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모두의 영화 비평 시대

2017.09.21GQ

영화를 본다는 보편적 행위라는 것은 없다. 단지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본 것이 있을 뿐이다.

영화 비평가가 아닌 사람도 있나요? 약간 우스꽝스러운 반문이지만 동료들이 모여 앉으면 결국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약간 냉소적으로 누군가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다른 장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몇 개의 인상적인 온라인 동호회들. 그 주변을 둘러싼 수만 개의 블로그, 셀 수도 없는 페이스북 페이지들. 하루에도 수천 개의 트위터 맨션이 올라온다. 끝없이 새로 생겨나는 인스타그램들. 그리고 여기에 나의 한 줌도 안 되는 직업적인 동료들. 물론 누구나 비평을 쓸 수 있다. 그건 특권이 아니며 (게다가) 의무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비평을 쓰는 직업적인 프로페셔널들과 그저 취미로 쓰는 아마추어들을 나눌 생각이 없다. 또한 다른 장르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따금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쓰는 이들을 분리해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누구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무언가 말하고 싶어진다. 나는 비평을 누가 쓰건 그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비평의 담론은 이 모든 글과 말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전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잠깐, 전선이라고 했나요? 네, 그렇습니다. 이건 더도 덜도 아닌 전선입니다. 진행되고 있는 전쟁의 선. 비평은 그것이 글이건 말이건, 지면 위에서 진행되건 무대 앞에서 실행되건, 영화 앞에 선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왜 전선이 되어야 하나요? 우리 앞에 놓인 영화는 언제나 하나의 결론이다. 비평은 그것을 다시 질문으로 되돌리는 반격이기 때문이다. 물론 올바른 반격도 있고 잘못된 반격도 있다. 좋은 반격도 있고 나쁜 반격도 있다. 하지만 이 반격이 질문의 형식을 취한다고 해서 비평의 목표를 해석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건 우리의 임무를 오해한 것이다. 우리는 하여튼 영화라는 작품안에 들어가 살아야 한다. 여기서 이 삶의 근거와 내가 맺은 관계를 물어보아야 한다. 수많은 관계. 때로는 정치적인 관계. 대부분은 미학적인 관계. 이따금은 윤리적인 관계. 여기서 만나는 친숙하기도 하고 때로 낯설기도 한 근거. 그때 질문은 영화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투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벌이는 그 무엇의 제기이다. 그 무엇? 이 순간 모든 비평은 그 무엇이 이것임을 밝히고자 맹렬하게 다가가려고 애를 쓰기 시작한다. 무엇으로? 언제나 언어에 의지해서. 왜? 오직 언어로만 말을 걸 수 있고, 그 앞에서 말을 멈출 수 있으니까. 잘 기억해두기 바란다. 비평은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만큼이나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좀 더 단순하게, 그리고 반복하듯이, 약간 선언의 말투를 빌려 말하고 싶다. 모든 비평은 질문의 언어이다.

나는 먼저 우리 주변에서 현재 진행되는 비평의 몇가지 모델을 제시하고 싶다. 그런 다음 다소 무리하더라도 그에 관한 정식화를 제공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모델은 거의 만연하다시피 한 별점의 비평이다. 물론 여기에 20자 비평이 악질적인 상황에 가세하고 있다. 나는 이미 여러 자리에서 이 별점이 지닌 문제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는 않겠다. 그 대신 여기서는 이 별점의 심리적인 측면을 건드려보고 싶다. 아마 누군가는 내게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찌되었건(!) 별점을 비평으로 인정하시는 건가요? 약간 짜증스러운 대답. 상황이 이 지경인데 안 하면 어쩌겠어요. 먼저 별점을 받아들이는 쪽. 이 별점이 도움이 되십니까? 네, 물론이지요. 주말에 볼 영화를 결정할 때 가장 단순하고 분명하거든요. 알겠다. 아마 긴 비평을 읽는 것보다는 그게 간편하긴 할 것이다. 그럼 그 별점을 믿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는 의견이 서로 갈린다. 그건 (…)의 별점만을 참고 할 따름이에요, 라고 다소 새침하게 대답한다. 물론 여기서 괄호 안은 사람들마다 다르다. 이때 괄호 안을 설명하는 한 가지 공통된 말이 있다. 괄호 안 주인의 별점은 제 취향이거든요.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괄호의 주인과 구경꾼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정투쟁이다. 구경꾼들이 주인을 선택하는 기준은 미학적 기준 혹은 정치적 태도를 근거의 지평으로 존중할 만한 판단과 비평의 방법론에서 온 것이 아니다. 마치 내가 한 것만 같은 별점, 다만 내가 바쁘기 때문에 미처 모두 보러 갈 시간이 없을 때 기꺼이 시간을 물 쓰듯 써가면서 그걸 대신해줄만한 별점의 주인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은 별점의 주인을 존중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 별점을 믿고 영화를 본 다음 자신의 별점과 다를 때 구경꾼들은 자신을 의심해볼 수 있는 겨를이 전혀 없다. 물론 한두 번은 참을 것이다. 하지만 몇 번 반복되면 그들은 자신의 주인을 바꿀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다. 작별은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괄호 안은 새로운 이름으로 채워진다. 그런 다음 별점을 매기는 쪽. 좀 더 한가로울 뿐만 아니라 열정적인 이들 중에는 자신이 직접 별점의 주인이 되어 나서기도 한다. 왓챠는 주인의 욕망을 가진 이들을 위한 ‘스타워즈’의 갤럭시이다. 나는 왓챠를 하루 종일 둘러본 적이 있다. 설마 이 영화도, 라고 생각한 영화들이 누군가에게 별점이 매겨져 있었고 정작 어떤 영화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아직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목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핵심은 명단에 있지 않다. 미학적으로 혹은 실용적 관점에서 거의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이 귀찮은 일을 이토록 많은 사람이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일까. 단지 재미있어서, 라고 하기에는 좀 더 설명하고 싶어진다. 별점은 판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재판에 가까워 보인다. 당신은 내게 만족을 주었습니까? 물론 만족 앞에 붙어야 할 말은 각자의 사랑, 각자의 도그마, 각자의 참조틀, 각자의 미끼, 각자의 도박일 것이다. 영화를 본 다음 판결문을 내린다. 물론 아무도 이 판결을 엄격하게 내리지는 않는다. 일시적인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고 약간 심술을 부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어떤 별점의 주인도 동일한 별점의 목록을 열거하고 나면 그 변덕스러움에 그 스스로도 참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문제는 개별 명단의 별이 매겨진 개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별점을 매기는 행위는 어떤 영화 앞에서도 그 행위의 주인을 항상 우위에 서게 도와준다. 그건 재판정에서 판사가 피고보다 훌륭해서가 아니라 제도에 의해 우위를 점한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위치에서다. 넌 별 한 개야, 라고 조롱하는 기쁨뿐만 아니라 별 다섯을 줄 때조차 그걸 알아보는 내가 얼마나 훌륭한가, 라는 어떤 우쭐거림이 거기에 감돈다. 자, 그럴 수도 있다. 나는 거기까지 긍정한다. 그 긍정의 마음으로 맞받아치자면 나는 거기서 그 둘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작동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별점은 그 영화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요구하는 칼이 아니다. 그 칼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야 한다. 그런 다음 오직 자신의 결단에 의지해서 내리쳐야 한다. 그 영화는 별 한 개야, 그걸 알아보는 나는 얼마나 훌륭한가. 반대로 별 다섯을 매겨야 할 때 그것은 패배의 증언이 되어야 한다. 어떤 영화들은 보는 쪽을 초월해버리기도 한다. 그런 영화 앞에 섰을 때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 1929년 파리의 관객들은 <잔 다르크의 수난> 앞에서 패배하였다. 1939년의 뉴욕의 관객들은 <시민 케인> 앞에서 패배했다. 1953년 로마의 관객들은 <이탈리아 여행> 앞에서 패배했다. 1954년 동경의 관객들은 <7인의 사무라이 > 앞에서 패배했다. 1956년 LA의 관객들은 <현기증> 앞에서 패배했다. 1967년 파리의 관객들은 <플레이 타임 > 앞에서 패배했다. 나는 패배의 명단을 수도 없이 열거 할 수 있다. 그걸 알아보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왜 별점의 주인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 할 용기가 없는가.

비평을 하고 있다는 착각. 이 착각의 자리에서 빌려온 검열관의 흉내를 내는 복장도착의 사랑. 그런데 당신에게 영화는 어디에 있나요?

여기 두 번째 모델이 있다. 이번에는 약간 방향을 바꿔야 한다. 나는 영화는 영화를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당신은 당연한 말을 왜 하세요, 라며 의아하게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잠시만 미간을 찌푸린 다음 마치 흐릿해진 행간 사이를 바라보듯이 그 어떤 비평들을 떠올리면서 읽어주기 바란다. 여기 기생충 같은 비평들이 있다. 이 비평들은, 아니 너무 많은 비평들이, 매트릭스에 빠진 비평을(가장 나쁜 의미에서) 재생산해내는 중이다. 여기서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 이라는 말을 썼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매트릭스라니요? 오늘날 비평을 가장한 정치적 문건들이 팸플릿처럼 유통되고 있는 중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영화에 관한 정치적인 비평들을 존중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평은 매트릭스에 봉사하는 거짓말들이다.

거짓말이라고 했나요? 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트릭스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가혹하게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거짓말을 위해서 매트릭스조차 각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매트릭스의 주인들에게 반역자들이며 영화 앞에서 거짓 예언자들이다. 그들은 항상 영화를 빌려 어떤 세상을 약속한다. 좋은 세상. 영원히 오지 않을 세상.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세상. 그 세상을 위해서 영화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나는 아연실색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적인 불행에 빠진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은 왜 영화가 나를 위로하지 않느냐고 화를 내는 중이다. 그러면서 교묘한 말투로 전선을 확장하고 당신을 동지라고 부르며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적이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나는 반문하고 싶어진다. 정말 당신의 매트릭스에는 그렇게 쓰여 있나요? 물론 이 비평이 다시 한번 사랑의 문제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피지배자가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복종의 사랑이다. 거의 마조히스트에 가까운 사랑의 담론, 주인과 이데올로기의계약을 맺은 복종의 비평.

세 번째 모델을 말할 차례이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비평을 쓰지 않는 비평가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마추어 비평의 자리에 완강하게 머문다. 그때 그들은 자기의 언어를 갖지 않은 비평으로 비평의 전선에 뛰어든다. 그 대신 이 비평은 지속적으로 지식을 요구하고 나선다. 아니, 차라리 지식으로 영화를 덮어쓴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건 무슨 말인가요? 언젠가부터 이상한 대답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예. <비정성시>를 본 다음 허우 샤오시엔이 좋아졌어요, 라고 말하는 대신 허우 샤오시엔이니까 <나일의 딸>이 좋아요, 라고 말하는 순간과 마주했을 때 처음에는 무심히 지나쳤다. 여러 자리에서 서로 다른 사람의 입에서 (영화 제목과 감독의 이름을 바꿔가면서) 같은 문장들이 유령처럼 출몰하기 시작했을때 비로소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작가주의 논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로부터 이탈해버린 기괴한 왜곡의 사례들. 동료인 허문영은 언젠가 내게 의아한 표정으로 또 다른 사례를 말해주었다. “오즈 강의를 하는데 들어오신 분께 오즈의 어떤 영화가 궁금합니까,라고 질문을 했는데 오즈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은 거예요. 이분이 왜 오즈의 영화를 보지 않으면서 오즈 영화에 대한 비평이 궁금해졌는지가 궁금해졌어요.”

나는 다른 장르에서 비슷한 사례를 만난 적이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적이 없으면서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읽고 감동을 말하는 독자들. 놀랍게도 내가 만난 사람은 알베르틴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자들 혹은 관객들. 목표와 목적 사이의 간극. 이 비평은 영화에 흥분하는 대신 지식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아니, 차라리 지식과 사랑을 나누면서 영화를 버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이들은 영화에 관한 비평을 쓰는 대신 지식에 의지한 명단으로 경쟁하는 것이 논쟁이라고 믿는다. 아니, 차라리 영화를 논박하기 위해서 질서정연한 위계질서와 그로부터 산출한 추리를 제공하면서 비평에 반박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때 그 질서는 어디서 온 것일까. 하나의 블랙홀. 메울 수 없는 구멍. 그때 그들은 지식의 자리에 자신들의 검열관을 앞세운다. 검열관이란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그들에게 통과할 수 있는 지식과 통과할 수 없는 지식을 분류하는 이름. 상상의 공동체라고 부를 만한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부추기면서 맹목적인 숭배와 근거 없는 증오를 쌓아올리며 도그마에 사로잡힌 이들에게서 무얼 배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비평은 오직 단언과 이미 검증된 판단의 지식에 의지해서 만들어진 담론의 무한 반복으로만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 과정을 경유하여 이미 제도의 일부에 투항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한다. 물론 그들은 지식의 담론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건 그들이 생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생산된 것을 빌려다가(훔쳐다가?) 돌려막기를 해가면서 자신들에게 스스로 권위를 부여하려는 퇴행의 제스처로만 이루어진 비평의 (자위)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건 움켜쥐었다고 (했다고) 착각한 상태에서 움켜쥐어진 (당한) 것이다. 비평을 하고 있다는 착각. 이 착각의 자리에서 빌려온 검열관의 흉내를 내는 복장도착의 사랑. 그런데 당신에게 영화는 어디에 있나요?

왜 그런 의도에 당신은 머물고 있나요? 무엇이 당신을 거기 머물게 했나요?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왜, 라는 질문과 어떻게, 라는 질문 사이에서 간극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비평은 정확히 거기에 머물게 된다.

이제 마지막에 해당하는 네 번째 모델을 말해야 할것이다. 이것을 자백의 모델이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평은 영화 앞에 서면 분석을 종결짓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종결 될 리가 없다. 그건 단지 그 영화가 비평을 통과하는 일부의 흔적을 재빨리 기록한 것일 뿐이다. 영화에 관한 모든 비평은 그 영화를 본 경험의 자백이다. 그러므로 비평에서 읽을 만한 것이라곤 그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 전부이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에서 비평과 서로 가장 좋은 상태는 그 영화를 아직 보기전까지 만이다. 일단 그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리 우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자기가 본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혹은 써야 한다. 이때 영화를 본다는 보편적 행위라는 것은 없다. 단지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가 본 것이 있을 뿐이다. 이때 자기가 본 것이 자기의 자리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러므로 비평은 결국 영화를 본 다음 여기에 누구도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이 네 번째 모델은 아무 이득이 없는 데서 멈출 수밖에 없는 건가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이 바보 같은 자백의 모델은 몹시 교활한 셈을 치루기 위해서 사용되는 전술이다. 그건 영화를 향해서 그걸 보여주기 위해 만든 쪽에게도 당신은 주인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장면이 의도라고 하자. 좋다.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이 있다. 왜 그런 의도에 당신은 머물고 있나요? 무엇이 당신을 거기 머물게 했나요?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왜, 라는 질문과 어떻게, 라는 질문 사이에서 간극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비평은 정확히 거기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서 양쪽을 두리번거리며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라고 질문하게 될 것이다. 예상치 않은 여백. 그 안의 의도 바깥에 놓인 노이즈들. 무언가 성공을 일시에 실패로 되돌려보낼 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가득 찬 낯선 그것. 비평은 그것이 머무는 장소를 점령하기 위해서 보고 또 본다. 영화가 갖고 있다고 가정했던 것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그건 비평이 그 안으로 들어가 그 자리를 점유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질문이다. 블랑쇼는 이 간극의 장소를 나보다 멋지게 정식화시켰다. 장소 없는 장소. 바깥에 있는 내밀한 안. “우리는 거기에 없다. 다른 곳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기에 있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평이 들어선 이 장소는 들어선 문도 없고 나갈 수 있는 문도 없다. 비평이 지금 막 도착한 거기에 있는 곳. 영화가 금방 끝난 다음 어디론가 떠나가 버리면서 남겨둔 곳. 그런데 정말 남겨둔 것이 있기는 했던 것일까. 비평이 네, 자백하겠습니다, 라고 할 때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건 영화에게 자백하라고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 네 개의 모델은 라캉이 1969년 11월 26일에 행한 ‘4개의 담론의 생산’을 느슨하게 참고한 것이다. 참고라고 말하긴 했지만 유머에 가깝게 각색한 것이다. 하지만 의도까지 유머인 것은 아니다. 내가 옆에서 보기에 지금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는 영화에 관한 비평의 담론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다소 경황 없이 뒤섞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것은 여기에 나도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지도를 그리는 데 만족하려고 한다. 혹시 오해할지 몰라서 덧붙이자면 4개의 모델 중 우열을 가릴 생각은 없다. 그들은 각자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 말을 덧붙이고 싶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오늘날 비평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그걸 그나마 읽는 사람들은 어떤 형식으로건, 그러니까 4개의 모델 중에 하나에 가담하고 있는, 비평을 쓰는 이들뿐이다. 읽는 자들이 쓰고, 정확하게 반대로 동작을 따라 하듯이 쓰는 자들이 읽는다. 이 순환 속에서 서로 다른 영토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사실 상공비행해서 내려다보면 잘 구분되지 않는 카오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자, 그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4개의 모델 전부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싶다.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마라. 그게 전부다.

비평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비평의 권위는 사라졌다. 비평적 콘텐츠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지만 비평은 소비되지 않는다. 누구나 비평적인 목소리를 내지만 비평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근데 비평이 존경이나 관심과 가까웠던 적이 있기는 한가. 이달 < GQ >는 비평의 절대 변할 수 없는 불편과 이 시절의 고쳐 앉은 자세를 모두 들여다본다.

    에디터
    글 / 정성일(영화평론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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