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글라스를 낀 채 덥썩 자쿠지에 몸을 던진 이 남자는 누구인가. 이름은 스티븐 도프. 당신은 모른다고 할 테지만,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열한 살부터 마흔세 살까지 그가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는 무려 83편이나 된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쉬지 않고 찍었어요. 저는 돈 쓰는 걸 사랑하거든요. 말하자면 이런 식이죠. 일이 필요해? 좋아, 한 편 더 찍자.” 그렇게 83편이 됐다. 지구가 좁도록 이름을 알린 배우는 아니지만, 어마어마하게 다작을 해온 그는 가히 직업인으로서의 배우라 할법하다. 뱀파이어, 조폭 두목, 살인범, 뮤지션, 트랜스젠더, 포르노 스타…. 30여 년 동안 거쳐온 배역도 가지각색이다. 아역 배우로 활동해온 스티븐 도프는 마침내 2,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따낸 <파워 오브 원>(1992)의 피케이 역으로 제대로 얼굴을 알렸다. 인종 차별 반대 운동에 앞장선 영국계 아프리칸 청년 피케이를 연기해 쇼웨스트 컨벤션 어워드 신인남우상을 수상한 그는 <블레이드>(1998)의 냉혹한 뱀파이어, 디콘 프로스트로 MTV 무비 어워드 최고의 악역상을 받으며 점점 맞는 옷을 찾았다.
테스토스테론이 진하게 배어나오는 야성적인 얼굴 덕에 이후로도 줄곧 강도, 조폭 두목 등 거친 역할을 맡아왔지만, 스티븐 도프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건 의외의 역할에서다. 스물한 살에 요절한 비틀스 초기 멤버, 스튜어트 섯클리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백 비트>(1993)의 스튜어트가 그의 숨은 낭만성을 한껏 발휘하게 해준 배역이었다면,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 (1996)의 상냥한 트랜스젠더, 캔디 달링은 가장 스티브 도프답지 않으면서 그의 스펙트럼을 가장 멋지게 확장한 역할로 기억될 것이다. 제67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썸 웨어>(2010)의 할리우드 스타, 자니 마코는 그 정점이었다. 모든 걸 다 가진 자니가 딸(엘르 패닝)과 함께 휴가를 보내며 문득 자신의 공허를 깨닫는 이 고요한 이야기는 그에게 배우로서의 확실한 전환점이 됐다. 꽃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콜드 크릭 매너>(2003)와 <얼론 인 더 다크>(2005)로 최악의 배우에게 수여하는 골든라즈베리상에 두 번이나 노미네이트됐지만 ‘다행히’ 수상엔 실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지만 말이다. 83편의 영화를 찍었으니 이런저런 굴곡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스티븐 도프는 스타가 되고 말겠다는 야심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생업으로서 배우라는 직업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그는 삶을 즐기고, 매년 생일이 돌아오면 잊지 않고 생트로페로 휴가를 떠난다. 맹연습 끝에 배역과 물아 일체돼 헤어나질 못한다는 메소드 연기의 귀재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그 많은 작품을 할 수 있었던 비결 아닌 비결일 수도 있겠다. “난 내 라이프스타일-이를테면 베니스 해변에서 사는-을 즐긴다. 난 내가 돈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두렵지 않다.” 그는 성실히 일하고 에라 모르겠다, 즐겁게 돈을 쓴다. 그게 다다.
- 에디터
- 이예지
- 포토그래퍼
- DANI BRUBA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