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내리는 커피집과 다시 못 올 것들에 대하여.
1686년 문을 연 프랑스 최초의 카페 르 프로 코프(Le Procope)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학문과 지식을 교류한 아지트이자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뒷받침을 잉태한 장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볼테르, 루소, 빅토르 위고, 랭보, 나폴레옹, 발자크 등이 단골이었고 300년이 훌쩍 지난 현재까지도 운영하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살아 있는 유산인 르 프로코프에 서는 역사 속 위인들의 흔적을 느끼며 커피와 식사를 즐기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서울 대학로에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학림다방’은 한국의 르 프로코프라 불릴 만하다. 물론 르 프로코프의 300년 역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특히 시대는 다를지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젊은 지식인들의 아지트였다는 점은 르 프로코프와 유사하다. 1980년대 대표적인 공안 사건인 ‘학림사건’의 명칭은 당시 신군부 세력에 체포되어 처벌받은 전국민주화학생연맹이 첫 모임을 가진 이 다방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몰랐던 나에게 학림의 첫인상은 그저 시골 버스터미널 앞에나 있을 법한 낡아빠진 다방이었다.
13년 전, 그러니까 추웠다고 기억하는 3월 초,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버지가 찾아 오셨다. 말없이 함께 길을 걷던 아버지는 “이 방이 아직 있네”라며 나를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으로 이끌었다.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아버지는 커피, 나는 파르페를 주문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일종의 회의를 위해서였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교였지만 아버지가 꺼낸 말은 ‘재수’였다. 당시 우리 가족에게 장남의 학벌은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지만 시간이 꽤 흘러 창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나는 결국 재수를 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 자리에 앉으면 나름대로 심각했던 당시 분위기와 그 와중에 달콤하고 시원했던 파르페의 맛이 떠오른다. 점잖은 몸짓으로 커피잔을 들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또렷하다. 그날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대학로를, 그리고 학림을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재수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뻔질나게 대학로를 들락거리면서 이런 몽상을 하는 동안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시간이 흘렀어도 학림은 여전히 그대로다. 내 인생의 13년을 포함,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학림다방은 항상 같은 자리를 지켰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남긴 추억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다.
학림은 1956년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인 서울대학교 문리대 캠퍼스 건너편에 문을 열었다. 1975년에 문리대가 관악산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 학생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서울 대학교 문리대 제25 강의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문리대의 옛 축제 이름인 ‘학림제學林祭’가 이 다방의 이름을 땄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신속한 연락 수단이 없던 옛날에는 학생들 서로가 약속이 없더라도 단골 다방에서 죽치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든 만나는 식이었다. 또한 당시 학교 근처 다방은 처음 보는 사이라도 말만 통하면 밤새 사회와 문화에 대해 토론하는 학생들의 아지트였다. 학림 역시 처음에는 학생들이 모였고, 나중에는 점차 쌓인 명성과 대학로라는 장소 덕에 자연스럽게 젊은 지식인, 문화 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전혜린, 천상병, 김승옥, 이청준, 김지하, 황석영, 홍세화, 김민기, 유홍준, 황지우 등 시대별 유명 인사가 모두 학림의 단골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떤 단골이 유명해지면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과 후배들 역시 학림의 단골이 되고, 나중에는 자신을 학림으로 이끈 사람 못지않게 이름을 알리곤 하는 일이 긴 시간 동안 심심치 않게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시, 소설, 음악 등 이 학림 단골들의 학문적, 문화적 성취를 누리며 감명 받고 있다. 그 덕에 학림을 찾을 때마다 ‘이 공간에는 어떤 특별한 힘이 있어서 그들에게 영감을 주지 않았을까’라는 낭만에 찬 상상을 하기도 한다. 물론 학림을 단순히 다방이라는 공간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다만 몇십 년 동안 서로 같은 세대끼리는 물론이거니와 앞 세대와 다음 세대 단골 간의 교류와 토론 장소로서 맥을 이어온 것은 사실이다. 대학로를 거쳐간 지식인과 문화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이라고 할까.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대학로 큰 길가에서 빨갛게 학림이라고 쓰여 있는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투명한 시간의 막을 통과한 느낌이 몸을 감싼다. 오르골의 태엽을 감듯이 삐걱삐걱 낡은 나무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클래식 LP의 선율이 울린다. 시간이 멈춘 듯한 학림이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끝난다. 낡고 바랜 녹색과 갈색으로만 이루어진 인테리어, 매장 한구석을 빼곡하게 채운 1,500여장의 LP판, 불편하지만 다락방같이 정감 있게 설계한 복층 구조와 좌석들. 어느 것 하나 시간이 깊게 배지 않은 것이 없다. 널찍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안과 전혀 다른 시대를 표현하고 있어 창은 움직이는 그림이 된다.
앞서 말한 학림의 역사를 알고 방문하면 이곳은 축복의 공간이 된다. “나는 두렵다. 그리고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생은 귀중하고 단 하나다. 그리고 나는 실컷 살지 못했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이 마지막 커피를 마신 창가. 김승옥이 가난한 대학생 시절 첫 기차를 타고 올라와 새벽잠을 자기도 하고, 첫 번째 소설 <생명연습>을 공개한 자리. 자신의 시처럼 운율 넘치는 삶을 산 천상병이 낮부터 술을 마시며 친구들에게 술값을 얻었던 구석까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학림은 작가들의 젊은 시절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들을 추억할 수 있는 축복을 내려준다. 그들의 작품을 이곳에서 음미하면 이 글의 완성에 학림이 한몫했으리라는 즐거운 상상까지 피어난다. 그뿐이 아니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젊은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올리며 흘렸을 토론의 땀방울과 담배 연기도 곳곳에 배어 있다. 김민기, 이상우, 김광림 등 대학로의 내로라하는 공연 연출가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당시만 해도 무명 배우였던 송강호, 황정민 등 배우와 전인권, 김광석 등 가수가 뒤풀이 공간으로 애용했던 곳도 학림이다. 문학과 연극, 음악까지 우리 문화의 현대사를 실감나게 반추할 수 있으면서도 엄연히 우리와 ‘지금’을 공유하는 곳이기에 학림은 나에게 각별하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일까. 학림은 내게 비극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떠나간 사람의 흔적이 담긴 공간과 물건들은 그 자체로 축복이자 비극이다. 언제든지 그 사람을 추억할 수 있지만, 다시는 볼 수 없기도 하니까. 사고로 죽은 아내의 모든 물건을 처분하면서도 아내가 바람을 불어넣은 비치볼은 버리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비치볼을 차마 버리지 못한 이유는 사랑했던 아내의 숨결이 아직 들어 있는 마지막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학림은 내게 그 비치볼과 같다. 언제든지 꺼내서 추억할 수는 있지만, 일방통행하는 시간의 진리 때문에 그 시절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또한 그들이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재능을 꽃피우거나 새로운 사회를 그려본 곳이란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학림의 축복과 비극을 동시에 느낀 날이면 으레 몸의 힘이 빠지며 차분해진다. 들어올 때 감았던 태엽이 풀리듯, 터덜터덜 나무 계단을 내려가면 더 이상 클래식은 귀에 들리지 않는다. 태엽이 풀리면 오르골 연주는 끝나기 마련. 커피의 쌉쌀함처럼 남아 있는 학림에서의 오늘을 음미하며 대학로 거리로, 현실로 돌아오면서 조금 발칙한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 커피를 마시던 자리도 언젠가 소소하지만 분명한 역사의 일부로 만들고 싶다고, 그리고 학림의 새로운 손님들이 나를 추억하는 축복이자 비극을 느끼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대학로의 상징인 소극장들이 구석으로 숨거나 문을 닫고, 많은 술집과 자그마한 밥집들이 돈이 더 잘 벌리는 형태로 변할 먼 미래에도 학림만큼은 지금 모습 그대로 남으리라 믿는다. 역시 학림을 자주 드나들었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는 카운터 안쪽에 고이 모신 방명록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학림은 안 잊었노라.” 학림은 바로 그런 곳이다.
“한국은 “전 국토가 박물관” 이라던 유홍준 교수의 말은 여전히 유효할까. ‘유치’와 ‘개발’ 플래카드 앞에서 과거는 남루할 뿐이고 ‘(문화유산)지정’ 표어가 나붙어도 실은 앞날을 계산하기 바쁜 시절. 번듯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맛집을 골라줄 순 없어도 직접 발품을 팔아 답사해 차라리 호주머니에 넣은 듯이 간직한 개별의 문화유산에 대해 말한다.”
- 에디터
- 글 / 방현규('민화' 에디터)
- 포토그래퍼
- 방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