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서울 올림픽, 88만원 세대. 몰락의 서사를 최전선에서 맞닥뜨린 88년생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긍정에 대하여.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태어난 우리가 서른이 됐다. 고도성장기에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라다 초등학생 무렵 IMF에 가계가 한번 휘청하는 일을 겪었지만, 설마하니 망할 리는 없다는 신념이 있던 시절이었다. 장롱 속 우리들의 돌반지들을 탈탈 털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한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에 비더레즈 티를 뒤집어쓰고 뛰쳐나온 우리는 대한민국을 연호했고 또래였던 효순이, 미선이를 잃고 촛불을 든 채 광장을 메우는 법을 배웠다. 그러니까 우리는 촛불을 든 첫 십 대였다. 이십 대가 된 뒤엔 9년간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밑에서 치솟는 등록금에 허덕이며 많은 것을 잊었고, 스펙을 산처럼 쌓아 간신히 취업 문턱을 넘었고, 88만원을 받아 월세를 떼고 나면 반 푼 없는 지독한 이십 대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이십대 개새끼 론에 모질게 얻어맞고, 요즘 것들은 근성이 없다며 ‘노오력’의 훈사와 열정 페이에 혹사당하고,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어”와 “탈조선이 답이다”를 중얼거리던 우리가 어느새 홀연히 서른이 됐단 말이다.
서른이라니. 그러니까 요컨대, 예전 최영미 시인의 선언처럼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나이라면, 우리는 기득권과 꼰대의 자리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애초에 우리가 잔치를 벌여 본 적은 있기나 하던가. 찬찬히 복기해봐도 우리의 호시절이란, <응답하라 1997>이 불러내온 시절, 흰색이나 노란색 풍선을 들고 오빠들을 따라다니던 시기 정도였다. 대학 시절의 낭만? 캠퍼스엔 몸을 누일 잔디밭 대신 상가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고학년이 되기도 전 각자도생을 위해 취업 스터디와 공무원 시험에 투신하는 통에 동기나 과라는 개념도 희박해졌다. 대학 시절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기 좋은 시절이었고, 기타를 튕길 시간 따위 있을리 만무했다. 고학력, 고스펙 인플레로 사회 진입 시기가 늦춰지면서 서른은 아직 새파란 나이, 아직도 달려야 하는 초년생의 나이가 됐다. 기성세대는 그런 우리를 두고 키덜트니 철이 덜 들었니 하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 세대는 철이 너무 일찍 들었다. 너무 일찍 현실을 알았다. 그리고 너무 일찍 달관해버렸다. 좁은 시야 속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할 뿐 성취와 승리의 경험을 누려보지 못한 우리들은 지쳤고, 포기하고 자조하고 냉소하며 회피했다. 그렇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다.”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은, 과거에 누리며 살아온 만큼을 결코 누릴 수 없는 세대라는 것이고, 그 비극을 최전선에서 맞이하며 몰락의 서사를 체화한 세대라는 것이다. 베이비 부머 세대가 고난의 유년기를 보내고 고도성장기에 개천용들을 마구 배출해내며 ‘과거엔 가난했지만 지금은 성공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등에 업은 세대였다면, 우리는 그 베이비 부머 세대의 자녀 세대로서 ‘과거엔 유복하게 자랐지만 이젠 내리막길만 남은’ 세대인 것이다. 자수성가 세대로서 노부모와 자녀들을 샌드위치로 떠맡게 된 베이비 부머들의 비애도 상당하겠으나, 해도 안 되는 세대, 누리고 자란 만큼 누리지 못하게 된 세대의 무력감과 좌절감은 오죽하겠나. 이렇게 되면 먹히는 건 가장 보수적인 전략밖에 없다. 자족적인 성공이 불가하다면 살아남는 방법은 부모의 자산을 세습하는 것뿐이다. 개천용이 멸종한 이 시대를 지배하는 건 금수저들이고, 금수저를 물지 못한 이들은 일신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욕망의 사이즈를 우왕좌왕 축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1세대 개천용들은 대부분 이른 퇴직과 부동산 실패 등으로 세습할 만큼의 자산을 남겨두지 못했고, 빠른 중산층의 몰락 속에서 자녀 세대인 우리들은 욕망의 축소를 감행했다. 현재 이십 대인 90년대 초중반생들이 ‘헬조선’의 좁은 현실에 처음부터 몸을 바짝 맞추며 자라났다면, 80년대 후반생들은 한창 대학생일 무렵, 최전선에서 급격한 내리막을 맞닥뜨린 세대다. 우리는 어린 시절 꿈과 낭만, 삶의 기대치를 뼈아프게 깎아나가야 했고, 잔뜩 웅크린 채 최대한 미끄러지진 않기 위해 몸을, 욕망을 줄이고 줄였다. 대학 졸업장에 토익 점수 일정 이상만 되면 아직까진 취업이 어렵진 않았던 선배 세대들을 보며, 눈치 게임에 실패한 이들은 급경사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지금, 서른이 된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현실 파악을 마쳤다. 우리는 구몬을 풀고 견고한 유리병에 든 델몬트 주스를 마시며 태권도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시절만큼 잘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조하며 부모에게 얻은 보증금으로 원룸에 몸을 밀어 넣었다.
냉소만 하지 말고 ‘노오오오력’을 해보라고? 전쟁과 가난으로 고난의 유년기를 보냈으나 대학만 졸업하면 대기업들이 졸업생들을 버스째 면접장으로 실어 날랐던 시대가 있었다. “야 우리 때는”으로 시작하는 말들이 어떤 드라마틱한 서사 위에 있는지 알고 있고, 고도 성장기에 경제를 이끌어낸 베이비 부머 세대와 386세대들에게 88만원 세대가 어떻게 보일지도 알고 있다. 열심히만 하면 용은 아니어도 이 무기까진 될 수 있던 시대, 민주화를 일구어낸 시대를 관통한 세대들이 지닌 ‘하면 된다’는 승리의 경험. 우리 세대는 그런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것만 학습한 우리는 체념과 자조의 정조만을 익혔다.
386세대라 불리며 사회를 바꿨고 이제 기득권을 견고하게 차지한 기성세대는 혁명이 완수되자 사다리부터 일찌감치 치워버렸다. 그리고 너희들은 왜 우리들처럼 이 벽을 맨손으로 오르지 못하냐고 묻는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집권한 9년간 이십 대를 보냈던 불운한 세대에게, 이십 대 개새끼론을 들며 책임을 떠넘긴다.(이십 대 개새끼론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집권한 2008년 무렵부터 고개를 들었다.) 중장년층에 비해 낮은 투표율을 지켜보며, 정말 이십 대는 개새끼인가 하는 반성에 빠져본 적이있다. 청년들이 냉소하고 회피하기만 하고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면 그건 물론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청년들이 오로지 자기 일신의 안녕만 추구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과연 온전히 청년들만의 잘못일까? 국가에 대한 기대치가 최저로 접어든 시대에, 청년들이 한국을 바꾸기보단 ‘탈조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한 세대의 책임론으로 귀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직 5월 9일이 오지 않았다. 이번 제19대 대선 사전투표율은 26.1%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사전 투표는 2030의 비중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2030의 투표율이 높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나는 희망을 잃고 싶지 않다. 이 세대를 포함한 현재 청년 세대에선 어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도 차별 받지 않는, 남들과 다른 어떤 것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움직임들이 징후적으로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 이후 이 시대의 담론으로 떠오른 페미니즘을 비롯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자 하는 시선과 목소리는 2030세대에서부터 출발하고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비혼, 딩크족, 동거, 동성 파트너 등 대안적인 삶의 양태들이 불행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메이저 리그에서 벗어나도 루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내나 남편 대신 파트너가, 친구가, 고양이가 함께해도, 혹은 혼자여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팍팍한 현실에 대한 냉소와 자조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긍정을 하고 있다.
물론 그럴수록 작아진 밥그릇을 혐오와 배제의 방식으로 지키려는 이들도 있다. 냉소와 자조의 정조에서 다양성의 긍정으로 뻗어나간 축이 있는가 하면, 혐오와 배제를 통한 자리 지키기로 뻗어나간 대칭축이 있는 셈이다. 페미니즘 담론을 활발히 생산해내는 만큼, ‘일베’로 시작해 여성 혐오, 퀴어 혐오, 인종 혐오 등 소수자 혐오의 이름으로 우경화를 가속화하고 있는 주축도 우리 세대다. 양극화된 긴장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과연 최종적으로 메이저, 기득권의 좁은 성벽 안에 몸을 안전하게 운신할 수 있는 위치인지. 그리고 그런 방식이 과연 나의 생존과도 정말 가까운 것인지. 유년기 짧게나마 낭만을 알았던, 그리고 몰락의 서사를 최전선에서 겪은 우리 세대가 옳은 답을 찾아갈 것임을 믿어보고 싶다.
세대론은 다만 함정일까? 그것에 대해 말하느니 결국 스스로 덫을 놓는 격일까? 의심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나와 내 세대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해에 태어난 12인의 칼럼과 서울에 사는 젊은 사진가 7명이 ‘세대’라는 테마로 자유로이 작업한 사진을 나란히 싣는다.
- 에디터
- 글 / 이예지(1988년생, 에디터)
- 포토그래퍼
- 양승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