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를 풍미했던 배우가 21세기에 왕좌를 넘겨줬다. 그러나 한석규는 포기하지 않았고, 두 번째 전성기를 스스로 열었다.
나는 한석규와 동갑이다. 물론 그게 한석규라는 배우를 지지하는 이유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 그에게 관심을 더 두는 건 사실이다. 동갑이라는 이유로 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일도 발생한다. 대중들과의 관계가 한 예다. 내게 그는 언제나 스타인 반면, 젊은 관객들에게 그는 평범한 중년 배우 혹은 아저씨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서른을 넘기자마자 TV를 떠났던 그는 2011년에 T V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 출연했다. <서울의 달>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는 이름만 들어본 배우를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전에 출연했던 작품들의 상당수가 ‘18세 관람가’, ‘청소년 관람 불가’이며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떠올려보자. 젊은 세대는 소위 명품연기를 펼치는 저 배우가 과연 누구인지 신기했을 터, 한석규는 16년 만에 TV로 복귀해 다음 세대와 첫 인사를 나누게 된 셈이다.
승승장구하던 TV를 벗어나 한국영화의 미래를 짊어진 배우로 여겨지던 1997년, 한석규는 한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닥터 봉 >(1995), <은행나무 침대>(1996)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고, <초록물고기>(1997), <넘버 3>(1997)로 평단의 사랑마저 독차지하던 때였다. 인터뷰 상대는 김혜리 기자. 애송이 시절의 그녀에게 한석규란 배우는 얼마나 버거운 인터뷰 상대였을까. 인터뷰의 제목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성공시대’였고, 그녀는 그를 일컬어 “충무로의 상서로운 징조”라 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한석규는 <접속>(1997), <8월의 크 리스마스>(1998), 그리고 <쉬리>(1998), <텔 미 썸딩>(1999)으로 신화를 이어나갔다. 한국 영화 산업에서 그보다 소중한 배우는 없어 보였다. 인터뷰 타이틀대로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으며 그의 성공시대는 영원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한석규는 21세기를 맞았다.
이후 한국영화가 질적, 양적으로 가파르게 상승하던 시기에 놀랍게도 한석규의 유명세는 점차 하락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에게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거다. 누구보다 화려하게 출발했던 한석규는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에게 왕좌를 넘겨주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2000년부터 한석규가 쌓은 필모, 답은 거기에 있다. ‘1990년대 말부터 2003년까지, 송강호는 <공동경비구 역 JSA>, <반칙왕>, <복수는 나의 것>, <살인 의 추억>에, 최민식은 <해피엔드>, <취화선>, <파이란>, <올드보이>에, 설경구는 <박하사탕 >, <오아시스>, <공공의 적>, <실미도>에 출연해 저마다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들과 반대로 한석규는 단 한 편의 영화 <이중간첩>에 출연했을 뿐이다. 게다가 동시대 주류 한국영화와 동떨어진 <이중간첩>은 작품성과 상관없이 한석규에게 시대착오적인 이미지를 안겨줬다.
2000년대 중후반에도 한석규는 신인 감독들과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이름들은 ‘1990년대 중후반에 짝을 이뤘던 감독의 리스트에 비해 빈약한 것이었다. 시나리오를 중시한다는 한석규는 어느 순간 명민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그의 까다로운 거취에 제작사와 감독들이 절로 떨어져 나간 것일까? 한석규는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는데 능한 배우다. 그러나 그가 무턱대고 이 인물 저 인물을 받아들인 건 아니다. 그가 맡은 인물은 시공간을 오가면서도 결코 현실에서 발을 뗀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그가 출연한 영화는 대개 친밀감을 낳고 감동을 선사했으며, 바로 그 점에서 2000년대의 한국영화는 한석규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좋게 평가받은 작가영화나 엄청난 관객을 동원한 블록버스터는 평범한 드라마에서 탈피해 고유한 영역을 욕심내거나 장르를 뒤틀기 일쑤였으며, 그런 영화는 개성이 넘치는 인물을 우선 요구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21세기 첫 10년 동안의 한국영화가 일상의 인물과 거리를 좁히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한석규는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을 드러내는 배우다. 은은한 향을 자아내는 그에게 독한 체취의 역할이 주어질 리 없었다.
이상은 한석규가 1990년대 중반부터 대략 2010년에 이르는 시기를 지나면서 부침을 겪은 사연이다. 대개는 알려진 사실이다. 이 글은 한석규라는 배우를 지지하기 위한 것인데, 왜 나는 그의 과거사를 파헤치고 있는가. 바로 거기에서 그의 고통을 읽기 위해서다. 힘겹게 사는 보통 사람들과 비교해 배우가 겪은 추락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 시기에 한석규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말할 마음은 없다. 다만 나는 그의 위치 이동에 주목했다. 정점에서 21세기를 맞이한 배우가 10년이 지나 대중에게 거의 잊힐 위기에 처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고달프거니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더욱 난제다. 2004년 가을. <주홍글씨>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한석규는 시사회에서 깊은 한숨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그 이후에도 시사회에서 그의 한숨 소리를 여러 차례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뒤늦게 두 번째 발동을 걸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 자의 다급함과 불안의 표출일 거라고 짐작했다. 물론 진실은 나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한석규가 배우로서의 길을 함부로 걷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가 2000년대 중반부터 출연한 작품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주홍글씨 >(2004), <그때 그 사람들>(2004), <미스터 주부퀴즈왕>(2005), <음란서생>(2006), <구 타유발자들>(2006),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2006), <눈에는 눈 이에는 이>(2008),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 <이 층의 악당>(2010), <베를린>(2012), <파파로 티>(2012), <상의원>(2014). 한국에는 작품성을 보장받는 몇몇 감독이 있다. 그들이 한석규를 원하지 않았는지 한석규가 그들을 찾지 않았는지, 진실은 알 수 없다. 눈여겨볼 부분은 한석규가 그런 감독에게 의존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베를린> 정도가 예외다.) 애초 좋은 이야기에 끌렸다는 그의 소신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초기 한석규의 연기를 두고 “부드러움으로 감성과 영혼을 표현하는 깊이를 가졌다”고 높이 평가했던 영화평론가 유지나는 <백야행>을 본 뒤 “한석규는 이제 사라진 것일까?”라며 개탄했다. 글쎄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간혹 어울리지 않는 영화와 만난 적은 있으나 한석규는 한 번도 허투루 연기한 적이 없다. 뒤집어 말해 설령 영화가 모자랐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한석규의 연기 탓으로 돌리기 어렵다는 뜻이다.
근래 희소식이 브라운관에서 찾아온 건 아이러니다. “연기의 보람은 영화 쪽이 좋다”고 했던 그는 무려 16년이 지나 출연한 TV 드라마로 찬사를 들었다. <뿌리 깊은 나무>와 <낭 만닥터 김사부>로 해당 방송국의 연기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혜리와 했던 인터뷰에 이런 말이 나온다. “흥행보증수표가 되고 싶다.” 또한 이런 구절도 있다. “조연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안 될 때라든지 내가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물러나겠다.” 지금 상황과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닌데, 나는 한석규가 유연하게 연기와 삶에 임했다고 본다. 본디 자리로 돌아간 그는 두 번째 전성기를 스스로 열었다. 비대중적 성향의 작품인 <프리즌>(2016)이 얼마전 개봉돼 흥행 중인 지금, 사람들은 한석규의 연기와 대사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는 중이다.
한석규의 독보성은 목소리에 있다. 1980년대 이전 한국 배우들에게는 자기 목소리가 없으며, 이후 한국 배우를 대표하는 안성기와 송강호조차 목소리로는 한석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무릇 대중의 애정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 격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지녀야 한다. 나는 한국에서 한석규를 대신할 만한 배우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는 내려가는 지점에서 포기하지 않은 배우다. 직업인으로서 꽃을 피울 나이인 40대 전후에 하강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뒤돌아서지 않은 배우다.
- 에디터
- 글 / 이용철(영화 평론가)
- 일러스트레이터
- 이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