다음에도 거기 머물러 있는 카메라. 그 카메라 혼자 남아 있는 공간에 함께 머물면서 쓸쓸하게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것만 같은 선율. 그렇다고 우리들이 슈베르트를 듣고 있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영희가 사라지고 나면 매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치 영희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희가 사라지고 난 다음 미처 따라가지 못한 채, 마치 놓쳐버렸다는 듯이, 그 공간에 남아서 그걸 듣고 있는 건 영화뿐이었다. 반복해서 쓸 수밖에 없는 미처, 라는 부사.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부사가 이렇듯 애처롭게 느껴졌던 적이 있던가. 그의 영화는 언제나 활기찬 동사의 활동이 아니었던가. 나는 종종 홍상수가 마치 부사의 시청각 기호들을 보면서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혼자 쓸쓸하게 듣고 있는 영화. 그때마다 반문하는 것 같았다. 영화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요? 아다지오는 여기서 슬픈 감정이 하나의 물질이 된 다음 길게 늘어져서 마치 바닥에 누워 있는 것처럼 그렇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감정은 시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바닥에 누운 아다지오는 그렇게 비통하게, 힘겹게, 상처받았다는 듯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다지오는 형상이 아니다. 이 비가시적인 감정은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는 자신을 탄식하는 것만 같았다.
두 번째 놀란 것은 제목을 포함한 자막들 때문이었다. 홍상수는 마치 자신의 서명을 하듯이 그걸 자필로 정성스럽게 쓰곤 했다. 자기의 영화 제목, 자기의 배우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이름. 이번에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평범한 서체를 선택한 다음, 마치 무언가를 자포자기한 것처럼, 차례로 이름을 올렸다. 나는 더이상 주인이 아니에요. 홍상수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듯 그렇게 그걸 내버려두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바보야, 그걸 모른단 말이야! 네, 정말 모르겠어요. 당신은 잘 알고 계신가요? 정말 잘 알고 계신가요? 그런데 무얼 알고 계신 건가요? 나는 몇 번이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당신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한 것과 나의 반문 사이에는 우리를 분리시키는 간극이 놓여 있다. 이때 홍상수는 그 틈새 사이에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는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무언가를 해석하려 하거나 혹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의 장면에 대해서 본 대로 말할 수는 있다. 영희가 함부르크에 잠시 체류할 때 검은 털모자를 쓴 사내가 다가와 시간을 물어보려고 한다. 영희와 (아마도) 선배 지영은 무언가 위험한 상대를 만났다는 듯이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한다. 하지만 영희는 그 사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 영희와 지영은 바다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함께 해변에 간 폴과 릴리안에게 다가갈 때 카메라는 영희를 버려두고 그 자리에 서서 지영을 따라 오른쪽으로 팬을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카메라는 영희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그 자리에 왔을 때, 좀 더 정확하게 제자리에 돌아왔을 때, 영희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두리번거릴 때 그 자리에 서 있던 카메라가 이번에는 왼쪽으로 팬을하자 (시간을 물어보던 바로 그) 검은 털모자를 쓴 사내가 영희를 시체처럼 둘러업고 저 멀리 떠나가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지영, 혹은 폴이나 릴리안이 쫓아가거나 부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건 무얼 상징하나요?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건 그저 틈새다. 어떤 틈새?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의 보이지 않는 심연. 그때 그건 영화에게만 보이는 광경이다. 이때 두 개의 팬은 부등가 교환이다. 하나가 현실 안에서 진행된다면 다른 하나는 설명할 수 없는 추상으로 옮겨간다. 그건 무슨 상징인가요? 아뇨, 천만에요. 여기서는 그런 게 아니에요. 영희를 구하기 위한 무엇도 못하고 있잖아요. 속수무책의 광경. 그때 홍상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듯이 카메라 곁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그 사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인 영희를 둘러업고 떠나가는 걸 구경하고 있을 뿐이다. 추상이 되어버린 현실. 아니, 차라리 다다를 수 없는 광경이 되어버린 일순간의 상실. 그 광경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듯이 거기서 1편이 끝나버린다. 그 장면 앞에서, 그 광경을 앞에두고, 점점 멀어지는 영화의 주인공을 그저 쳐다보는 영화의 주인으로서의 상실감. 그때 이미 해변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밤의 해변에 혼자 남는 것은 아마 그 자리에 남겨진 주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2편이 다시 시작될 때, 그건 다시 균형을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처럼 보인다. 마치 1편의 마지막 장면이 무한정 반복되기라도 할 것처럼, 2편이 시작되자 몇 번이고, 단 한 번도 홍상수 영화에서 본적이 없는 옐로 필터 촬영으로 막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이 다시 한 번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어떻게 다시 상황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반대 지점으로 가서 현실에서 주인공에게 달라붙은 상황의 실체에 균열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거의 전례 없는 시도, 아마도 정확하게 그 순간은 천우와 진희가 영희에게 머물 호텔방을 체크인 하면서 들어섰을 때, 그러니까 (시간을 물어보던 그) 검은 털모자를 쓴 사내(와 비슷하게 생긴, 혹은 바로 그 사내)가 그 방의 창문을 열심히 닦고 있는 그때일 것이다. 의도적으로 화면에서 이 사내를 정가운데 놓고 찍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 사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영화 안의 천우와 진희, 그리고 이번에는 영희까지도 그 사내를 보지 못한다. 혹은 못 본 척한다. 창문 바깥의 이 사내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접근 불가능성에 고통받는 것처럼 마치 유리를 열심히 닦아서 없애기라도 할 듯이, 그렇게 하면 정말 없어지기라도 할 듯이, 그 유리창을 넘어오려는 듯이, 애를 쓴다. 하지만 2편에서 내내 감도는 것이 죽어버리고 싶다는 기분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나는 <극장전>의 마지막 대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인제 생각을 해야겠다. 정말로 생각이 중요한 것 같애. 끝까지 생각을 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해.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영희는 몇 번이고 “곱게 죽어야 해. 사람은 죽을 때 곱게 죽어야 해”라고 반복한다. 그 말을 듣고 나자 자꾸만 담배를 피우는 영희에게 시선이 간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 영희는 명수와 (아마도 동거 중인데도 그냥 친구라고 소개해서 화가 잔뜩 난) 도희가 말싸움을 하자 잠시 바깥에 나와 담배를 피우면서 노래를 부른다. “바람이 불어와, 어두울 땐, 당신이 그리울 땐, 바람이 불어와, 외로울 땐, 아름다운 당신 생각, 잘 사시는지, 잘 살고 있는지,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되었는지, 보이시 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되었는지.” 담배를 피우면서 부르는 노래. 곱게 죽기 전에 부르는 노래. 누구를 향해서 부르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영희 앞에 나타난 남자들은 그 노래를 들을 자격이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없다. 강릉에 와서 첫 번째 만난 천우는 누군가를 만나러 갔고, 두 번째 만난 명수는 저 안에서 추운 겨울 날 문을 꽁꽁 닫고 커피 원두를 고르는 중이다. 누구를 위해서 부르는 것일까. 아마 영희 자신을 위해서 부르는 노래일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 질문이 남아 있다. 누구를 부르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일까. 영희는 다시 한 번 해변으로 나간다. 아마 잠시 후 해가 질 것이다. 영희는 꿈속에서 그리운 당신, 아름다운 당신을 만난다. 그런데 매정하게도 그 사람은 조금도 다정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그저 책 한 권을 건네주기 위해 꿈속을 찾아온 것처럼 조감독에게 방에 가서 자기가 읽던 책을 가져오라고 시킨다. 누가 나에게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무슨 영화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이 영화는 영희에게 책을 건네주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영화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홍상수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 <사랑에 관하여>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래서 영희의 꿈속에서 영화감독 상원의 입을 빌려 낭독할 때, 어떤 번역본을 사용했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나와 다른 판본을 갖고 있다는 것뿐이다. 같은 구절을 낭독하면서 그 구절은 “헤어질 때가 온 거지요”라고 시작한다. 혹은 같은 판본을 갖고 있는데 홍상수가 일부 구절을 수정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이 구절을 당신께서 눈으로 읽기를 잠시 멈추고 소리 내어 읽어주시기 바란다. “작별 인사를 할 때가 온 거지요. 거기 객실 안에서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둘 다 자제력을 잃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녀의 얼굴, 어깨, 그리고 눈물에 젖은 손에 키스를 할 때, 그때 우리는 정말 불행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시망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제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사소하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안지영 번역)
여기서 행간을 읽으려 드는 것은 어림도 없는 짓이다. 이때 이 구절을 상원이 읽어주기 전에 홍상수 영화에서 본 적이 없는, 한국영화를 보면서 본 적이 없는, 아니 영화를 보면서 본 적이 없는, 격렬한 좌우 패닝이 펼쳐진다. 나는 이미 1편의 마지막 해변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바라본 팬을 설명했다. 여기서 그 팬이 다시 한 번 사용된다. 당신은 의아하게 반문할 것이다. 왜 여기서 내용이 아니라 형식적 설명이 중요한가요? 내용이 아니라 오로지 형식이 이 시련을 견디고 있으니까, 그것만이 여기서 믿을 만하니까, 그 팬의 운동만이 1편과 2편에서 결정적 순간에 반복하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그 반복만이 올바르게 응답하고 있으니까, 그런 다음 그 반복의 운동만이 다시금 주인의 권위를 지켜주고 있으니까, 나는 그걸 바라보게 된다. 그 운동은 영화를 쳐다보는 모든 시선에 대해서 좌우로 흔들며 부정하고 있다, 아니 차라리 거절하고 있다. 무엇을? 영희 주변의 인물들은 번갈아가며, 마치 서로 자리를 바꾸기라도 하듯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것을 할 수 없다, 고 충고한다. 영희는 그때마다 매번 해야만 하므로 할 수 있다고 맞받아친다. 하지만 자꾸만 지쳐간다. 이때 영화는 이 마지막 순간에, 곱게 죽어야 한다고 다짐하는 영희에게 안톤 체호프를 읽어주면서,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해야 한다, 라고 요구한다. 할 수 있다로부터 해야 한다로의 도약. 이때 조금만 더 뒤로 물러나서 투 쇼트로 쳐다보고만 있어도 되는데 구태여 더 다가가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오가는 그 팬은 영희와 상원과 함께 있겠다는 결단이다. 세 개의 부정. 이것은 미학적인 결단이 아니다. 이것은 영화의 경제학에 완전히 반하는 선택이다. 이것은 메시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해석에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 이것은 스스로 파괴하는 실천적 행위가 아니다. 그런 다음 세 개의 긍정. 나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나는 당신을 바라볼 수 있어요. 나는 당신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로 이루어진 세 개의 항. 당신께서는 세 개의 긍정이 세 개의 부정 뒤에 왔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이때 이 긍정은 오로지 영희를 통해서만 성립된다. 그렇게 해서 영화의 존재론적 일관성은 영희 안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희는 여기서 유일하게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그 권리가 아무리 텅 빈 것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다짐을 하듯이. 우리에게 등 돌리고, 다시 한 번 해가 저물어가는 해변을 떠나간다. 이때 영희는 자기 발로 걸어간다. 그걸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관한 비평을 쓸 때가 아니다. 극장에서 어쩌면 옆자리에서 보았을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홍상수를 지지합니다. 이 글은 홍상수를 지지하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아마 비평을 쓸 때는, 이 영화를 그저 쳐다볼 수 있을 때, 그래서 아마도 더 이상 아다지오를 들으면서 슬픈 느낌이 들지 않을 때, 단 하나의 숏도 측은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영희가 바다에 누워 있는 뒷모습이 그저 아름답다고 여겨질 뿐 단 한 순간도 가련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이 영화에 관한 평을 쓰게 될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본다.
- 에디터
- 글 / 정성일(영화 평론가)
- 일러스트레이터
- 이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